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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기술이 예술이 된 ‘쟁이’의 뚝심과 도전 한평생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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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전북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제자와 함께.

유춘봉은 동일가구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소병진을 소개해주기로 했고, 소병진은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김 사장에게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운을 뗐다.

“제가 일 좀 더 배워야겠다고 했더니, ‘네가 배울 게 뭐 있냐?’며 다른 공방에서 저를 빼가려는 줄 알고 돈을 더 올려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저는 사장님 배신 안 합니다. 동일가구에 갑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네가 어떻게 거길 가?’ 그러기에 유 선생님 얘기를 할 수가 없어서 기능올림픽 메달 덕택에 취직이 됐다고 얼버무렸죠.”

곧 마음이 풀린 김 사장은 “그러면 3년만 배우고 오라”며 비로소 연장통을 내주었다. 목수에게 연장통은 신분증이나 마찬가지다. ‘마누라는 빌려줘도 연장통은 안 빌려 준다’는 것이 목수세계의 불문율일 만큼, 연장은 목수의 존재 조건이기도 하다. 목수는 연장이 있어야 목수인 것이다.

“설마 마누라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지요. 솜씨 나쁜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하는데, 사실 연장이 정말 중요해서 나쁘면 탓할 만도 합니다.”

동양 최대 가구공장에서 “저런 건 내 제자도 더 잘 만들어”



그는 소중한 연장통을 싣고 제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대한민국 최고 목수가 되자’는 굳은 결심 하나로, 아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울고불고 매달리는 어머니를 외면하고 올라온 서울. 그는 천호동까지 택시를 타고 동일가구로 갔다. 동일가구는 동양 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3만 평 부지에 제재소가 두 군데나 있고 종업원이 500명, 수위만도 열명이나 되었다. 입구에서 사무실까지 가는데 연장통을 손수레에 실어 한참 가야 했다(목수의 연장통은 큰 여행용 가방과 맞먹는 크기다) .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죠. 가구제작 부문도 국내반, 청와대반, 수출반이 따로 있었는데 계장으로 있는 유 선생님 후배가 저를 보더니 어리니까 국내반으로 데리고 갑디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드는 걸 보니 시시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일은 제 제자도 이보다 더 잘합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엔 청와대반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청와대에서 쓸 집기를 제작하는 곳인데 그곳에선 맨 의자 같은 것만 만들더라고요.”

실망한 그는 “외람되지만 이런 기술 배우려고 도급일 접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하고선 제자에게 “궤짝(연장통) 실어라, 돌아가자!” 하고 외쳤다. 그의 반응에 놀란 계장은 사무실로 들어가 한참 있다 나오더니 드디어 일본 수출반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백골’을 보고 가슴이 졸아들었다. 젊은 그의 눈에는 죄다 할아버지로 보이는 흰머리의 장인들이 만든 백골은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 만큼 훌륭했다.

“전국 최고 솜씨들이 만든 것이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손맛이 들어간 가구만 찾기 때문에 모두 손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열 명 남짓한 수출반에 합류한 그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원목에 대해 더 많이, 더 확실히 알게 되었고, 도면에 따라 제작하는 시스템을 익혔다. 그전에는 모든 작업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위에서 내려준 도면에 따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구 디자인에 눈을 뜨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는 디자이너를 붙잡고 시시때때 술도 사고 밥도 사면서 가구도안을 배웠다. 그런 면에서 동일가구라는 일터는 젊은 소병진에게 확실히 더 넓은 새로운 세계였고, 그곳에서 쌓은 경험이 훗날 아름다운 전주장을 되살리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유춘봉이라는 이름 석자가 나올 때마다 ‘은인’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가 더 크게 피어나도록 넓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그런 눈 밝은 이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좋은 기술로 돈 잘 버는 농방쟁이에 머물고 말았을지도 모르니까.

다시 전주로,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동일가구에서 3년 정도 일했을 때, 뒤늦게 영장이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처음에는 연장통을 내어주지 않기에 영장을 보여주며 복무 마치면 다시 오겠다고 하니 겨우 내주더군요. 평발이라 고향 전주에서 방위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근무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지 못했죠.”

가끔 그는 그때 서울로 다시 갔어야 하는데, 그랬더라면 아마 공장장은 되었을 테고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살지 않았을까, 후회할 때가 있다. 그러나 외딴 사택에서 홀로 사는 서울 생활은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서울 올라갔을 때 그토록 애달파했던 어머니에게 둘째아들 병진은 든든한 기둥이자 사랑스러운 효자였다. 그런 어머니와 동무들, 동료들이 있는 푸근한 고향의 품을 차마 떠나지 못한 그는 중앙가구점과 다시 인연을 이어갔다. 어찌 되었건 떠나기 전 김 사장과 한 3년 약속을 제대로 지킨 셈이었다.

“이번에는 2년치 삯을 미리 받고 계약을 맺었어요. 그리고 제 공방을 따로 차려 중앙가구점에 납품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나갈 무렵까지 계속 잘나갔었죠.”

그러다 중앙가구점이 문을 닫는 사태가 생겼다. ‘방위성금’을 잘 내지 않아 위에 밉보인 김 사장은 결국 사업을 접게 되었고, 그 결과 납품처가 사라진 소병진은 직접 가구매장을 내게 되었다.

“전주 중앙동 제일 번화가에 큰 가구점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들고 내가 파는 사장이 된 거죠.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됐는데, 1980년대 들어 가구에 특별소비세니 뭐니 해서 장사가 점점 잘 안되기 시작하더군요.”

‘결혼은 사장이 되고나서 하겠다’고 결심한 대로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장사는 어려워지고 빚은 쌓여갔다. 어쩌면 그는 뼛속 깊이 장인이었지, 사업은 그의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빚만 안은 채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마침 공장제작 가구가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고,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던 동료들도 인테리어 사업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한창 붐을 이루던 집짓는 일에 뛰어들어 문이나 창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예 직업을 바꾸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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