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색에 빠진 아버지와 (베토벤이) 17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청소년기부터 가장 노릇을 하던 내가 이제 안정적인 생활에 접어들자마자 불운에 당면했다.”
그러나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온 베토벤은 자신을 다그치면서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유서를 작성한 때가 제2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시점이었으니, 청력을 잃은 후 제9번 교향곡까지 8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또 베토벤의 전 작품을 볼 때, 작품번호 31번부터 135번까지 거의 100여 곡의 독주곡,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교향곡을 귀머거리 상태로 작곡하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사는 동안 수많은 뮤즈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1994년 버나드 로즈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게리 올드만과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주연한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베토벤이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수신인을 밝히지 않은 편지 3통이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들은 ‘나의 불멸의 여인에게’로 시작하고 있었다. 구구절절 그의 음악처럼 정열적이고 뜨거운 구애의 말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그 편지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나를 사랑해주시오. 오늘도, 내일도, 그대, 그대 그대를 향한 눈물겨운 그리움, 내 생명, 내 모든 것이여, 안녕! 내 진심을 잊지 말아주오!”와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평생 신경질적이고 무뚝뚝하게 대하고 남을 위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불장군’ 베토벤의 연서가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그의 연인이 누구인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1811~12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연서가 발견된 그의 사물함에는 그의 재산에 관한 문서와 각종 중요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평상시 자주 사용하던 사물함의 용도로 추측해볼 때, 그는 15년간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를 자주 읽어보며 애절한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베토벤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애틋한 연서의 수신인이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월광(14번)’을 헌정한 줄리에타 기차르디(1784~1856)일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린다.
‘연인’ 줄리에타 기차르디
기차르디는 빈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귀족으로, 17세 때 30세의 베토벤을 만났다. 당시 베토벤은 촉망받는 작곡자이자 연주자였지만 평민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베토벤의 이름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에서 ‘판(van)’을 보고 귀족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판(van)’은 독일 귀족을 칭하는 ‘폰(von)’과는 다르다. 베토벤의 선조는 네덜란드에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어 ‘반(van)’은 영어 ‘오브(of)’를 의미한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줄리에타는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와 베토벤의 청력을 실험하는 내기를 한다. 당대 최고의 피아노를 주문한 뒤 베토벤을 혼자 남겨 연주하게 함으로써 그의 청력을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피아노에 귀를 대고서 그 울림의 차이로 월광을 연주한다. 아름다운 월광의 화성을 찾아가며, 한 박자 한 박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베토벤의 모습은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영웅의 이미지로 다가오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의 눈망울을 젖게 만들었다. 물론 이 장면은 감독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줄리에타 기차르디가 ‘백작부인’의 삶을 택하자, 베토벤은 암흑의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죽을 결심으로 유서도 썼다. 베토벤은 이후 그와의 사랑을 잊으려는 듯 많은 여인을 만나 각기 다른 여인에게 많은 곡을 헌정했다. 물론 줄리에타 기차르디의 초상화가 베토벤이 고이 간직한 유품의 하나였고,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인 만큼 ‘불멸의 여인’에 가장 유력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추측일 뿐이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로 1805년 초연 이후에 10년 동안 세 번 개작하는 열의를 보인 오페라 ‘피델리오’가 있다. 모함을 받아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감옥에 들어간 적극적이고 강인한 ‘레오노라’가 ‘불멸의 여인’일지도 모른다.
자식이 없던 베토벤은 막냇동생 아들인 카를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제수인 요한나와 법정투쟁 끝에 양육권을 얻은 그는 조카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자식교육에서는 알코올중독자였던 그의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윽박지르곤 하는 등 조울증 증세는 흡사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았다. 이런 성격 때문에 집안 가사도우미는 한 달이 멀다 하고 그만 뒀고, 조카는 과도한 관심과 기대에 따른 부담 때문에 권총 자살까지 시도했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황당한 상상력을 발동해 요한나를 ‘불멸의 연인’으로 만들고 조카 카를을 베토벤의 아이로 설정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어쨌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고전주의(classicism) 작곡기법으로 소나타 형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화롭고 전형적인 구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엄숙장엄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에 반발해 나온 고전주의는 계몽주의 영향으로 합리성을 추구했다. 모차르트는 빈에 머무는 동안 하이든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빈고전악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고, 베토벤은 이러한 고전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날, 묘지 관리인만 지켜보는 가운데 묻힌 모차르트와 2만여 명의 추모객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치른 베토벤. 이 두 사람은 모두 최고의 작곡가였지만 마지막까지 그 삶은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남긴 음악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거라는 점에서는 어쩌면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