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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회 논픽션 공모 우수작

鎭魂의 書

  • 김정숙

鎭魂의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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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는 상처의 근원은 아버지였다. 단순히 아버지가 가해자였다. 집을 샀을 때는 이별을 감지했고 입학식은 깊고 오래갈 상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가 어린 딸과 한 첫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은 물론 말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준 날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지고 아버지로부터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받은 날로 기억되고 있다. 어리지만 나는 뭔가 숙명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막연하지만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동생의 세발자전거를 빼앗아 타는 심통쟁이가 되었다.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고 마는 화약심지 같은 아이로 변해갔다.

매 맞는 엄마

“우당탕탕탕.”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잠을 자고 있던 나는 밤이 늦은 시간에 세차게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엄마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재빠르게 뛰어나갔다. 아버지가 저승사자만큼 무서운 얼굴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토록 무서운 얼굴은 전에도 그 뒤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라고 골난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이미 겁에 질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마구 고함을 지르면서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동생과 나는 너무나 무서운 분위기라 감히 말리거나 울 엄두도 못 내고 초주검이 되어 영문도 모른 채 매 맞는 엄마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내 생애 가장 무서웠던 장면이다.

“자야 아부지요.”



난폭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과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사정을 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내 골수에 박혀버렸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내 귓속을 맴돌고 내 뇌리에서 사라져주지를 않는다. 겁에 질린 엄마의 목소리와 무섭고 끔찍한 아버지의 행위는 나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고 큰 아픔이 되었다.

살쾡이처럼 아버지를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데 난생처음 보는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주눅이 들어 벌벌 떨었다. 무서워 죽겠으면서도 죽어라고 덤벼들고 싶은 걸 참자니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날 못 지른 비명이 평생 내 육신 속에서 돌아다니며 울부짖고 있다. 끝내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못한 것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이율배반이며 내 처음의 비겁이다. 빡빡 문질러 닦아내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아마 그때부터인가 싶다. 내 속에서 폭력성이 싹튼 것이. 그날부터 엄마와 나 사이도 멀어져버렸다. 엄마가 싫어진 기억의 시작이 거기부터다.

아무 잘못 없이 맞는 매, 이래도 저래도 피할 수 없는 매라면 차라리 악다구니라도 써보지 그냥 맞기만 하던 엄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의 한복판에 퍼질러 앉아 나를 평생 힘들게 하고 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엄마를 윽박지르기는 해도 더 이상 때리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그 영상은 내게 평생 지옥이 되었다. 죽지 않고는 지울 수가 없음을 안다. 따지고 보면 엄마랑 나랑 오십보백보인데 그 모진 기억은 엄마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엄마가 죽어라고 대들었다면 아마 우리 남매도 같이 죽을 각오를 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엄마의 모든 것이 그날 밤과 연결되어 엄마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을 빼앗기고 잘못도 없이 매나 맞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엄마의 모든 것이 싫었다. 마음 둘 곳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가버렸고 엄마는 싫었다. 나는 지기 싫다는 오기로 가득한 기가 센 아이가 되었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빼앗고도 눈 하나 까딱 않고 사랑이라는 사탕발림을 해 살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알기엔 너무 어린 철부지였지만 나는 점차 이대로 당할 수만 없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했다. 죽어도 엄마처럼 당하고 살지 않겠다는 오기와 누가 뭐래도 내 아버지라는 천륜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방어를 했다. 그런데 그 본능적인 방어마저 죄악시하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작은엄마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이 당하는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남의 남자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엄마의 불행이 곧 자신의 행복 시작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내세웠다. 오직 그 잘난 사랑을 내세우며 우리가 철저하게 불행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작은엄마의 심리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는데, 아무리 뜨겁고 그 자체로는 절절하기 짝이 없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랑의 본 모습이라 생각한다.

엄마와는 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본처와 시앗의 관계지만 우리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금쪽같은 자식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들의 알량한 사랑이 거짓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가끔 아버지의 후회의 넋두리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의 말대로 옻나무에 걸린 연 신세가 된 아버지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모든 걸 감수하고 선택한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지닌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나이를 먹게 되어 어느 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면서, 더는 당하고 살 수 없었다. 나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모드로 전환했다. 함정을 파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이를테면 작은엄마가 보면 기겁할 아킬레스건을 일기장에다 써놓고 일기장을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놔두는 식이었다. 내 속에선 작은엄마를 이기고 싶다는 무조건적인 본능이 아주 맹렬하게 자라났다. 엄마를 대신한 복수라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나는 천방지축 명랑 쾌활 순진무구해야 될 유년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어떤 경우에도 내게 잘못이 없을 때는 아버지가 내편이라 걸 알고부터는 더했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당하지 않을 거라는 오기 하나로 힘들고 아프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요즘도 책이나 드라마 등을 보다가 남을 해치려거나 모략을 일삼는 장면이 나오면 책을 덮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모님의 집을 우리 집이라 한다. 나는 아버지가 사는 집도 우리 집, 내가 사는 집도 우리 집이라고 우기며 기분 내키는 대로 두 집을 오가면서 아주 꺽지게 살았다. 누구든지 건들기만 하면 박살내고 말겠다는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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