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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⑥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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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다’는 뜻의 발레 … 피렌체에서 시작

발레는 프랑스에서 왕실의 주요 공연으로 발돋움했고,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른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왕권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공연 장르로 변모해나갔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위엄을 드높이고 과시하기 위해 발레 학교를 창설하고 직업적인 무용수를 양성했지만, 이런 일은 결과적으로 발레의 성격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발레의 성격이 궁전에서 왕실과 소수의 명문귀족만을 위한 공연에서 일반 대중도 즐기는 공연으로 바뀌었고, 작품 소재가 다양해졌으며, 여자무용수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또 대중 유료관객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고도의 기술적인 동작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발레 대중화’ 과정을 밟고 있던 프랑스 발레에 커다란 타격을 가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혁명파의 공포정치 기간에 발레는 봉건귀족 문화로 간주되어 공연을 금지당했고, 무용수들은 ‘귀족에 동조해 서민들로부터 착취한 세금을 낭비하는 자들’로 규정됐다. 그래서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은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공포정치가 물러간 후 발레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지만 프랑스 발레가 누리던 예전의 영화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러시아는 프랑스와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정반대에 위치하고 기후, 종교, 문화 등이 너무나 다른 나라였다. 제도와 관습뿐만 아니라 국민의식에서도 폐쇄된 중세의 농경사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서구화 개혁으로 변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귀족들과 지식인 사회에는 서유럽의 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는 풍조가 생겼고, 서유럽의 지식인, 예술인들은 러시아에서 환대를 받았다.

프랑스어는 러시아 귀족사회의 필수 언어가 되었고, 귀족들의 집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많은 무용수가 러시아로 이주했고 그 결과 러시아 발레는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러시아 발레는 무용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했지만, 음악은 양상이 사뭇 달랐다.



러시아는 외국의 유명 작곡가에게는 몹시 관대했지만 자국의 작곡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러시아 작곡가들과 러시아의 전통 멜로디를 천시하는 경향이 상류층을 지배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민족음악 5인조’라고 일컬어지는 5명의 러시아 작곡가(보로딘, 쿠이, 발라키레프, 무소르크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하나같이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또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형성된 서유럽식 가치관과 민족주의 배척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5인조의 출신과 직업을 보면, 발라키레프는 권위 있는 수학자였으며, 보로딘은 탁월한 화학 교수였다. 그리고 무소르크스키는 육군 장교이자 공무원이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였다. 이렇듯 민족음악 5인조는 모두 음악과는 관련이 없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러시아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와 원리를 계승, 발전시키길 열망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으로 발전한 발레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

그래서 그들은 서유럽적인 음악기법을 교육하는 음악 정규교육기관을 최초로 설립한 유대인이자 전설적인 연주자였던 루빈슈타인 형제(안톤 루빈슈타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를 비난하는 동시에, 그 형제가 설립한 모스크바 국립음악원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을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루빈슈타인 형제가 세운 음악원에서 서구식 음악교육을 받은 차이코프스키는 행운아였다. 러시아 음악을 유럽 전통음악과 결합시키면서 러시아 민족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차이코프스키는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민족주의 5인조와는 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비난의 화살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우랄산맥 서부의 광산촌인 보트킨스크에서 광산 감독관을 하는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여섯 형제와 함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몹시 예민하면서도 다정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닌 아이였던 그는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귀를 틔웠다. 오케스트리온은 사람의 손길 없이 미리 입력된 기계적 장치에 따라 자동으로 연주되는 악기로, 뚜껑을 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르골도 오케스트리온의 하나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서는 생계를 꾸리기조차 힘든 당시 현실에서 그가 전문적인 음악가로 대성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10세 때 엄격한 훈육으로 유명한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앞길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부에 직장을 얻어 생활인이 되었지만, 그의 내면에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자비한 제국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영혼은 음악에서 위안을 얻었다. 견딜 수 없는 예민함을 가졌던 그는 결국 흡연, 음주, 동성애를 통해 탈출구를 찾았다. 특히 18세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차이코프스키는 상실감에 빠지면서 더욱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그는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우울함과 명랑함을 평생 지니고 살게 되었다. 당시의 차이코프스키는 표면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음악에 대한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작곡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이코프스키 역시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와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23세의 나이로 러시아에서 최초로 설립된 정규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 것이다. 그가 학창시절에 작곡한 작품은 학생 수준으로는 뛰어났지만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가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졸업과 함께 지휘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의 동생이 신설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채용된다. 현재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은 그의 이름을 딴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의 음악원 교수 자리는 안정된 직장은 아니었지만 먹여 살려야 할 식솔이 없었던 그는 생계 걱정 없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시절 그는 운명의 장난처럼 너무나 상반된 영향을 끼칠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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