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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⑩

유신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함석헌, 참여민주주의와 생명운동의 기수 장일순

함석헌과 장일순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유신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함석헌, 참여민주주의와 생명운동의 기수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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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그의 대표 저작이다. 원본은 일제강점기 ‘성서조선’에 실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였는데, 1961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이름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했으며, 1965년 다시 개정판을 냈다. 제목에서 ‘성서’가 ‘뜻’으로 바뀐 것은 함석헌이 종교관을 바꿨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따르다가 퀘이커교도가 됐다. 기본적으로 그는 기독교도인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다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말이다.”

이 책에서 함석헌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고난의 역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함석헌에게 역사란 기본적으로 고난의 역사이며, 그의 역사철학은 고난 사관이다. 상실된 나를, 나와 너를 포함한 씨알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역사이며, 한국역사는 바로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것은 고난의 선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책에는 식민지 시대에 함석헌이 가졌던 역사 인식이 반영돼 있다. 당시 그는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맞서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고, 고난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 민족적 자아를 회복하고자 했다.

‘하나님의 씨’와 ‘평민’



전문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이고 과잉 규범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관심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있지 않았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민족적 위기라는 시대 인식을 바탕으로 삼아 상실된 자기를 찾아가는 규범적 지향으로서의 역사 서술을 그는 목표로 했다. 나는 곧 씨알이자 세계이며, 이 씨알들이 다름 아닌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에게 나와 세계, 민족과 세계는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은 그의 역사 및 사회인식이 갖는 중요한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유영모와 함석헌 사상을 조명하는 특별분과가 열린 적이 있다. 제도권 철학자가 아닌 재야 철학자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 분과는 당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우리말로 독창적인 철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함석헌 사상은 새롭게 평가받을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지난 10여 년간 철학, 신학, 역사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철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진행돼오기도 했다.

여기 제한된 지면에서 함석헌 사상을 충분히 다루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앞서 말한 씨알 사상이다. 함석헌은 씨알 사상을 그의 스승인 유영모로부터 배웠다. 씨알이란 말은 유영모가 ‘대학(大學)’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한다. 씨알의 뜻에는 민중의 영적 특성, 주체성과 평등성이 담겨 있다. 이 씨알은 ‘하나님의 씨(아들)’와 ‘평민’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유영모가 전자를 중시했다면, 함석헌은 후자를 중시했다.

김경재에 따르면,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생명의 주체성, 책임성, 영성을 되찾고 평화로운 대동사회를 이루겠다는 생명·평화사상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사에서 나란, 주체란, 인간이란 누구인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현대 철학을 보더라도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기도 하고(실존주의), 구조적 수인(囚人)이기도 하며(구조주의), 상호주관적 존재(하버마스)이기도 하다.

함석헌에게 인간은 씨알이다. 그리고 이 씨알은 고유성과 독창성을 지닌 존엄한 생명의 존재 그 자체다. 함석헌 사상의 특징은 바로 존재가 타자와 언제나 동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타자란 다름 아닌 민중을 지칭하는데,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것은 민중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참 나’ ‘큰 나’로의 진화를 통해서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논리는 개인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주관주의와 구조적 강제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객관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자발적 의지와 구조적 강제가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21세기적인 사상가

이 점에서 함석헌의 사상은, 설령 그 논리 구성이 정교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회적 개인과 그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참 나’로 나아가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제도로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였으며, ‘참 나’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생산적 공존 및 조화를 추구했다.

함석헌과 비교해 장일순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상가는 아니다. 일각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높이 평가해왔지만,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9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 내가 보기에 장일순은 20세기적이라기보다 21세기적인 사상가였다. 특히 그의 생명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더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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