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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⑧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환갑 지나 부활한 대배우여 부디 건강하시길!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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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싸움꾼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젊은 시절 야만적인 액션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김희라.

197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유형의 한국 깡패 영화가 탄생했는데, 전설적인 주먹들의 실명을 다룬 영화였다. ‘김두한 시리즈’ ‘시라소니’ ‘거지왕 김춘삼’ 등. 이 모든 영화의 주인공은 이대근이었다. 액션 영화 팬들은 이대근에게 몰렸다. 이대근이 연기한 깡패 캐릭터에는 김희라에게는 없는 유머가 있었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로 연기하는 김희라보다는 밝고 유머러스한 이대근이 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이소룡 영화의 광풍 때문에 한국 액션 영화는 모두 무술 영화가 차지해버렸다. 김희라는 박노식 세대의 배우로 인식됐고, 박노식·최무룡 같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한 배우들의 사라짐과 함께 그의 존재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등장해 김희라가 가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영화가 ‘신풍객’(1976)이다. 시대물과 액션 영화 시나리오에 일가견이 있던 작가 윤삼육은 당시 쏟아져 나오던 국적 불명의 한국 액션 영화를 뛰어넘는, 한국 사내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통 액션 영화를 만들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홍명회의 ‘임꺽정’에서 볼 수 있는 영웅호걸풍의 조선 왈짜패 캐릭터를 영화에 담으려 했고, 주연 자리는 김희라에게 돌아갔다.

영화가 시작되면 기생의 치마폭에 휩싸여 먹고 자고, 술 마시고, 섹스하는 일에만 열심인 한심한 왈짜패 사내 김희라가 등장한다. 화류계 계집 품에서 노는 것이 사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소일거리라 킬킬거리며 말하지만,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상도 어느 곳에서 힘쓸 일, 즉 싸움질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동안 싸움질 안 하고 어떻게 참았는지 가지 말라고 우는 계집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이번에는 어떤 놈을 늘씬하게 패주나 희희낙락 길을 떠난다. 여자도 안다.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놀 때 그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란 것을.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오기만 바랄 뿐. 뭐 이 장사 한 두 번 해보고. 저런 사내 한두 번 겪어봤나 하는 감정을 젊은 날의 박원숙은 아주 능청스럽게 표현해낸다. 왈짜패 김희라가 찾아간 곳은 저기 경상도 어느 마을. 이 마을에는 옛 왕조 즉 신라왕의 왕릉이 많이 있는데 일본인 부자와 순사, 야쿠자들, 조선인 도굴꾼들이 신라의 유물을 마구 약탈해간다. 무법천지를 참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신라의 유물을 지키려 하는데, 일본 순사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인 부자들이 고용한 일본 야쿠자들의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고, 그들의 안하무인 행패 역시 마을 사람들을 참담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마을 사람들은 조선의 협객을 수소문하고, 의기가 있는 내로라하는 조선 협객들이 일본인 야쿠자와 대결하지만, 그들의 유도에 꼼짝 못하고 줄행랑을 놓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희라가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임을 자처하던 왈짜패에게 많이 속은 터라 행색이 초라한 김희라에게 눈길 한 번 안 준다. 마을에 나타난 김희라는 자신의 힘을 쓸 일에 너무 기뻐 방심하다 첫판에서 무참하게 얻어터진다. 첫 싸움에 졌지만 김희라의 얼굴은 매우 밝다. 한번 붙어볼 만한 놈들을 만난 것이 기뻐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황토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태어나길 싸움만으로 먹고살게 태어났는데 도무지 힘쓸 일이 없는 사내들. ‘신풍객’에서의 김희라는 소설 ‘황토기’ 속의 사내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비록 당시 창궐하던 홍콩제 무술 영화와 한국 태권도 영화, 이대근 주연의 실명 깡패 영화의 기세에 밀려 소문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선의 영웅호걸이 지닌 유유자적과 호탕함이 넘쳐나고 게다가 이런 곳밖에는 힘을 쓸 수 없는 나라 잃은 뛰어난 사내의 비애까지 표현한다. 김희라의 연기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이대근의 유머러스함을 가뿐하게 뛰어 넘는다. 지금까지 액션 영화에서 젊음의 분노와 어둠만을 연기하던 그가 유머러스한 캐릭터 연기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였다.

부전자전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김희라의 아버지로 1950~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연기파 배우 김승호.

1970년대 중반 이후 액션 영화에서 김희라를 더는 볼 수 없었다. 소위 정극이라 할 만한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그의 연기는 더욱 농익고, 깊이와 넓이가 더해졌다. 그리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웃음을 받던 액션 영화를 더 이상 연출하지 않는 임권택 감독과 다시 조우했다. 임권택 감독의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에서 김희라는 아주 인상적인 인민군 장교 역을 해낸다. 소년병들의 자살적인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는 인민군 포로였다. 라스트에 자신과 함께했던 소년병들이 모두 인민군 탱크를 향해 자폭하며 죽어버린 후 마지막으로 죽은 소년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그의 모습에는 전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다. 나이가 서른에 접어든 김희라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주로 악당 역할을 해내는데 그것이 모두 훌륭했다. ‘바람 불어 좋은날’ ‘장남’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같은 영화에서 김희라는 포주, 기둥서방, 건달, 생선장수 등 도시 변두리 빈민촌과 우범지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30대 남자를 연기해낸다. 그의 아버지가 1950년대 서민을 연기했던 것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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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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