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1-08-19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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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1995년 한 국가 원수가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숙소는 미국 정부의 국빈 전용숙소인 백악관 바로 앞 블레어 하우스였다. 그런데 방문 기간 중인 어느 날 밤 숙소 앞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경비하던 한 비밀경호원 눈에 속옷 차림으로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언뜻 보기에도 취기가 완연한 그는 바로 방문 국가 원수였다. 그는 취한 목소리로 “피자를 사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 밤 또 다른 경호원은 숙소 지하실 근처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자칫 불법 침입자로 오인할 뻔했다.

    타국을 공식 방문 중인 국가 원수의 행동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이 기행(奇行)의 주인공은 한때 세계 정치권의 눈부신 각광을 받았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벌어진 이 황당한 사건은 사실 관계를 부인하는 옐친 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술에 얽힌 그의 행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무대 올라 지휘봉 빼앗은 옐친

    그런데 옐친의 음주에 따른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전해인 1994년 8월 통일 독일을 공식 방문했을 때는 술에 취해 예정에도 없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급기야 베를린시 야외 광장에서 열린 환영 음악회에서 갑자기 단상에 올라 연주 중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았다. 연주 음악에 관계없이 술과 흥에 취해 신나게 지휘를 하는 돌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장면은 당시 독일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됐고, 이후 전세계 안방에 전달되면서 주정뱅이 옐친의 인간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후 미국 방문 중 귀국 길에 중간 기착한 아일랜드 샤논공항에서 그의 음주벽이 또다시 세계 매스컴의 주의를 끌게 된다. 샤논공항에서는 당시 아일랜드 총리였던 알버트 레이놀즈와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이를 위해 공항에는 아일랜드 총리 부부뿐 아니라 수십 명의 양국 고위 관리와 군의장대까지 도열해 옐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비해기가 도착했다. 그러나 옐친은 끝내 비행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피곤이 겹쳐서 생긴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아일랜드 총리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결국 솔레그 소스코베츠 당시 러시아 제1 부총리와 30분간 회담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토록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로서는 전무후무할 정도의 음주 관련 기행으로 구설에 오른 옐친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1931~2007)은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라는 마을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반 소비에트(anti-Soviet) 소요에 연루된 죄목으로 3년간 중노동형에 처해졌으며, 석방 후에는 한동안 직업 없이 지내다 간신히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베레즈니키의 푸시킨 고등학교를 나온 옐친은 1955년 공업도시 스베르들로프스크에 있는 우랄 기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했다. 그 후 오랫동안 건축 일에 종사했다. 정치적으로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1976년 스베르들로프스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 서기를 거쳐 198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됐으며, 이때부터 구소련 중앙 집권층과 연결됐다. 1985년 옐친은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1931~ )의 발탁으로 공산당 정치국(Politburo) 위원과 모스크바 시장(당 제1서기)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개혁 성향과 포퓰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단번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인기를 끈다.

    그러나 1987년 당의 개혁의지 부족을 비판하면서 고르바초프 측과 맞서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다. 해고 후 옐친은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심지어 자살 기도까지 한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옐친은 더욱 급진적 개혁논리를 주장하면서 수구적 자세의 고르바초프를 맹렬히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다. 옐친 반대파들은 그에 대한 역공으로 그의 약점인 술주정에 관한 사례들을 공개하며 공격했지만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소련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옐친은 의회 내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의 폐기를 주장하는 야당 세력을 이끌었고, 1991년 6월12일 러시아공화국 민주 선거에서 5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고르바초프가 민 니콜라이(Nikolai Ryzhkov·1929~)는 16% 득표에 그쳤다. 이로써 옐친은 압도적 표차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정치지도자로서 수많은 음주 기행을 보였다.

    1991년 8월18일 보수강경파에 의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고르바초프는 크리미아에 억류되고, 구소련 정국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옐친은 반쿠데타 세력의 선봉에 서서 그 유명한 탱크 위 연설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고르바초프 권력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옐친은 그해 12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만나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했다. 옐친의 이 모든 행보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으로서 쿠데타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던 고르바초프에게는 합법적으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로 여겨졌다.

    러시아 의회 건물 포격

    결국 그해 12월24일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가 종전의 소비에트 연방이 가지고 있던 유엔 의석을 차지하자 고르바초프는 그 다음 날 사임한다.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불과 며칠 뒤 옐친은 과감한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주로 서방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점진적인 개혁보다는 빠른 변화를 추구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경제 정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는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실업 증가, 그리고 GDP의 급격한 하락 등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다. 경제 정책 실패에 따라 그의 대중적 인기도 하락하자 그의 측근 중 일부는 옐친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동시에 옐친을 정치적으로 가장 괴롭힌 것은 의회와의 갈등이었다. 끊임없이 정부와 정책 헤게모니를 다투던 러시아 의회는 1993년 옐친에 대한 탄핵 투표까지 시도해 600표 이상의 표를 모았으나, 탄핵에 필요한 3분의 2 득표에 72표가 모자라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양측의 갈등은 점점 고조돼 러시아 내에 마치 두개의 정부가 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지속됐고 마침내 옐친은 의회 해산을, 의회 측은 옐친의 대통령 직을 거부하는 최악의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1993년 10월 초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한다. 옐친이 자기를 지지하는 군부대의 탱크를 동원해 러시아 의회 빌딩을 포격하게 한 것이다. 이 공격으로 무려 500명이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무력으로 의회 측을 제압한 옐친은 이후 불안하나마 러시아 정국을 주도한다.

    이처럼 옐친은 러시아 개혁의 상징으로 세계 정치사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그의 첫 번째 임기는 경제정책 실패와 정치 갈등으로 불안하게 진행됐다. 게다가 정상적인 임무 수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는 건강상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더욱 수세에 몰렸다. 실제 그는 심장병으로 임기 중 수차 치료를 받았다. 음주와 관련된 그의 기행도 다시 구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당시 러시아 내에서의 그의 지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음에도, 그는 1996년 대통령 재임을 위한 선거전에 임하겠다고 전격 발표한다.

    옐친의 재선 상대는 공산당의 주가노프(Gennady Zyuganov·1944~)였다. 그는 서민층의 단단한 지지를 바탕으로 옛 소련의 영광을 다시 살리자는 선거 전략으로 러시아 국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었다. 선거 초기 여론은 누가 보아도 옐친의 일방적인 열세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 참모들을 대거 교체하고, 러시아 재력가들을 포섭해 막대한 재정 지원을 이끌어냈다. 동시에 매스컴을 장악해 선거 판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 성공한다. 또 선거 기간 중에는 그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일축시킬 정도로 정열적인 유세 활동을 벌였다. 1996년 6월 선거에서 옐친은 35%의 득표로 1위를 했지만, 당선에 필요한 과반수를 획득하지는 못해 2위 주가노프와 결선 투표를 하게 된다. 옐친은 3위 득표자로 당시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레베드(Alexander Lebed)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7월 결선투표에서 53.8%의 득표율로 40.3%의 주가노프를 이기고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옐친의 두 번째 임기도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우선 그해 말 옐친은 심장수술(사중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고 수개월간 입원한다. 그리고 선거 중에 그를 도왔던 재력가들과의 정경유착설이 계속 제기됐고, 무엇보다 국가 경제가 위기를 거듭하는 등 악화 일로를 걸었다.

    음주와 건강 문제 구설수

    이런 가운데 마침내 1999년 12월31일 자정, 옐친의 전격적인 하야 성명이 발표됐다. 그는 자신의 실정(失政)으로 국민을 실망시킨 데에 대해 사과하고 새로운 21세기에는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해 러시아 발전을 이룰 것을 기원했다. 그리고 당시 총리로 재임하던 푸틴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2000년 3월26일 대통령선거가 시행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현대 러시아 정치사에 파란만장한 흔적을 남겼던 옐친의 공식적인 역정이 끝을 맺는다.

    옐친은 퇴임 후 비교적 한가로운 생을 보내다 2007년 4월23일 심부전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은 그의 생전 공과(功過)에 관계없이 국장(國葬)으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옐친이 세계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 그를 줄곧 힘들게 한 것은 음주와 건강상의 문제에 따른 구설수였다. 옐친이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사후 네덜란드 의료진에 의해 모종의 신경질환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음주에 관련된 기행이 상당 부분 건강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술이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옐친은 술을 즐겨 마셨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단순히 술을 즐긴 정도가 아니라 알코올 중독으로 불릴 정도로 탐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러시아의 국민주 보드카와 그에 따른 술 문화가 깔려 있다.

    물론 옐친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공식석상에서 보드카만을 마실 것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장 과정과 오랜 음주 습성에는 보드카로 상징되는 러시아의 정서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옐친처럼 공공연히 음주 문제가 거론되는 지도자를 국민이 용인해준 것도 술에 관련된 러시아 특유의 풍토와 문화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보드카는 과연 어떤 술일까?

    이른바 무색, 무미, 무취 세 가지 특징으로 널리 알려진 보드카는 대표적 증류주 중 하나로, 그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러시아를 떠올리는 술이다. 러시아 특유의 혹독한 겨울과 광활한 대지에 펼쳐지는 설원은 강한 알코올 기운을 풍기는 투명한 보드카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보드카만큼 단순한 술도 드물다. 호밀, 보리, 밀, 옥수수 등 곡물이나 감자, 당밀(糖蜜) 등 다양한 원료를 발효시켜 에탄올을 얻은 뒤 이를 증류하기만 하면 보드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증류 자체도 풍부한 복합미를 얻을 수 있는 단식 증류법을 적용하지 않고 상업적인 대량 생산이 가능한 연속 증류법을 적용한다. 게다가 술의 특징상 고급 증류주를 만드는 데 핵심이 되는 나무통 숙성 과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색, 무미, 무취의 단순한 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재료를 쓰느냐와 증류 후 술의 여과 방법에 따라 보드카 품질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드카의 궁극적인 맛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보드카는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든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면 어렵지 않게 생산할 수 있는 술이다.

    무색, 무미, 무취의 단순한 술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소주도 희석식이라는 표현 그대로 물을 타서 알코올 도수가 낮다는 것뿐이지 보드카와 같은 종류의 술로 생각할 수 있다. 보드카도 결국 물과 에탄올(주정) 그리고 약간의 불순물과 조미료가 그 성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보드카의 알코올 도수는 전통적으로는 38%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해 국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부분의 보드카는 40%(80 proof)로 출시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는 술에 보드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알코올 도수가 적어도 37.5%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이 기준을 40%로 정하고 있다.

    보드카는 생산 회사가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많은 국가에서 이를 음용하고 있지만 최대 소비국은 역시 동유럽과 발트 3국 등 이른바 보드카 벨트(Vodka Belt)에 위치하고 있다.

    보드카는 오래전부터 칵테일의 바탕 술로 널리 사랑받았다. 좋은 칵테일이 되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는 술의 맛이 너무 강하거나 도드라져서는 안 된다. 다른 첨가 성분들의 맛을 제대로 살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논리로 일찍이 보드카에서 발달한 것이 가향 보드카라는 것이다.

    가향 보드카(flavored Vodka)는 보드카에 각종 향을 내는 재료를 혼합해 만든 제품, 즉 바닐라 보드카, 오렌지 보드카 같은 것을 말한다. 보드카는 비록 스스로는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 점이 오히려 어떤 재료와도 원만히 혼합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고 있다. 가향 보드카 역사는 매우 오래돼 거의 보드카가 탄생할 무렵부터 시도되었다고 보고 있다. 가향 보드카 재료로는 각종 과일에서부터 약초, 심지어 고추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이용되고 있다. 그냥 향을 보드카에 섞어주는 단순한 방법에서부터 담금술처럼 재료를 보드카 안에 넣고 그 성분을 오랫동안 추출해내는 방법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보드카가 오늘날 러시아의 대표적인 국민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드카는 무엇보다도 웬만한 재료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는 편의성이 크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진 나라와 달리 자연 조건이 열악한 러시아로서는 큰 매력이었다. 또 보드카는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오랜 사회 환경을 고려하면 대중 술로 자리 잡기에 알맞았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보드카를 증류한 후 그 증류액을 여과시킬 때 사용되는 숯의 주원료가 되는 자작나무가 러시아 타이가(한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침엽수림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이라는 점이다. 이는 위스키나 코냑의 숙성에 쓰이는 오크(oak) 나무가 없는 러시아로서는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15세기 러시아에 전해진 보드카

    보드카가 러시아에 소개된 것은 15세기로 알려져 있다. 이전 러시아에서 주로 마시던 술은 보드카와 같은 증류주가 아닌 미드(mead)라는 발효주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증류주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증류 기술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드는 바로 ‘신동아’ 8월호 ‘고대 스칸디나비아 영웅들의 술’에 소개된 것과 같이 벌꿀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기록에 의하면 986년 당시 러시아 대공(Grand Prince) 블라디미르(Vladimir)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한 것도 이슬람교의 금주(禁酒) 교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드를 마시는 즐거움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그 대신 술에 관해서 보다 융통성이 있는 교리를 가진 비잔틴 기독교(오늘날의 정교)를 받아들였다.

    특수경찰 선술집 ‘카박’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술을 마시지 않았던 레닌은 보드카를 사적으로 만들면 중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15세기 초(14세기 말인 1398년이라는 설도 있다) 러시아를 방문한 제노바의 상인들에 의해 처음 증류 기술이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보드카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만들어진 보드카는 품질이 좋지 않았다. 초창기 증류 기술이 조잡했기 때문에 술에 불순물이 많이 포함돼 그 맛과 향이 나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앞서 설명한 가향 보드카였다. 물론 오늘날의 가향 보드카와는 만드는 목적 자체가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가향 보드카가 보드카의 초창기에 보다 가까운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훗날 점차 증류기술이 발전하고, 이윽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증류 후 자작나무 숯으로 여과를 하면서 보드카의 품질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또 불순물을 대폭 줄여 더 이상 나쁜 품질을 숨길 목적의 가향 보드카는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어쨌든 보드카는 러시아에 처음 소개된 이후 빠른 속도로 러시아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공포 정치를 시행해 ‘잔혹한 이반(Ivan the Terrible)’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고, 차르(Tsa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이반 4세(Ivan IV·재위기간 1530~1584) 시대에는, 비록 자신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잔혹한 명령을 수행하는 특수경찰들을 위한 선술집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카박(Kabak)이라고 불렸던 이 술집에서는 음식은 일절 없이 보드카와 다른 술만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후 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17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의 웬만한 마을에는 보드카를 파는 카박이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음주로 인한 피해가 늘었고 사회문제가 됐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로마노프 왕조의 첫 차르 미하일(Mikhail·재위기간 1613~1645)은 해결책으로 부분적인 금주정책을 시행했으나, 그의 아들인 차르 알렉시스(Alexis·재위기간 1645~1676) 시대에 와서 정책이 변경되면서 카박은 다시 전 러시아에 걸쳐 번성했다. 알렉시스는 나아가 알코올 생산과 판매에 관해 국가 전매권을 제도화하고 민간 제조를 일절 금지했다. 이로써 보드카 판매로 얻어진 모든 수익은 황제의 금고로 귀속됐다. 보드카에 대한 국가 전매권은 그 후 200년 가까이 유지된다.

    그러다가 1861년 또 한 번의 정책 변화가 일어나면서 보드카 생산과 판매에 대한 전매권이 없어지고 대신 세금으로 대체됐다. 이 제도는 1894년 국가 전매권이 부활되기까지 불과 33년간 지속됐지만 재빠른 민간 사업자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유명한 스미노프(Pierre Smirnoff·1831~1898)가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레닌, 술은 공산주의에 병적인 존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군대 전투력 유지를 위해 금주 정책을 펼쳤다. 여기에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새로운 집권층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고양할 목적으로 금주 정책을 추진했다.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던 레닌은 술이야말로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병적인 존재라고 표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오로지 공산주의 이론을 가지고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침내 1919년 12월에는 보드카를 사적으로 만들면 중벌에 처하는 새로운 법령이 발효됐다. 그러나 이 조처는 마치 미국 금주법 시대의 폐단과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밀주의 생산·유통을 성행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192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 농가 중 무려 3분의 1 정도가 밀주 보드카인 사모곤(samogon) 생산에 관련돼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렇게 되자 정부도 결국 1925년에 판매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드카의 민간 제조를 허용한다. 다만 판매용 보드카의 생산과 판매에 대한 국가 전매권은 계속 유지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20년대 후반 러시아 도시 가구의 평균 소득 중 14%가 술을 구입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술로 벌어들일 수 있는 막대한 재원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보드카 생산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스탈린(Joseph Stalin·1879~1953)은 1930년에 보드카 증산을 명령했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그때까지 물을 섞어 20%로 희석시켜왔던 보드카의 알코올 농도를 오늘날처럼 40%로 출시하는 것을 허용했다. 생각해보면 이전의 러시아 보드카는 현재 우리나라의 소주와 유사한 형태의 술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국가 정책의 영향으로 1940년에 이르러서는 러시아 전역에서 고기, 채소를 파는 가게를 모두 합친 것보다 술을 파는 상점이 더 많은 기현상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러시아군에게 보드카가 보급품의 하나로 지급될 정도였다.

    반(反)알코올 정책으로 미움 받은 고르비

    전쟁 후에도 이런 알코올 소비 증가 현상은 갈수록 심화됐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보드카 주세(酒稅)로 들어오는 국가 재원이 1940년대 그것보다 2배 증가했다. 당연히 맥주 및 와인 관련 주세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그만큼 알코올 과다 소비로 인한 건강상의 피해도 늘어났다. 일례로 1980년대의 한 조사는 당시 소련 인구의 15%가 알코올 중독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단지 개인의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술로 인한 이혼율의 증가, 직장에서의 근무 효율 저하, 그리고 술과 연관된 살인 및 성범죄 등 각종 범죄의 만연을 초래했다.

    러시아에서의 이런 알코올 과소비 문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국가 재정의 큰 부분을 술 소비로부터 얻으려고 했던 러시아 정부 정책이 수백 년 동안 고착화된 러시아 술 문화를 낳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국가의 정책에 충실히 따라주었던(?) 국민도 큰 몫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85년 체르넨코 사망 이후 당서기장에 선출돼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한 고르바초프가 대대적인 반(反)알코올 캠페인을 벌인 것도 결국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는 의욕적으로 보드카를 포함한 모든 주류의 생산을 줄이고 판매 유통 과정을 제한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이 정책은 뚜렷한 명분과 건강 지표의 현저한 향상이라는 가시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불법 밀주가 다시 범람하기 시작하면서 불량 술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고, 공급이 한정된 술을 사기 위해 종일 상점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전체 업무 효율은 현격히 떨어졌다. 그 외에 국가 전체로도 경제 구조의 왜곡 현상이 심화되어갔다. 이 때문에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당시 러시아 국민은 소비에트 연방을 붕괴시킨 주범으로서 고르바초프를 미워했다기보다 반알코올 캠페인 때문에 더 경멸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결국 1987년에 이르러 사회적 갈등과 국가 재원 감소에 직면한 러시아 정부는 알코올 판매 유통에 관한 제재를 대폭 완화했고, 1990년에는 알코올 소비가 캠페인 이전수준으로 원상회복됐다.

    1990년대 초 마침내 구소련이 와해되고 이 과정에서 옐친의 러시아 정부가 채택한 급진적인 경제개혁 정책(shock therapy)이 실패로 끝나자 러시아 국민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됐다. 정부는 이런 국민의 좌절과 분노를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보드카를 이용했다. 즉 보드카를 값싸게 공급함으로써 국민들을 잠시라도 시름에서 벗어나게 해 정부를 향한 불만의 화살을 돌리려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수년 사이에 러시아 물가 대부분이 2000배 이상 올랐지만 술은 653배 정도로 미약한(?) 상승을 기록했다.

    또 이런 알코올 공급 완화 정책 일환으로 옐친 정부가 채택한 것이 1992년 시행된 국가 전매권 철폐였다. 그러나 이 정책 역시 너무 전격적인 것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돼온 전매 제도가 없어지고 알코올 생산, 공급에 자유가 허용되자 러시아 전역에 점차적으로 1000개가 넘는 보드카 생산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러시아 보드카는 자유시장에서 경쟁의 부침을 계속해오고 있다.

    따지고 보면 보드카가 러시아에 소개된 600년 동안 보드카는 러시아 문화와 숙명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 국민이 이 술을 국민주로 받아들이고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 술의 운명이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국민 정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주인공 옐친의 음주 기행(奇行)도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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