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쥬얼리 리더에서 배우로 거듭난 박정아의 솔직 토크

“힘겨웠던 20대를 견디고 나니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됐어요”

  • 김지영 기자│kjy@donga.com

    입력2011-08-22 1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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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쥬얼리 리더에서 배우로 거듭난 박정아의 솔직 토크
    참으로 교활했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고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행각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5월 중순 종영한 일일드라마 ‘웃어라 동해야’에서 부와 성공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버린 아나운서 윤새와 얘기다. 8개월 가까이 윤새와를 열연한 박정아(30)는 방영 내내 시청자의 미움과 호평을 받았다. 위궤양에 걸릴 정도로 연기 투혼을 발휘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녀를 향한 격려 메시지가 이어지기도 했다. “웃어라, 정아야!”

    ‘웃어라 동해야’는 결국 올 상반기 최고 시청률 기록과 함께 ‘배우 박정아의 재발견’이라는 값진 수확을 올렸다. 7월17일 방송된 KBS 드라마스페셜 ‘올레길 그 여자’는 전작의 호연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 작품에서 박정아는 금지된 사랑을 나누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후 올레길 여행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피아니스트 김영주로 등장한다. 악녀 이미지를 벗고 김영주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 박정아에게는 다시금 찬사가 쏟아졌다.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가수 출신 연기자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이 강했어요. 근데 윤새와를 연기하면서 절 보는 시선이 좋은 쪽으로 돌아선 것 같아 감사해요. 악역을 맡아 미운털이 박힐 줄 알았는데 열심히 연기한 점을 좋게 봐주시더라고요. 맹맹한 물 같던 저한테도 못된 구석이 있다는 걸 아셨을 테고.”

    8월2일 오후 동아일보사 충정로사옥을 찾은 박정아의 표정은 모처럼 갠 날씨처럼 맑았다. 두 작품에 연달아 출연하느라 10개월 가까이 쉴 틈이 없었는데도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지 않으냐고 묻자 그녀는 눈망울을 굴리며 손사래를 쳤다. 외로워도 슬퍼도 씩씩해 보이려고 애쓰는 캔디처럼.

    데뷔 후 첫 번째 고난



    ▼ 어쩌다 윤새와 같은 악역을 하게 됐나요.

    “역할도 역할이지만 작품이 욕심났어요. 일일드라마를 너무 하고 싶어서 들이댔죠. 연기력을 단련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남들이 선뜻 선택하지 않는 일일드라마를 통해 좀 더 단단해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었죠.”

    ▼ 정말 단단해지던가요.

    “어느 정도는요. 작가님이 못되지 않으면 안 되게 대사를 써주셨는데 초반에는 캐릭터 전개가 어려웠어요. 윤새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얘 왜 이러니. 미쳤어’ 이러면서 대본을 읽었어요. 근데 나중에는 연기를 즐겼어요. 내가 언제 또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고, 막말하고, 거짓말을 해보겠나 하고 생각하니 재미있어지더라고요.”

    박정아는 지금까지 영화 3편과 드라마 4편을 찍었다. 연기 데뷔작은 2003년 조인성과 신민아가 주연한 영화 ‘마들렌’이었다. 이 영화의 박광춘 감독은 박정아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캐주얼 차림으로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에 끌려 조인성의 첫사랑인 밴드 보컬리스트로 그녀를 캐스팅했다. 당시는 그녀가 출중한 외모와 재치 있는 입담을 지닌 걸그룹 쥬얼리의 리더로 한창 인기를 끌 때였다.

    ▼ 막상 연기해보니 어떻던가요.

    “얼떨떨했죠. 쥬얼리로 데뷔한 지 1년밖에 안 된 아이가 전혀 새로운 장르를 만났으니까요. 그때는 연기에 대한 감도 없었고 재미도 느끼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그저 나한테 기회가 왔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찍었어요.”

    ▼ 2004년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를 찍을 땐 연기 욕심이 생기던가요.

    “20대 초반에는 일이 들어오면 생소한 분야라도 감사해서 했어요. 그때도 연기가 너무 좋아서 한 건 아니고 해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 박정아씨 의지와는 무관하게 드라마 출연이 결정됐나요.

    “제 의지도 들어 있었죠. 전 연기가 예능프로그램 게스트나 MC처럼 제가 가진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건 줄 알았어요. 전혀 다른 장르라는 걸 몰랐던 거죠. 진작에 알았더라면 출연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사실 시놉시스를 보면서 박예진씨가 맡았던 터프한 보디가드가 잘 맞을 것 같았어요. 근데 최윤석 감독님이 저한테서 슬프고 어두운 내면을 보셨는지 정우 역을 맡기셨어요. 결국 그 작품을 하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죠.”

    ▼ 반응이 좋지 않아서 힘들었겠어요.

    “모든 비난의 화살이 저에게 왔으니까요. 운대가 한창 상승곡선을 타다가 하향곡선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뭘 해도 다 잘되다가 팍 꺾이는 시점이었죠.”

    ▼ 데뷔 후 첫 고난이었나요.

    “예. 지금은 그런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땐 좀 여렸던 것 같아요.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떤 일이든 감사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최선을 다했는데, 사람들에게 육두문자를 듣고 모든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한창 열심히 일할 때라 정신적인 충격이 컸죠.”

    ▼ 감독에겐 욕먹지 않았나요.

    “부족한 것에 대한 꾸짖음, 가르침이 있었죠. 욕은 이번에 많이 먹었어요. ‘웃어라 동해야’ 하면서요(웃음).”

    ▼ 촬영하다 울기도 했나요.

    “서러워서 운 적은 없어요. 우는 장면이 계속 있어서 한 신 걸러 울었어요. 속상하면 우는 신에서 풀곤 했어요. 제작진은 저 친구가 힘들 텐데 촬영장에서 얼굴 붉히지 않고 열심히 한다며 기특해하셨죠.”

    “나는 가수 겸 연기자다”

    박정아는 자신을 ‘가수 겸 연기자’라고 소개했다. 이런 정체성을 찾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2001년 쥬얼리의 맏언니로 가요계에 입문한 후 그녀의 활동 영역은 무대를 넘어 예능과 라디오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 등으로 광범위해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녀는 남모르는 방황을 거듭했다.

    “10년 동안 가수생활 하면서 안 해본 장르가 없어요. 뭐 하나 특출하게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맡겨놓으면 마음 편한 사람이긴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가 많아졌고, 생방송 MC도 하고, 별밤지기 같은 DJ로도 활동했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싶어서요. 연예계생활을 견뎌내기엔 너무 여려서 정말 심각하게 그만둘 생각도 했어요. 2006년부터 2009년 초까지는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요. 연예인이 제 성격에는 안 맞는 것 같았어요.”

    ▼ 왜 그렇게 생각한 거죠?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요. 연예인은 자신의 끼와 재능을 알리고 밖으로 표출하는 직업인데 전 그걸 숨기려들었고, 인터뷰도 병적으로 싫어했어요. 내가 아무리 얘기해봤자 내 진심과는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고, 좀 즐겁고자 강렬한 멘트를 하면 세부적인 내용은 다 사라지고 그것만 부각되기 일쑤였거든요. 그런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니까 난 너무 여린가 보다,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주변 사람들이 ‘넌 좀 변해야 해. 변했으면 좋겠어’라고 얘기할 때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게 박정아고, 이게 난데, 왜?’ 그랬었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어요(웃음).”

    ▼ 박정아씨가 어떻게 바뀌길 바란 건가요.

    “좀 더 계산적이고 여유로워졌으면 한 거죠. 얼굴은 여자답게 생겼는데 하는 짓이 너무 털털하니까 조금만 자제하면 더 잘될 거라는 말도 자주 들었어요. 그땐 이해가 안 돼서 혼란스러웠는데 데뷔 10년차가 되니 조금은 알겠어요. 지금은 조금씩 진화하는 중이에요.”

    그녀가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은 건 2009년 3월, 에티오피아로 6박7일간 봉사활동을 다녀와서다. 빈민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홍보대사인 그녀는 이전부터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많이 반성했어요.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탓하지 않고 웃으며 열심히 사는 아이들 앞에선 욕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덧없이 느껴지더라고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티오피아를 다녀온 후 많은 것이 변했어요. 자존감도 생겼고 절 사랑하는 법도 배웠어요. 그전에는 저 자신을 내몰고 괴롭혔는데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참 대범한 아이였더라고요.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보자, 이 직업을 갖고 있으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렇게 다짐했죠.”

    ▼ 많은 깨달음을 얻었군요.

    “예, 한국에 오니까 세상이 정말 달라 보였어요.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어요. 물론 이후로도 힘들 때가 있었지만 그 스트레스를 가슴속에 끌어안고 있는 시간이 차츰 줄어들더라고요.”

    ▼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나요.

    “무조건 푹 자요. 잠자는 것을 워낙 좋아해 취미도 잠자기예요(웃음).”

    혈구지도(矩之道)

    시간을 거슬러 그녀가 가수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고교시절로 가 보자. 당시 그녀는 악기를 다루는 친구들과 카피밴드를 결성했을 정도로 록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그녀의 포지션은 보컬, 애창곡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보브 딜런의 ‘노킹 온 해븐스 도어(Knokin‘ on heaven‘ door)’와 혼성 4인조 포 넌 블론즈의 ‘왓츠 업(What‘s Up)’이었다.

    “노래를 곧잘 하는 아이였어요. 정식 밴드는 아니었지만 친구들이랑 모여서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불러보고 얘기도 많이 나누고 참 열심히 했어요. 그 멤버들 중 아직 연락하는 친구가 있어요. 죽마고우인 친구도 있고요.”

    ▼ 원래 꿈이 가수였나요.

    “어릴 때부터 노래가 삶의 일부였지만 미친 듯이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지금도 간혹 연예인을 하고 있는 자체가 신기해요. 가수가 된 건 우연이에요. 고등학교 때 아무로 나미에라는 일본 댄스가수를 좋아했는데 그분이 다국적 프로젝트 그룹을 만든다는 기사를 보고 오디션을 봤죠.”

    다국적 프로젝트 그룹의 이름은 서클. 그 오디션에 참가한 사람 중에는 쥬얼리의 전 멤버 이지현도 있었다. 하지만 둘의 운명은 엇갈렸다. 이지현은 합격하고 박정아는 고배를 마신 것. 그 일이 있고 1년 뒤, 박정아는 현 소속사인 스타제국의 대표에게서 함께해보자는 제안을 받으며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쥬얼리 멤버 4명을 포함해 총 8명으로 출발한 스타제국은 현재 60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중견기획사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소속 연예인이 저밖에 없어서 다른 멤버들을 기다리며 매일 혼자 노래연습을 했어요. 밤 11시가 되면 불 꺼지는 연습실에서요. 1년 반을 그렇게 불 꺼지면 연습실에서 나와 지하철 막차를 타고 귀가했는데도 힘든 줄 몰랐어요. 좀 무디거든요. 하하하.”

    쥬얼리는 2001년 데뷔 후 몇 차례 멤버가 바뀌었다. 원년 멤버는 박정아 이지현 전은미 정유진이지만 2집 때 전은미와 정유진이 나간 자리를 서인영과 조하랑이 메우고, 다시 4집 때 이지현과 조하랑을 대신해 하주연 김은정이 영입됐다. 2009년 말에는 솔로로 독립한 박정아와 서인영의 빈 자리를 박세미와 김예원이 채운다.

    ▼ 데뷔 후 박정아씨가 인기를 독차지해 다른 멤버들이 시기하지 않던가요.

    “워낙 착한 동생들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많이 섭섭하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 이지현씨가 탈퇴하면서 불화설이 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다들 지쳐 있을 때라 이지현씨도 새로운 힘을 얻고자 나갔던 것 같아요.”

    ▼ 탈퇴한 멤버들과 연락하나요.

    “이지현씨는 물론이고 다른 멤버들과도 연락하며 지내요. 정유진씨는 결혼할 때 마지막으로 봤고, 유일하게 정유미라는 친구가 연락이 안 돼요.”

    ▼ 후배인 서인영씨가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질투 나진 않던가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근데 인영이가 잘돼서 너무 좋아요. 걔는 뭘 해도 잘될 줄 알았어요.”

    ▼ 왜 그렇게 확신한 건가요.

    “인영이에겐 굉장히 부러운 면이 있죠. 당돌하고 당당하고 뭘 해도 똑 부러지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신인일 때도 자기 의사표현이 명확했죠. 전 뭐 하나 하려면 소심해서 부들부들 떨고 즐기지를 못했는데 이 아이는 뭘 해도 즐기는 거예요. 얘는 진짜 잘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니다 다를까. 진짜 잘된 거예요.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이 얘기를 하기 시작하죠. ‘아, 이제 박정아의 시대는 갔나요? 서인영 시대가 도래했군요.’ 그런 얘기가 자꾸 들리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었어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면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 결국 깨닫죠. 내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던 오랜 시간 동안 난 제자리에 멈춰 있었고, 그 친구는 열심히 달려 성장했다는 걸. 그러면서 세상은 역시 모르는 감정을 느끼게 하지 않는구나. 내가 잘될 때 우리 동생들이 좋은 마음으로 박수쳐줬지만 속이 썩었을 수도 있겠구나, 많이 힘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좋게 받아들였어요.”

    부모의 이혼과 사춘기

    박정아가 일찌감치 음악에 빠진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박정아의 아버지는 30대 중반까지 드러머로 활동한 박건호씨다. 박씨는 한때 재즈 아티스트 이정식과 밴드 활동을 함께 했다. 박씨의 드러머 생활은 박정아가 11살 때 아내와 헤어진 후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박정아의 뒷바라지를 위해서였다.

    ▼ 아버지가 가수가 되는 걸 반대하진 않았나요.

    “전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우스에서 드럼 치는 것을 보고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노래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물 흐르듯이 여기까지 왔어요. 노래는 할아버지가 잘하셨대요. 아버지는 유쾌하신 분이고요.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에 가수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 유년기에는 어떤 아이였나요.

    “유쾌한 아이였어요. 오늘 학교 가서 뭐하고 놀지, 그런 고민을 즐기는.”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요.

    “자상하시고 진짜 의인이세요. 산을 굉장히 좋아하셔서 어린 저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산을 타며 자연의 섭리를 배웠죠.”

    ▼ 자주 데리고 다니셨나 봐요.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한동안 엄마랑 살았는데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면 꼭 산에 갔어요. 산에 자주 가다 보니 그게 취미가 됐고, 방학 때는 15일, 20일씩 산에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죠.”

    쥬얼리 리더에서 배우로 거듭난 박정아의 솔직 토크
    ▼ 어머니와는 자주 만나나요.

    “자주 봐요. 할머니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네 딸 볼 생각도 마라, 그런 분은 아니시거든요.”

    ▼ 부모님이 헤어졌을 때 충격이 컸겠어요.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죠. 엄청난 상처를 받았어요. 요즘은 저와 같은 상처를 지닌 분이 정말 많잖아요. 그분들이 현실을 잘 이겨냈으면 좋겠어요.”

    ▼ 박정아씨는 잘 이겨냈나요.

    “이겨냈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해요.”

    ▼ 집안 형편은 괜찮았나요.

    “지금도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지만 답 나오잖아요. 뭐가 넉넉했겠어요. 넉넉한 것 하나 없었어요. 돈 걱정 없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 보면 부러웠고…. 10명 중 2명은 겪었을 법한 일이 일어나는 집이었어요. 보일러 기름 떨어져서 침낭 덮고 잘 정도….”

    ▼ 현실을 원망한 적이 있나요.

    “어릴 때는 그러질 않았어요. 원망이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열심히 전투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할머니와는 중학교 때부터 같이 살았어요. 두 집을 오가며 아버지와 있어도 보고, 엄마와 지내기도 했어요. 그때는 ‘단지 상황이 다를 뿐, 내가 두 분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건 분명해’ 하면서 씩씩하게 살았어요. 돈이 없어도 괜찮았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뒤늦게 보이기 시작하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보면 아, 부럽다…. 어릴 땐 그게 현실이니까 이겨내고 잘 견뎌낸 것 같은데…”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티슈로 꾹꾹 눌러 눈물을 훔친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약간 그랬던 것 같아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뭔가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그런 책임감이 컸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그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 사춘기는 무난히 보낸 건가요.

    “적당히 말 안 듣고, 적당히 속 썩이고, 적당히 나쁜 짓도 좀 하고, 가출도 하고 그랬어요. 적당히 삐뚤어져도 보고요.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본 적은 없어요. 밖에 나가서도 지킬 건 지켰어요. 어느 정도 방탕하게 놀다보면 스톱이 돼요. 요즘은 정신줄을 놓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쥬얼리 맏언니일 때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솔선하려고 했고, 동생들에게 어떻게 힘을 줄까 고민하고요.”

    ▼ 항상 어깨가 무거웠겠네요.

    “매사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는데도 즐기지 못했어요. 잘되고 있을 때 즐기면서 일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되게 안타까워요. 지금은 즐기고 있거든요. 어려서부터 20대까지 많은 일을 겪었던 것 같아요. 그 경험들이 연기하는 데 자산이 될 거라 믿어요.”

    “몸 쓰는 걸 좋아해요”

    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면 ‘박정아의 20㎏ 감량 성공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비결을 물었더니 그녀가 발끈하며 ‘오보’를 바로잡았다.

    “어떻게 20㎏을 훅 줄였겠어요. 60㎏에 육박하던 체중이 48㎏으로 줄었다는 얘기가 와전된 거예요. 55㎏으로 데뷔했으니 정확히 7㎏이 빠졌네요. 최근 살이 좀 찌긴 했지만 10년 가까이 체중 변화가 거의 없었어요.”

    ▼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해왔나요.

    “헬스클럽에는 일부러 다니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고등학생 때는 산에 다니고 운동하고 육상부도 하고 유도부에도 들어갔어요. 몸 쓰는 걸 좋아하다 보니 튼튼해졌어요. 원래는 비쩍 마른 아이였어요. 과학실에 있는 해골 표본 같았죠. 아버지가 절 살찌우려고 아침마다 삼겹살을 구워주셨고, 저녁마다 햄버거를 만들어주셨어요.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요.”

    ▼ 유도부 출신이라는 건 좀 의외네요.

    “육상부가 없어져서 도복을 사가지고 유도부에 갔어요. 하도 운동을 해서 지금도 상체는 말랐는데 하체가 표준 이상으로 튼실해요.”

    문득 방송에서 본 박정아의 목이 심하게 부어 있던 게 기억났다. “혹시 갑상선질환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놀랍다는 듯 눈이 동그래진다.

    “14년째 갑상선기능저하증을 앓고 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걸렸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갑상선기능항진증이었는데 약을 먹으면서 저하증이 됐죠.”

    갑상선기능저하증은 갑상선호르몬이 정상보다 적게 분비되는 질환으로 남자보다 여자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대신 피로감을 빨리 느끼고 예민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 일할 때 예민해지지 않던가요.

    “많이 그러죠. 예민하니까 밥이 안 넘어갈 정도로 버거웠죠. 전 노래만 할 줄 알았는데 너무 버거운 것들이 저한테 자꾸 들어오는 게 싫었어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못 즐겼어요. 그때는 너무 힘들기만 했어요. 일이 잘되면 신나서 좋아하다가도 어느 순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면 새롭게 맞는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밥이 안 넘어가니까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거예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해요. 전 힘이 빠지면 밝아지거든요. 팔굽혀펴기도 하고, TV 보면서 윗몸일으키기도 하고, 물병 들고 아령운동도 하고, 꾸준히 그렇게 해온 게 체력 관리에도 도움이 되고 있어요.”

    ▼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뭔가요.

    “없어요. 목소리밖에 못 다뤄요. 기타도, 드럼도 배우다가 포기했어요. 드럼은 너무 재미없는 악기예요. 청중의 심장을 뛰게 만들 정도로 기량을 키우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요. 모든 일이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 주량이 세다고 들었어요.

    “예. 잘 마시는 편입니다.”

    ▼ 어느 정도인가요.

    “날마다 달라요. 소주 3잔만 먹어도 취하는 날이 있고, 맥주 2잔만 마셔도 취하는 날이 있고, 소주 3병을 먹어도 끄떡없는 날도 있고.”

    ▼ 맥주보다 소주를 즐기나 봐요.

    “소주가 더 좋죠. 독주가 좋아요. 차라리 테킬라 같은 거요.”

    ▼ 술버릇은 뭔가요.

    “자거나 울거나. 지인들이 저랑 술 마시는 거 되게 싫어해요. 뭐가 서러운지 우니까.”

    “털털하지만 낯가림이 심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박정아의 매니저는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참 재미있는 친구 같다고 운을 떼자 박정아는 “벌써 7년째 호흡을 맞춰온 정말 고마운 동생”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데뷔 후 10년이 지났건만 소속사도 그대로다.

    ▼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나 봐요.

    “그런 편인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마음을 잘 못 열어요. 대외적으로 볼 때는 털털한데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는 말을 곧잘 들어요. 그걸 이해해주는 사람들하고는 끝까지 잘 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무척 두려웠는데 최근 몇 년 사이 굉장히 많이 변했어요. 술 마시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친해져서 카카오톡으로 수다 떨 정도로요.”

    ▼ 예전엔 낯가림이 심했나 보죠?

    “엄청 심했어요.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숨이 턱까지 차요. 죽을 것 같아요. 싫어도 티를 못 내고 저 혼자 죽는 병이라니까요. 그런 사람이 MC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겁도 많아서 난다 긴다 하는 분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도 힘든데. 게다가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훅 갈 수도 있잖아요. 20대에는 상황 자체를 즐기지 못했고, 갑자기 너무 잘됐고, 그걸 주체하지 못했고, 이겨내지 못했고, 그래서 참 버거웠어요.”

    ▼ 데뷔 초에 ‘포스트 이효리’로 불렸는데 어땠나요.

    “어마어마한 별명이어서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때 (이효리) 언니 행보를 보고 열심히 좇아갔어야 하는데 그 별명 때문에 언니한테 폐를 끼치는 느낌이었어요. 언니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다가가질 못했어요. 언니와 마주치면 민망했어요. 심지어 낯도 가리는 애이니…. 지금 생각하면 그보다 좋은 별명이 없죠.”

    어느덧 그녀도 이립(而立)의 나이다. 나이답게 홀로 서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랑은 흐지부지 끝났다. 2년간 공개 연인으로 지냈던 그녀와 가수 길은 올 2월 결별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 첫사랑은 언제 했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 격투기선수였던 3학년 오빠와 사귀었어요. 이게 사랑이구나 하는 느낌을 처음 준 사람이죠.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뛰고, 너무 좋고, 옆에 있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 그럼 길씨가 두 번째 사랑인가요.

    “글쎄요. 누군가가 좋아지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사랑을 모르겠어요. 첫사랑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어요. 전 뒤늦게 보는 것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는 지혜롭지 못한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되게 예쁘고 좋은 감정인 것만은 분명하죠.”

    ▼ 길씨와는 왜 헤어진 건가요.

    “훌륭하고 멋진 분인 건 분명하고요.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겠어요? 헤어지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요? 그냥 남과 똑같아요. 남들이 헤어지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겠죠. 성격이 안 맞고,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고.”

    ▼ 공개 연애를 한 게 후회되나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10년 동안 연예활동을 하다 보니 공개 연애라는 것도 해봤고, 공개 결별도 해봤고, 그냥 물 흘러가듯이 그렇게 됐어요. 하나의 경험이었고, 그 일들로 인해 또 느끼게 되는 것이 있고, 그 정도예요.”

    ▼ 드라마를 하는 도중에 결별 사실을 공개해 불편했을 것 같아요.

    “공개 연애를 한 다른 사람들이 다 느끼는 것들, 자그마한 것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것, 그런 불편함은 있었어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고요.”

    ▼ 길씨 말고 연예인을 사귀어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몇 번 스쳐갈 뻔했지만….”

    ▼ 인기가 많아서 고백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워낙 무딘 데다 관심도 없었어요. 대시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전 이대로가 좋아요,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대했던 것 같아요.”

    같은 곳을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

    식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물어봤다. 길과 연인이 됐을 때부터 몹시 궁금했다. 박정아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가 답했다. “이상형이 없는 게 문제”라고. 과연 진심일까.

    ▼ 외모는 안 보나 봐요?

    “잘생긴 사람 좋아하고요. 부담스러워 싫을 수도 있지만 ‘훈남(훈훈한 남자)’이 좋아요. 잘생겨도 좋고, 키도 컸으면 좋겠고, 능력 있었으면 좋겠고, 상냥했으면 좋겠고, 경제력 있었으면 좋겠고. 노처녀로 가는 지름길로 가고 있어요. 아참, 한 가지를 빼놨네요.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좋아요. 하하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남성상을 줄줄이 나열한 그녀. 한바탕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로소 이상형이 생각났나 보다.

    “예전에는 나한테 주는 사랑이 진심이고, 나한테 미쳐 있고, 내가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좋았어요. 정말 사랑해서 애걸복걸하는 사람, 안 보면 죽을 것 같아서 새벽 2시에 끝나도 한 시간이라도 얼굴을 봐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제 한 가지가 더 늘었어요.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 생각은 같아도 근본 자체가 다를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참 좋겠어요.”

    ▼ 연기하면서 저런 사람이면 좋겠다 싶은 상대 배우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지금까지는 열정이 많은 배우만 만나봤어요. 하나같이 연기에 대한 관심을 불끈불끈 불러일으키는 그런 분들이었죠. 그 열정이 멋있고 부러웠어요. 어느 순간 저도 그들에게서 작은 것이라도 배우려고 하고, 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바람직한 성향을 갖게 됐어요. 절 가두고 있던 틀을 조금이나마 깨부수고 나와 현실을 즐기는 여유도 생겼고요.”

    ▼ 30대가 되니 어떤가요.

    “28살, 29살에는 나이 먹는 게 정말 싫었는데 30대로 들어서니 여유가 생겼어요. 발뒤꿈치 주름까지 예뻐 보일 만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됐어요. 일에 대한 열정도 더 커졌고, 그래서 너무 좋아요.”

    ▼ 그럼 40대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가정을 꾸리고 있겠죠. 35살 전에 결혼하고 싶고, 아이도 두 명 정도 낳고 싶어요. 그때는 좀 더 여유 있고, 좀 더 즐기면서 사는 좋은 연기자가 돼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노래를 통해서든, 연기를 통해서든. 데뷔 초 목표는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자’였죠. 그래서 이 숫기 없는 내가 예능프로에 나가면 온갖 푼수 짓을 하면서 하루에 세 번만 웃기자는 독한 마음을 안고 방송을 막 했죠.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절 무척 좋아해주셨고 열렬하게 응원해주셨어요. 지금도 따뜻한 마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연예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의 롤모델인 정애리 선생님처럼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고,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선배가 되고 싶어요.”

    박정아는 요즘 액션스쿨을 물색 중이다. 마음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액션배우에 도전해보고 싶어서다. 이제 머잖아 유도부 출신 액션배우가 탄생할 듯하다.

    “앞구르기, 낙법, 기막히게 합니다. 근데 안 한 지 10년 됐어요. 일단 집에 퍼져 있는 게 싫어서 스포츠댄스 배우고 액션스쿨에 다니면서 몸 쓰는 거 먼저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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