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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④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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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혁명정부, 음악 탄압하면서 대중음악 발전

영국에서 맹활약한 외국예술가 중 한 명이 ‘음악의 어머니’로 통칭되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다. 그는 하노버 왕가의 궁정악장으로 있었던 인연으로 하노버공 조지 1세에게 발탁돼 영국에 왔으며, 하노버 왕가의 대관식을 위한 4편의 ‘대관식 미사’곡을 비롯해 영어로 된 최초의 오라토리오 ‘에스더’를 작곡했다. 헨델은 이 같은 작품을 통해 영국인이 가진 특유의 민족의식과 성경에 의거한 종교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음악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헨델은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화려하고 볼거리가 풍부한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으로 작곡을 했으며, 그의 작품은 안정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에 고무돼 헨델은 자신의 위치를 작곡가에서 제작자로, 제작자에서 극장주로 확대해 나갔다. 그러자 헨델의 성공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국인들의 반발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음악가들의 결집은 현격한 실력 차이 때문이어서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공연예술계의 비판적인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한정된 수의 극장을 영국 극작가들과 외국인 음악가들이 나누어 가져야 했기 때문에 대립구도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연극이 지닌 강점이 가세했다. 오페라 공연은 신작 오페라를 만들어야 하고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구조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반면에 연극은 규모면에서 오페라에 비해 무대장치, 의상, 인건비(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제작비가 현저하게 적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전작품을 재공연하는 풍토였기 때문에 신작을 계속 발굴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거지 오페라’로 빚더미에 오른 헨델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오페라의 유령’ 한 장면.

이런 상황에서 1728년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가 자신의 극본에 기존의 음악을 끼워 맞추는 방식을 사용해 발라드 오페라라는 장르로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를 무대에 올렸다. 이탈리아 방식의 오페라와 외국인 예술가에게 환호하는 귀족들의 의식을 런던의 거지, 사기꾼, 창녀들이 사는 사창가에 비유해 풍자한 이 작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그 인기는 헨델을 위협했다. 그 결과 헨델은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흥행에 실패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결국 파산해 빚더미에 앉았다.



헨델 이후에도 영국에서는 자국 작곡가보다는 외국인 작곡가를 선호하는 풍토가 음악 분야에서 지속됐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이전에 독일 오페라의 초석을 다진 카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는 자신의 작품 ‘오베론’의 성대한 초연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머물다가 눈을 감았다. 이렇듯 영국에서는 외국 작곡가의 명성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수의 외국 작곡가는 최고 대우를 보장해주는 영국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시 영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작곡가뿐만 아니라 연주자의 자질에도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최고의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은 영국 음악가들의 형편없는 실력에 불평을 터뜨렸다.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은 1856년 영국에 공연을 갔다가 오케스트라의 함량미달 수준에 크게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만 외치는 청중의 편파적인 수준에도 낙담했다. 당시 영국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에 대해서는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독일 음악에 대한 환상이 커져 있었던 것이다.

1850년대의 독일음악과 멘델스존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우연이 아니라 1837년에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선호했지만, 독일의 앨버트 폰 작센 코부르크 공과 결혼한 이후에는 사랑하는 남편의 성향을 좇아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했다. 강력한 군주국가에서 여왕이 작곡가, 제작자의 역할까지 하는 앨버트 공과 결혼한 사건은 영국 음악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는 앨버트 공이 직접 기획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그런데 앨버트 공은 임종 직전 자신의 장례식 행사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멘델스존에 대해서는 무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이 시절 영국의 수많은 음악도는 멘델스존이 태어난 독일로 유학 가는 것을 성공의 지름길이라 여길 정도였다.

독일 유학 경력을 가진 사람 중 영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아서 설리번(1842~1900)이 있다. 그는 독일 유학 후 왕실음악원 교수직을 얻어 안정된 위치에 있었으나, 본업이라 할 수 있는 교향곡과 합창곡 작곡을 넘어 대중적인 음악에도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극작가이자 유머작가인 윌리엄 길버트(1836~1911)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어내며 길버트-설리번의 코미디 오페라 시대를 열었다.

길버트의 계급의식과 특권의식에 대한 날카롭고 예리한 풍자와 ‘뒤죽박죽식’ 유머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 것이다. 그들은 예술적 견해 차이로 잠시 독자 노선을 걷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찰떡궁합을 과시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예컨대 이들의 합작품 중 1878년에 공연된 ‘군함 피나포’는 런던을 덮친 갑작스러운 이상고온현상으로 막을 내릴 위기에 있었으나 설리번이 자신의 코벤트 가든 연주 때 이 음악을 레퍼토리에 넣어 대중에게 소개한 것이 큰 효과를 보았다. 결국 다시 극장으로 관객을 모으면서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다. 그 여파로 이 작품은 미국에까지 알려져 미국 전역에 두 사람의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애석한 것은 당시에 저작권에 대한 아무런 법적인 조치가 없었기에(1891년에 생김) 미국의 어떤 제작자도 이들에게 저작권료를 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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