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시절 야만적인 액션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김희라.
영화가 시작되면 기생의 치마폭에 휩싸여 먹고 자고, 술 마시고, 섹스하는 일에만 열심인 한심한 왈짜패 사내 김희라가 등장한다. 화류계 계집 품에서 노는 것이 사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소일거리라 킬킬거리며 말하지만,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상도 어느 곳에서 힘쓸 일, 즉 싸움질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동안 싸움질 안 하고 어떻게 참았는지 가지 말라고 우는 계집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이번에는 어떤 놈을 늘씬하게 패주나 희희낙락 길을 떠난다. 여자도 안다.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놀 때 그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란 것을.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오기만 바랄 뿐. 뭐 이 장사 한 두 번 해보고. 저런 사내 한두 번 겪어봤나 하는 감정을 젊은 날의 박원숙은 아주 능청스럽게 표현해낸다. 왈짜패 김희라가 찾아간 곳은 저기 경상도 어느 마을. 이 마을에는 옛 왕조 즉 신라왕의 왕릉이 많이 있는데 일본인 부자와 순사, 야쿠자들, 조선인 도굴꾼들이 신라의 유물을 마구 약탈해간다. 무법천지를 참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신라의 유물을 지키려 하는데, 일본 순사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인 부자들이 고용한 일본 야쿠자들의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고, 그들의 안하무인 행패 역시 마을 사람들을 참담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마을 사람들은 조선의 협객을 수소문하고, 의기가 있는 내로라하는 조선 협객들이 일본인 야쿠자와 대결하지만, 그들의 유도에 꼼짝 못하고 줄행랑을 놓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희라가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임을 자처하던 왈짜패에게 많이 속은 터라 행색이 초라한 김희라에게 눈길 한 번 안 준다. 마을에 나타난 김희라는 자신의 힘을 쓸 일에 너무 기뻐 방심하다 첫판에서 무참하게 얻어터진다. 첫 싸움에 졌지만 김희라의 얼굴은 매우 밝다. 한번 붙어볼 만한 놈들을 만난 것이 기뻐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황토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태어나길 싸움만으로 먹고살게 태어났는데 도무지 힘쓸 일이 없는 사내들. ‘신풍객’에서의 김희라는 소설 ‘황토기’ 속의 사내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비록 당시 창궐하던 홍콩제 무술 영화와 한국 태권도 영화, 이대근 주연의 실명 깡패 영화의 기세에 밀려 소문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선의 영웅호걸이 지닌 유유자적과 호탕함이 넘쳐나고 게다가 이런 곳밖에는 힘을 쓸 수 없는 나라 잃은 뛰어난 사내의 비애까지 표현한다. 김희라의 연기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이대근의 유머러스함을 가뿐하게 뛰어 넘는다. 지금까지 액션 영화에서 젊음의 분노와 어둠만을 연기하던 그가 유머러스한 캐릭터 연기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였다.
부전자전

김희라의 아버지로 1950~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연기파 배우 김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