2011년 7월호

“이승철과 나는 견우와 직녀 칠월칠석에만 보죠”

‘위대한 멘토’ 김태원의 다시 본 음악인생

  • 김지영 기자│kjy@donga.com

    입력2011-06-23 1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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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과 나는 견우와 직녀 칠월칠석에만 보죠”
    “화장이 잘됐네요.”

    “그렇죠? 오늘 화장, 예술입니다.”

    이제야 진짜 김태원(46) 같다. 시커먼 선글라스를 신체 일부처럼 쓰고 다니는 ‘록의 전설’ 부활의 리더. 좀 전까지도 선글라스를 벗고 ‘분칠’하던 이 남자. 우연히 본 그 얼굴은 조금 낯설었더랬다.

    물 빠진 청바지에 체크 남방을 걸치고, 검정색 니트 모자로 포인트를 준 옷차림이 제법 ‘쌈박’하다. 굽 높이가 족히 5㎝는 넘어 뵈는 거무죽죽한 가죽 부츠도 멋스럽다. 두 눈에는 어김없이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다. 렌즈가 너무 시커메서 시선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런 소품들과 긴 생머리가 어우러져 뮤지션 특유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그를 늘 따라다니는 휴대품들도 눈에 띈다. 주인장의 손때가 묻은 화이트 톤의 일렉트릭기타와 선글라스 여러 개가 담긴 고급스러운 안경함, 국산 담배인 ‘에쎄 순’이다.



    오랜 ‘친구’들이 곁에 있어서일까. 공연장이 아닌, TV예능프로그램 대기실에서 마주한 로커의 몸짓이 제집에 온 듯 편해 보인다. 하기야 그는 요즘 인기 절정의 ‘예능 늦둥이’가 아니던가. “김태원에게 예능이란?” 하고 물었더니 바로 답이 나온다.

    “삶 그 자체입니다. 예능은 20년 넘게 받지 못하던 대중의 관심을 모아준 음악적 통로예요. 어느 날 갑자기 예능이라는 통로가 열린 건 아닙니다. 라디오방송 게스트를 5년간 했고 거기서 저의 언변과 스토리텔링을 인정받았기에 예능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데뷔 후) 20여 년이 지나 그 기회를 얻은 것이죠.”

    TV예능프로그램에 발을 들인 지도 벌써 3년째. 첫 무대는 2008년 말 출연한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였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그의 이름은 인터넷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김태원 어록’으로 인터넷을 달구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언변 덕분이다. 그의 입담은 2009년 봄 합류한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도 빛을 발했다. 데뷔 후 처음 ‘국민할매’라는 애칭도 얻었다.

    최근 또 하나의 감투를 썼다. 바로 ‘위대한 멘토’다.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서 그의 제자 백청강과 이태권은 1,2위를 차지했고 심사위원 점수에서 최하위를 면치 못하던 또 다른 제자 손진영도 4강에 진출했다. 한때 외인부대로 불리던 이들은 김태원 멘토와 함께 ‘기적’을 보여줬다.

    ▼ 시청자들은 왜 유독 김태원씨의 제자들에게 열광했을까요.

    “단 한 가지도 계획됨이 없어서일 거예요. 만남 자체를 즐거워했고, 제가 그 친구들을 발견한 것에 대해 굉장한 희열을 느꼈고, 그 친구들과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매순간을 충실히 성실히 해내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을까요.”

    “가르치려드는 순간부터 부작용이다”

    ▼ ‘멘토의 힘’이라고들 하던데요.

    “그건 불을 붙일 때 약간이에요. 불이 붙고 난 다음부턴 그들 스스로 불붙은 거죠.”

    ▼ 단점보단 장점을 찾아내 자신감을 심어주는 멘토링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생각으로 임하셨나요.

    “사실 본인만큼 단점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멘토라고 해서 그것을 지적하는 건 스트레스를 줄 뿐이지 발전을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에 부작용이 많았던 이유죠. 그들이 단 한순간이라도 현재를 편하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멘토다,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청년부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진심으로 이야기하는데 받아주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제가 말합니다. ‘가르치려고드는 순간부터 부작용이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배워야 한다. 그런 자세라면 안 통할 일이 없다. 원 틀부터 깨라’고요.”

    ▼ 제자들에게 무엇을 배우셨나요.

    “그들의 열정을 배우고, 그동안 망각했던 열정을 일깨우고, 순수를 배웠습니다. 이 나이에 순수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나마 지켜가는 거지. 그나마 지켜서 이정도인 거예요.”

    ▼ 멘토가 되어달라는 팬이 많을 것 같아요.

    “편지가 많이 오죠. 제게는 음악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잖아요. 사실 제가 쓴 가사에 제 얘기가 다 있어요. 그 음악을 듣고 생각하는 것이 저와 대화하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저니까요.”

    1993년 1월부터 그는 일기를 써왔다. 일상의 소소한 행적에 대한 한두 줄짜리 기록이다. 일기를 쓰듯 방송에서도 그는 삶의 철학이 담긴 명언을 남기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주는 그의 명언들은 ‘김태원 어록’으로 불리며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이승철과 나는 견우와 직녀 칠월칠석에만 보죠”

    MBC’위대한 탄생’의 김태원 멘토와 그의 제자들. 왼쪽부터 손진영, 백청강, 김태원, 이태권.

    ▼ ‘3등은 괜찮다. 삼류는 안 된다’같은, 심금을 울리는 어록이 화제인데 비결이 뭔가요.

    “경험이죠. 책은 안 보니까. 맞이하는 현실을 가장 성실하게 대할 때, 어떤 계산이 포함되지 않았을 때, 진정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맞이할 때 좋은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 속에 부정 타는 느낌들이 섞인다면 감동이 없어지죠.”

    ▼ 음악을 혼자서 터득하는 것과 전문가에게 배우는 것 중 어느 쪽을 선호하시나요.

    “후자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전자는 굉장히 독특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저는 전자입니다. 작곡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듣지 않았을 때 얻는 장점은 떠오르는 모든 음악이 자기 겁니다. 반면 많은 음악을 들었을 때는 떠오르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 인디밴드가 최근 부쩍 늘었는데 록 음악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세요.

    “그 자체를 자로 재듯이 재는 순간부터 음악을 할 자격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어야 해요. 배고픔 그 자체도 자산입니다. 먼 훗날 뒤돌아봤을 때 다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왜 배가 고팠는지. 연결되지 않는 한 부분도 없습니다.”

    ▼ 배불러지면 음악이 달라지나요.

    “그것은 배고픈 기간이 얼마나 길었느냐에 따라 달라요. 2년 전에 그 좋아하는 술을 끊었는데 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술을 마셨을 때 완전히 가는 상황이 각인돼 있기 때문이에요. 술을 안 마실 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죠. 비단 술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중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건강 때문에 술을 끊으셨나요.

    “살기 위해서죠. 먹으면 죽으니까. 저는 그렇지 않고서는 끊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 목숨이 걸려야 끊습니다. 거기까지 궁지에 몹니다. 저 스스로를…. (술을) 조금 더 마시면 김현식 스타일로 가는 거죠. 딱 그 케이스죠.”

    2년 전 그는 간경화 초기 판정을 받았다. 2005년에도 간경화 판정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그 충격으로 재산을 정리하고 산에 들어가 준비한 유작이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배경음악이 된 9집 타이틀곡 ‘아름다운 사실’이다. 2005년 간경화는 오진으로 밝혀졌지만 2009년엔 복수에 물이 찰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 다행히 간 상태는 금주의 노력에 힘입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한 고비를 넘기니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지난 2월 ‘남자의 자격’에서 받은 종합검진에서 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두 차례에 걸쳐 수술한 그는 앞으로 5년간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 아무런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완치로 봐도 무방하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수술이 잘됐습니다. 많은 분이 걱정해주고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준 덕분이에요.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 방송에서 누누이 ‘인생을 험하게 살았다’고 말해왔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비 오는 날 허공에 대고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비명을 지르는, 그 정도의 기로에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혼자 방구석에 앉아 소주병을 기울일 정도의 고독함은 있을망정…. 그렇게 아무 이유 없고 듣는 사람 없는 허공에다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처절함을 맛봤죠. 그런 기간이 거의 다입니다.”

    “첫사랑에 취해 동반자살 시도”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그러면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말없는 눈물이 보인다. 1986년 1집 타이틀곡 ‘희야’로 화려하게 데뷔한 록그룹 부활. 그러나 리더인 그는 이듬해 대마초 흡입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그해 낸 2집은 1988년 부활이 해체돼 빛을 보지 못한다. 팀에서 독립한 보컬 이승철은 1989년 첫 솔로앨범을 내자마자 인기가 폭발한다. 당시 이승철이 부른 ‘마지막 콘서트’는 김태원이 만든 2집 수록곡 ‘회상3’을 리메이크한 노래다.

    김태원은 1990년 1집 멤버 황태순을 비롯한 몇몇과 ‘게임’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지만 주목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대마초 흡입으로 7개월간 수감된다.

    “이승철과 나는 견우와 직녀 칠월칠석에만 보죠”

    김태원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서 기타를 배웠다.

    ▼ 방황했던 지난날을 후회한 적 있나요.

    “제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무수히 떠오르는 멜로디입니다. 멜로디가 계속 머리 위에 있는 거죠. 그것을 주체할 수 없는 거죠. 그것을 들려줄 수 없을 때, 그것을 남에게 들려줄 기회조차 없을 때 그 상황이 미칠 만큼 힘든 것이죠. 저는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기 때문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 떠오르는 멜로디를 기록해두시나요.

    “머릿속에 있어요. 늘 떠 있어요. 그건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영등포시장을 지나가면서 문득 맡은 어떤 향이 초등학교 때 맡은 향과 같다는 기억을 합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초능력에 가까운 것이죠. 40년 전에 맡은 냄새를 기억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멜로디를 담습니다. 그것을 꼭 기억해두지 않아도 그 멜로디를 생각했다면 언젠가 그 부분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렇게 쌓아놓는 거죠.”

    ▼ 외로움, 고독이라는 감정 때문에 자살을 꿈꾼 적이 있나요.

    “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첫사랑과….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성에 눈을 떴어요. 평생을 짝사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좋아하기만 한 것이죠. 그러다가 처음으로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그 사랑이 너무 버거워서,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아끼는 것을 망각해버렸죠. 아꼈어야 되는데 아끼질 못하고, 학생이니까 학교 다니면서 만날 수도 있는 것인데 그 자체를 소유하고 싶었던 거죠. 취해버렸죠. 그러다 엄청난 오점들이 생기면서 결국은 비극으로 치닫죠. 동반자살을 꿈꾼 거죠. 병원에 실려가서 살았지만.”

    ▼ 우울증 때문이었나요.

    “상사병이죠. 다른 종류의 병이죠. 소유하고 싶은 병. 둘이 잘해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학생이고, 갈라놓으려고만 하니까 과감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 자살의 주된 원인인 우울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인간의 병 가운데 가장 슬픈 병입니다.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죠.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아픈 것이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을 때 상황은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이 안 돼요. 그 기분은.”

    1989년부터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1991년 그의 두 번째 옥고도 우울증에서 촉발했다. “이승철과 결별 후 찾아왔다”는 우울증은 1992년까지 계속됐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러 갔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도로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겐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뜻하지 않은 일도 겪지만 뜻밖의 일도 찾아온다. 기다려라.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다리면 희망이 찾아온다.’ 우울증은 기다림을 망각한 병이에요. 기다림 자체가 뇌에서 사라지죠. 내일이 없습니다. 주변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달렸어요. 자신을 움직이는 건 자신이거든요.”

    ▼ 어떻게 우울증에서 벗어나셨어요.

    “음악을 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면서 벗어날 수 있었죠. 1993년 3집 타이틀곡인 ‘사랑할수록’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잖아요.”

    ▼ 밴드생활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고 3때, 어찌 보면 지금 내가 치는 기타의 프레이즈(phrase)가 그때 다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연습을 했죠. 그때 기타를 다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불면증이라는 병을 앓기 시작한 게 그즈음이에요.”

    음악을 사랑한 외로운 소년

    불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부활 6집 수록곡 ‘불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편의 시 같은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이 새벽 나를 걷게 하는 알 수 없는 이에게 지루한 기다림을 길들여 내는 신이여/ 우연한 기적으로 내게 영원히 머물러온 오래된 시계 속에 숨겨진 너로/ 저 산 위 구름이 빨갛게 물드네/ 희미한 달빛에 저 별들이 지네/ 이 새벽 나를 걷게 하는 알 수 없는 이에게 잠들어 가는 나를 항상 흔들어 대는 이여/ 우연한 기적으로 내게 영원히 머물러온 오래된 시계 속에 숨겨진 너로/ 저 산 위 구름이 빨갛게 물드네.’

    요즘도 그는 불면의 밤을 보낸다. 그때마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기타를 들고 그만의 공상과 상상의 나래를 편다. 1집 수록곡 ‘비와 당신의 이야기’도 불면의 밤에 탄생했다. 고교시절 만든 처녀작이자 첫사랑 이야기다. 그의 첫사랑은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였다.

    ▼ 가끔 생각나세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죠. 그 소중한 것을, 그 아름다운 기억을 왜 잊습니까. 지금도 기억을 더듬어 가사를 쓸 만큼 평생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이죠. (자살 시도 이후에) 만난 적은 없지만 자기를 향한 노래라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 노래가 더 처절할수록 더 못 나타나겠죠.”

    ▼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셨어요.

    “굉장히 외로운 소년이었어요. 조용했죠. 중학교 때까지는 불량서클 같은 데 매력을 느끼는 학생이었죠. 그 이후엔 음악에 빠져들면서 영화음악에 심취했고. 당시 라디오에서 밤마다 10시 넘어서 하는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가 있었어요. 그것을 듣는 낙으로 살았어요. 제 음악의 바탕이자 모태가 된 거죠. 영화음악들이.”

    그가 좋아하는 영화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모든 영화음악이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살아있는 영화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다.

    ▼ 공부에 몰두해볼 생각은 없었나요.

    “취미가 없었어요. 왜 해야 하나 그랬어요.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 소주병을 두고서 주둥이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는 연습을 했죠. 기타 잘 치려고요.”

    ▼ 술, 담배와는 일찍 친해졌나요.

    “담배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피우고 술은 늦게 배웠어요. 29살에. 술은 마약을 끊으면서 대체해야 할 것이 있어야 되니까, 괴로움을 잊게 해줄 것이 필요했으니까 배웠죠. 잠을 자기 위해서 배웠고.”

    ▼ 마약은 어쩌다 하게 된 건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업소에서 6개월 정도 일했는데 그때 접하게 된 거죠. 1991년에 두 번째 감옥을 갔으니까 그때까지 했다고 봐야죠.”

    ▼ 마약은 끊기가 정말 어렵다던데 술로 대체가 되던가요.

    “술로 되는 것은 아니죠. 그 자체도 자신과의 싸움인데 초능력이 필요합니다.”

    ▼ 의지가 굉장히 강하신 것 같아요.

    “음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음악을 할 수 없다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저는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뭐든 끊을 수 있습니다.”

    그의 술버릇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주량은 끝도 없이 마실 수 있을 정도였다. 술은 독하게 끊었지만 담배는 여전히 즐긴다.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다. 입으로는 “끊어야죠” 하면서도 손은 담배를 꺼내든다. 그래도 몸 생각에 가장 순한 담배를 피운다.

    ▼ 음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나요.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고. 그 다음이 음악이고. 그 이후에는 없습니다.”

    ▼ 음악을 시작할 때 멘토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스스로 생각해야 했고 보통 한 달이나 두 달 안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을 1~2년 동안 생각해야만 했던 삶이었습니다.”

    ▼ 처음에 음악적 영감을 준 사람은 누군가요.

    “레드 제플린이에요. 엘비스 프레슬리의 스타성에 심취했었다면 솔리스트가 됐겠지만 중3 때 레드 제플린이란 4인조 그룹에 반했고 그중에서도 작곡을 하는 지미 페이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화려하지 않으면서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거든요.”

    기타를 처음 손에 쥔 것도 중3 때다. 연주교본 하나 달랑 놓고 배웠다고 한다. 숭실중학교 2학년 때 음악선생님을 짝사랑하다가 합창부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그즈음 음악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거기서 화음의 위대함을 봤다”며 “그 연결고리로 악기를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룰 줄 아는 악기는 기타뿐이지만 기타 없이 작곡이 가능하다.

    “멜로디는 그냥 떠올립니다. 사람을 보고 느낌을 가지고 만들기도 해요. ‘위대한 탄생’ 제자들에게 노래를 만들어줄 때처럼 그 사람이 노래 부를 때를 상상하는 거죠.”

    ▼ 작품 대부분이 시적이에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모든 사람이 시인 아닙니까. 시인이 따로 있나요. 은유를 좋아해요. 말도 은유로 하는 쪽을 좋아하고요.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말을 돌려 하다가 생긴 습관입니다.”

    ▼ 아주 적절하게 잘 사용하시는 것 같아요.

    “예. 융통성 그 자체예요.”

    부활의 선장과 9인의 보컬

    특유의 은유적 화법은 오랜 리더 생활에서 밴 듯하다. 1984년 그는 업소생활을 6개월 만에 접고 부활의 전신인 ‘디 엔드’라는 그룹을 결성하는데 이때도 리더 역할을 했다. 당시 멤버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미 유명한 뮤지션이던 이태윤, 황태순, 이기웅이었다. 이태윤은 현재 조용필과 함께해온 밴드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한다. 아시아 최고의 베이시스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디 엔드는 김종서를 보컬로 영입하고 활동 2년 만에 ‘부활’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김종서가 빠져나간 자리에 이승철을 기용해 1986년 첫 음반을 낸다. 그것이 한국의 100대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부활 1집 ‘Rock Will Never Die’다. 이 앨범에는 김태원의 고교시절 처녀작인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그는 “첫사랑을 생각하며 너무 슬퍼서 부른 노래지, 작곡하려고 만든 노래가 아니다. 그냥 하나의 작은 소품, 나 혼자만 아는 노래였다”고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했다.

    ▼ 요즘 젊은이들이 명곡으로 꼽던데요.

    “명곡이 된 거지 명곡은 아니었죠.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대중이 알아야 명곡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노래가 좋아도요. ‘비와 당신의 이야기’ 같은 경우는 명곡이 되는 데 정확히 30년이 걸렸어요.”

    ▼ 작곡을 하면서 리더가 됐다고 들었어요.

    “창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세력이 세지죠. 그건 있죠. 하지만 제 스스로 리더라고 한 적은 없어요. 주위에서 그렇게 만든 거지요.”

    ▼ 리더라 신경 쓸 게 많았겠네요. 연습실 구하는 일이나 끼니 해결하는 문제 같은 거요.

    “뮤지션은 배고파야 한다는 쓸데없는 잡념에 휩싸여서 배가 고픈데도 그 자체를 자랑스러워했죠. 나 혼자 배고픈 것은 괜찮은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배고픈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거죠. 그런 이기적이면서 히스테릭한 리더였어요. 주변에서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26년 동안 부활이 맞이한 보컬은 9명이다. 김종서, 이승철(1,2집), 김재기(3집), 김재희(3,4집), 박완규(5집), 김기연(6집), 이성욱(7집), 이승철(새벽-프로젝트 앨범), 정단(9집), 정동하(10집)까지. 그중 김태원이 유독 극찬하는 이가 3집 보컬 김재기다. 김재기는 1993년 3집 타이틀곡 ‘사랑할수록’을 녹음하고 얼마 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김태원은 김재기를 ‘아름다움의 극’이라고 표현했다.

    “목사인 친구에게서 소개받았는데 첫눈에 반했어요. 제가 상상하던 목소리였어요. 작곡가는 노래를 생각으로 하잖아요. 생각하면서 하는 노래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상상하던 그 아름다운 소리를 그대로 재현한 사람이 김재기예요.”

    ▼ 1993년 김재기씨 사망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겠어요.

    “이루 말할 수 없죠. 그 일을 계기로 삶에 관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요. 깊기만 했던 사람인데 넓이를 채우기 시작했죠.”

    ▼ 9명의 보컬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보시나요.

    “각기 색깔이 다르죠. 옐로, 블루, 레드, 블랙, 그레이…. 그 친구(김재기)에게는 옐로 중에서도 ‘딥 옐로(Deep Yellow)’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요. 목소리가 몽환적이고 꿈같거든요.”

    ▼ 한 보컬과 오래갈 수 없었던 이유가 뭔가요.

    “제가 얼마 전에 콘서트에서 고백을 했어요. 부활이라는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다보면 솔직히 식량이 떨어질 때도 있고 풍랑을 만나서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한 사람씩 바다로 던진 기억이 납니다. 그 사람들이 9명의 보컬입니다.”

    ▼ 계속 함께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세요.

    “그런 후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고 거기에 대한 사과 내지는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모여서 음악을 하곤 하죠. 지금 ‘누구나 사랑한다’라는 곡을 발표했잖아요. 그게 역대 보컬 4명이 모여 부른 노래예요.”

    “이승철과 나는 견우와 직녀 칠월칠석에만 보죠”

    김태원은 음악과 삶을 대할 때 ‘순수’를 중요시한다.



    이승철의 ‘쿠데타’

    ▼ 노래를 더 잘 부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그건 욕심이죠.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요. 혼자 다하려고 할 때 부작용이 시작되는 거예요. 처음 디 엔드라는 그룹을 결성할 때도 제 정체성은 분명했어요. 나는 기타리스트고 작곡가다.”

    ▼ 이승철씨가 부활에서 나간 걸 지금도 배신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걸 배신이라고 얘기하긴 뭐하고. 젊은 혈기에 다른 길을 선택한 거죠. 물론 당시에는 용서가 안 됐죠. 그래서 힘들었죠.”

    ▼ 둘이 헤어지기 전에 다투시거나 그런 적이 있나요.

    “걔가 나하고 다툴 레벨이 못돼요. 지금 만나도 존대를 쓰는데요. 한 살 차이인데도. 그런 레벨은 못되고 리더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죠. 제게 단점이 많았으니까요. 거기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고 성공한 것 아닙니까.”

    ▼ 이승철씨 혼자 솔로로 나간 게 아닌가요.

    “처음에는 나만 빠지는 형태로 흘렀었어요. 솔직히 나만 뺀 거죠. 엄청난 아이러니죠. 제가 만든 팀인데 제 스스로 나왔습니다. 부활에서요.”

    ▼ 그 뒤에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방황했죠. 1년 동안.”

    ▼ 그럼 남은 사람끼리 이승철과 부활로 활동한 건가요.

    “잠시 그러다가 나머지 멤버들(정준교, 서영진, 김성태)도 사라졌죠.”

    김태원은 1988년 그들과 ‘불편하게’ 헤어졌지만 1993년 ‘사랑할수록’이 뜨고 1994년 주체할 수 없이 돈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2집 멤버인 정준교와 김성태를 ‘기꺼이’ 영입한다. 다시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3집을 내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에도 부활은 수차 멤버가 바뀌면서 현재 라인업인 김태원(리더 겸 기타), 채제민(드럼), 서재혁(베이스), 정동하(보컬) 체제로 자리 잡았다. 정동하는 2005년 가장 늦게 합류했다. “김태원에게 부활이란?”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김태원은 부활이다.”

    2002년 부활은 이승철과 재결합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이승철은 김태원이 작곡한 ‘네버엔딩스토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들은 또다시 1년 만에 결별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이미 1986년의 이승철과 김태원은 아니었죠. 서로 너무 달라져 있는 모습이고.”

    ▼ 그럼 왜 재결합한 거죠.

    “궁지에 몰렸으니까. 둘 다, 서로, 대중적으로.”

    ▼ 1년간만 같이 하기로 사전에 계획했던 건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단 한 번도 미래를 계획한 적은 없습니다. 다가오는 대로 맞이합니다.”

    ▼ 관계가 애매하네요.

    “견우와 직녀라고 보시면 됩니다. 칠월칠석에만 보죠. 하하하.”

    ▼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과거에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똑같았어요. 혼자 괴로웠죠. 고독은 혼자 이루어지는 겁니다.”

    ▼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생각하세요.

    “리더라는 권위의식을 버려야죠. 팀원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원활히 소통하려면.”

    부활은 그동안 12장의 앨범을 냈다. 그중에는 30만장이 팔린 1집과 100만장이 팔린 3집 등 많은 사랑을 받은 앨범도 있다. 하지만 늘 성적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새 앨범을 내려면 큰돈이 필요했다. 그럴 때 그는 “음반기획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고 고백한다.

    “온통 가시밭길이었어요. 1집 음반이 많이 팔렸어도 당시는 저작권이 인정되는 시대가 아니어서 수입이 저조했어요. 더욱 비참한 건 당시 부활은 좀 알려졌는데 저라는 존재를 몰랐어요. 그마나 저작권료로 먹고살고 있죠. 저작권료 순위는 우리나라에서 랭킹 100위 안에 들지 않을까요. 한국저작권협회에 350곡쯤 등록돼 있으니까요.”

    ▼ 멤버들과는 수익을 어떻게 배분하나요.

    “n분의 1입니다. 함께하는 모든 활동에 대해서요.”

    ▼ 방송을 많이 하시는데 음악에 투자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일상이 저를 어떤 장소에 가둬놓아도, 묶어놓아도 저는 음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음악에 미친 사람입니다. 음악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마약은 없습니다. 그 중독성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음악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한 가장이 아닐까 싶네요.

    “많이 등한시했죠. 음악에 미쳐서.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늘 갚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요. 죽을 때까지 갚아야죠. 지금은 (제 마음) 전체가 가족이에요.”

    “첫눈에 알아챈 평생의 동반자”

    김태원은 벌써 6년째 기러기 아빠로 살고 있다. 그의 아내 이현주씨와 두 아이가 필리핀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씨와 고3 때 소개팅으로 만나 1993년 결혼했다. 그의 두 번째 사랑인 셈이다. 첫사랑과 죽음을 각오할 만큼 치명적인 사랑을 하고 나서 1년 반 만에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저 스스로 그녀를 잊기 위해서 다른 사랑을 찾아갔죠. 만약 비슷한 성격의 여자를 찾았다면 그건 비겁한 짓이지만 저는 정확히 첫사랑과 반대되는 여자를 찾았습니다. 첫사랑은 성숙했고, 아내는 작고 귀엽죠. 결혼 전 제 감옥살이와 정신병원, 모든 고통을 함께 겪었죠. 그래서 평생 갚아야 합니다.”

    ▼ 첫사랑이 음악적 영감을 샘솟게 하는 사람이라면 아내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으세요.

    “다시 한 번 제 인생에 자살 위기가 온다면, 제가 제 와이프에게 실망스러운 스캔들이나 그런 유의 일을 범했을 때일 겁니다. 그게 제 두 번째 자살 포인트입니다.”

    ▼ 지금까지 아내에게 배신감이 들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으신가요.

    “절대적이죠. 그렇지 않다면 제가 한 창작은 다 구라(거짓)입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아내가 평생의 동반자임을 직감했단다. 아내는 그 마음을 읽었을까.

    “그걸 첫날 알아듣게 한다는 것은 내가 ‘돌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돼요. 시간을 이용해 보여줬죠. 모든 것은 시간을 이용해야 됩니다.”

    이승철이 부른 ‘마지막 콘서트’의 원곡이자 1987년 부활 2집에 실린 ‘회상3’는 그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그는 “이승철씨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고, 이승철씨와 제가 갈등이 있었던 상황을 와이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상황을 얘기한 노래였다”고 털어놓았다. ‘무대 뒤 그의 소녀’를 그린 이 노래는 결국 이승철의 솔로 정착에 큰 공을 세웠다.

    ▼ 속이 좀 쓰렸겠어요.

    “너무 고마웠는데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노래였는데 알려졌잖아요. 자존심은 상하지만 고마웠어요.”

    ▼ ‘네버엔딩스토리’도 이승철씨가 히트시킨 걸 보면 두 분이 잘 맞는 조합 아닌가요.

    “너무 잘 맞죠. 너무 잘 맞는 것도, 너무 맛있는 것도, 너무 자주 접하면 맛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헤어질 운명인가 보죠.”

    ▼ 전생에 정말 견우와 직녀였나 봐요.

    “그럴 수도 있죠. 늘 서로 그리워하니까.”

    ▼ 전화통화도 하고 그러세요.

    “아뇨.”

    평소 그가 가장 자주 전화하는 상대는 필리핀에 있는 아내다. 하루에 다섯 번 넘게 전화한다니, 결혼 19년차 부부가 아니라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 같다.

    “필리핀에는 아이들 교육도 그렇고, 우리 둘째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제로 갔죠. 늘 아버지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저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제가 유일하게 카피한 사람이에요. 늘 애틋하고 가족이 전부인 분이세요. 그분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엄마는 가사 일을 평생 하신 분이고, 아버지는 발명도 하시고 사업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아버지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많이 엇나갔겠죠. 다른 아버지 같으면 애를 잡았을 테니까.”

    ▼ 아버지가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나요.

    “말이 없는 그 자체가 전 더 무서웠어요. 나를 많이 아끼시는구나 하는 건 느낌으로 알죠. 느낌 중요하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느낌은 신의 언어입니다.”

    ‘붕어빵’ 딸과 ‘순수의 극’ 아들

    고교시절 그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자 그의 아버지는 조건을 내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가 간절히 원하던 깁슨 기타를 사주겠다고. 그리고 그 약속은 정확히 지켜졌다. 김태원 역시 중학생인 큰딸 서현 양에게 깁슨 급의 1000달러짜리 팬더 기타를 사줬다. 자신처럼 기타를 좋아하고 작곡에 능한 딸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딸아이는 성격도 저를 빼닮았어요. 상처를 많이 받고, 쉽게 받고, 여리고, 고집이 세며, 몰두하는 근성이 강한 아이죠.”

    ▼ 둘째아이는 어떤가요(김태원은 아들 우현군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한 방송에서 밝힌 적이 있다).

    “아름답죠. 생각이 어린아이에 머물러있는 거거든요. 지금 열두 살인데 정신연령은 두 살. 몸은 큰데 아기죠. 그 자체를 제 와이프와 저는 좋아해요. 둘째가 더 이상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완전 아기니까 너무 천진난만하고 죽을 때까지 보살펴야 하죠. 다행히 우리에게 와서 그나마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고 있어요. 어려운 처지에서 둘째처럼 아픈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많을 것 아니에요. 그런 아이들을 위한 장애인 학교를 설립하고 싶어요. 지금 최종 목표는 그거예요.”

    ▼ 둘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요.

    “한번도 없어요. 그냥 내가 졸졸 쫓아 다니죠. 그래도 인식은 해요. 내가 아빠라는 걸.”

    그가 갑자기 매니저를 부르더니 “블랙커피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목이 탔던 모양이다. 로커는 샤프해야 한다는 철칙을 지키려고 그는 줄곧 다이어트를 해왔다. 블랙커피도 그 때문에 마시는 듯하다. 그런데 쓰디쓴 블랙커피를 참 달게 마신다.

    ▼ 부모님이 음악을 그만두라고 한 적은 없었나요.

    “제가 뭘 한다는 자체를 너무 고맙게 생각하셨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비정상이었기 때문에 거의 자폐아로 볼 정도였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별이 ☆모양(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이며)이라고 우기면서 반 아이들을 때렸어요. 아이들은 별이 원(○)모양이라고 주장했거든요. 그러다 선생님에게 딱 걸렸는데 선생님이 다음부터 저를 때리지 않았어요. 얘는 약간 모자라구나. 그렇게 보신 거죠.”

    ▼ 이후에는 괜찮았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인간이 죽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삶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죠. 신이 인간은 죽지 않게 만들어놓은 줄 알았거든요. 그때가 제 인생의 첫 번째 기로였죠.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죠.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으니까요. 중학교 1학년 때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여자한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2년 동안 부모님 이불 깔고 개는 데 몰두하죠. 두꺼운 겨울이불을 각도가 0.1도도 틀리지 않게 깔고, 새벽에 일어나서 아버지 출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불을 개고. 잠자리에 드실 때 그 완벽한 세팅에 잠깐의 희열을 느끼시라고 이불을 갠 겁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늦게 안 거죠. 부모님이 언젠가는 돌아가신다는 슬픔이 사춘기에 다가온 거죠. 1987년도 부활 2집에 스물세 살짜리가 적을 수 없는 글들이 나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 모차르트 레퀴엠의 미완성작. 진혼곡이죠. 그것을 편곡해 15분짜리 대곡으로 만들어요. 스물세 살에 할 일이 아니에요. 그게 저의 일기였던 겁니다. 모든 걸 늦게 알았습니다. 그게 창작을 하는 데는 큰 장점이죠. 남들은 너무 흔하게 생각하는 걸 독특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 작사와 작곡을 하실 때 정해놓은 특별한 룰이 있나요.

    “순수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게 저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순수를 지키며 살자.”

    ▼ 음악가가 안 되었다면 뭘 하고 계셨을까요.

    “화가가 됐을 겁니다. 원래 그림을 그렸어요. 대학도 미대를 가려고 했죠.”

    ▼ 화가의 꿈이 지금도 유효한가요.

    “다른 걸 할 겨를이 없죠. 죽는 날까지 음악을 할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장렬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에 타임머신을 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자 잠시 침묵이 흐른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가 천천히 그 지점을 찾아낸다.

    “1972년. 우리 엄마 아버지가 젊었고, 아버지 품에 안겨 제가 자고 있었고, 동네에서 아스팔트가 아닌, 흙을 밟으며, 구슬치기 하는 일곱 살 김태원…. 그 순간을 생각하면 잠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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