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국회 진입한 ‘마지막 주사파’ 실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2-04-18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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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어느 날 한 운동가가 시(詩)를 썼다.



    만약 우리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지나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한숨과 치욕 속에서 보내야 할지 모른다.



    만약 우리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지나온 세월보다 더 많은 세월을

    남과 북이 총칼 맞대고 서 있어야 할지 모른다.

    지나간 시절의 휘발과 이탈, 분열과 혼란을 간신히 딛고 선 전국연합 10년

    이제 우리, 민족자주의 이념이 있고

    존경과 신망의 지도가 있고

    군자산의 약속이 있는 우리가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그냥 흘려보내고 만다면

    우리 스스로 이 어둔 세상의 대안이 되고

    민중들의 희망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와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다.

    6·15 공동선언을 바닥에 깐

    3년 안에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민족민주 정당 건설,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연방통일조국 건설은

    그리하여 농민은 이 땅의 주인이 되고

    노동자는 공장의 주인이 되고

    청년 학생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주인 되는 세상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아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진실로 목숨까지 포함하여

    3년 후인 2004년엔 전교조 소속 교사 신○○씨가 ‘군자산의 약속’이라는 비장미 가득한 시집을 냈다. 군자산의 약속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통합진보당의 특정 정파에게 이 약속은 테제(These·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기본 방침이 되는 강령을 가리키는 독일어)다. 군자산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 서 있다. 충북의 소금강이라 불렸을 만큼 산세가 빼어나다. 2001년 9월 NL(민족해방) 운동가들이 군자산에 집합했다. 이날 결의 내용을 ‘9월 테제’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이 결의한 이 테제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 9월 테제는 1945년 박헌영이 작성한 8월 테제를 연상케 한다. 현 단계에서 조직이 나아갈 바를 정리한 것. 9월 테제가 군자산의 약속이다. 색안경 쓰고 들여다보면 민족민주전선은 통일전선전술과, 연방통일조국은 고려연방제와 오버랩된다. 9월 테제의 각론을 보면 혐의가 더 짙다.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3월 23일 4·11총선 서울 관악을 후보 사퇴의 뜻을 밝힌 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통일전선운동의 꽃은 중간층과의 사업이다.

    ▲변혁의 성패는 중간층을 누가 전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당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9월 테제는 또한 반미 자주화 투쟁을 ‘이남 변혁 운동의 전략적 중심’으로 설정하고 있다.

    ▲반미 투쟁은 이남 민중만의 과제가 아니라 전 민족적 과제이며 반미 자주화를 실현하는 힘 역시 전체 민족 자주 역량으로부터 나온다.

    ▲민주노조운동을 이 반미 자주화를 주선으로 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키자.

    ▲반미 자주화 투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민족 민주 진영이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적 다수파로 자리 잡을 수 있다.

    9월 테제가 나온 후 10년 6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큼 세상도 바뀌었다. 군자산에 모여 연방통일조국 건설을 결의한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

    경기동부가 국회에 진입했다.

    이 정파는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4·11 총선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여론조사 조작 시비에 연루됐을 때 그 이름이 회자됐다. 진보진영 내부에선 오래전부터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조직이다. 이 정파에 비판적인 이들은 ‘경기동부스럽다’는 단어를 시대착오적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경기동부는 이념 집단이라는 점에서 친박계·친이계·정동영계·손학규계라는 낱말과는 성격이 다르다.

    경기동부연합 소속으로 지목된 인사들은 “나는 경기동부와 무관하다”거나 “경기동부는 실체 없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선거 국면에서 근거 없는 색깔론을 꺼내 들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정희 대표는 “경기동부의 실체를 모른다”고 답했다. 언론 접촉을 피하고 입을 닫은 인사도 있다. 통합진보당이 언론에 제공한 19대 총선 출마자 연락처 명부엔 공교롭게도 경기동부 소속으로 지목된 인사들의 휴대전화번호만 누락돼 있다.

    이정희 대표가 총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경기동부에 집중하던 스포트라이트는 민간인 불법 사찰과 ‘나는 꼼수다’ 김용민 막말 파문으로 옮겨갔다. 언론도 선거국면에 매몰돼 이 정파와 관련한 추적보도에 나서지 못했다. 기왕에 나온 단편적 보도엔 사실과 다른 내용도 적지 않게 담겼다.

    야권이 후보 단일화를 통해 12월 대선에서 승리하면 통합진보당은 연립정부의 일원이 된다. 일부 부처 장관도 할당받는다. 진보진영에서 경기동부로 불리던 세력이 차기 정권의 한 축이 될 수도 있는 것. 통합진보당은 4·11총선을 통해 여소야대를 이룬 뒤 캐스팅보트를 쥐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3석을 얻었다. 절반의 성공이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 직전에 터진 경기동부 이슈가 야권 전체의 표를 일부 갉아먹고,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통합진보당의 목표에 악재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주사파의 하나인 자민통 그룹의 리더였던 옛 NL 핵심인사 K씨는 경기동부의 국회 진입을 이렇게 평했다.

    “그들이 국회에 들어간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상당하다. 그들은 ‘가장 늦게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념을 고집한’ 주사파다. 물론 그들이 현재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생각이 바뀌었을 소지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4·11총선을 통해 명실상부한 친북좌파가 국회에 진입한 것만은 분명하다. 남북관계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입법기관에 들어간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의미가 상당한 것 아닌가. 역설적으로.”

    한쪽에서는 실체가 없는 조직이라거나 실체를 모른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마지막 주사파’라고 한다. PD(민중민주)계가 주축인 진보신당 관계자는 “경기동부를 모른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이라고 했다. 도대체 경기동부가 뭔가.

    “색깔론을 제기하고 있다”

    대중이 옛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만 회자되던 경기동부를 뇌리에 각인한 것은 3월 20일 김어준 씨가 총수인 ‘딴지일보’가 ‘정치부장’ 명의로 쓰인 장문의 기사를 실으면서다. 이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경기동부라고 불리는 세력의 실체 추적을 시작해보자.

    “이정희라는 젊은 정치인이 민노당에 이어 통합진보당의 대표 자리에 있는 것조차 그들이 결정한 거다. 정진후, 윤원석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에게 백날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우겨봐야 그 셋은 혼자 앉아 피눈물만 흘리게 될 것이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당하는 심정을 생각해보라. 도대체 누가 그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도대체 어떤 집단이 그들을 내세워 무리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총선 전체 판국을 흐트러뜨리면서도 물러설 줄을 모르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이런 속성을 가진 집단이 통합진보당의 핵심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이름은 과거에 NL이었고, 주사파였다가, 최근에는 자주파로 불리기도 하고, 민노당 시절에는 진보신당 그룹을 축출해낸 당권파였다가, 요즘 유행으로는 경기동부라고도 불린다. 정식 당직도 없는 몇몇이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거기에서 수많은 자기 계열 소속 구성원들의 정치적 행동을 결정하고 명령을 내린다. 그들의 결정에는 아무도 반항할 수 없으며, 그들의 결정은 공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수시로 조직원들을 동원해서 당의 의사결정에 개입하고 대의원대회에 영향력을 끼친다. 그들은 이번 총선을 준비하면서도, 정식으로 선출된 공동 당대표들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당내 지역구 경선과정을 조작하다가 들통이 나서 유시민이 당무 거부라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게 만들기도 했으면서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당선 가능한 비례대표의 거의 모든 자리에 자기 계열 사람들을 앉히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보수언론의 경기동부 관련 보도를 두고 이 정파 소속으로 지목된 인사들은 “유령단체를 만들어 색깔론을 제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억지다. 경기동부를 아우팅한 것은 진보진영 내부의 리버럴 세력이다. 딴지일보 기사가 SNS를 통해 퍼지면서 경기동부라는 낱말이 네이버, 다음의 실시간 인기 검색어로 떠올랐다. 보수언론이 경기동부를 다룬 것은 SNS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의 일이다.

    “주사는 이성 아닌 신앙의 문제”

    경기동부의 실체에 접근하려면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 운동권 계보를 들여다봐야 한다. NL은 민족해방 계열의 좌파 운동 세력이다. 비(非)주사 NL로 불린 그룹도 있다. NL은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주사파로도 불렸다. NL과 경쟁 관계인 PD는 사회주의 노선에 좀 더 충실했다. 통합진보당의 심상정, 노회찬 당선자가 PD계열이다. 이 두 사람은 현재 서유럽 좌파에 가까운 노선을 걷고 있다. 종북(從北·북한 추종)이라는 단어는 PD가 NL을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한 단어다.

    사회발전 5단계론에서 한국이 어느 지점에 위치했느냐를 두고 NL, PD가 분기했다. PD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경도됐고, NL의 주사파는 북한을 모델로 삼았다. 민족해방(NL)을 이룬 뒤 민중민주주의(PD)를 거쳐 혁명(Revolution)을 해야 하는데, NLPDR에서의 위치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이다. PD는 NL 시기를 지났다고 봤고, NL은 남조선은 미제 식민지라는 북한의 주장을 따랐다. PD는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NL은 “때가 아니다. 해방부터 이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민주노동당 창당 주체는 PD다. 민중당→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의 저변은 PD 중심으로 이뤄졌다. 반면 NL은 독자 정당 구축에 부정적이었다. PD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정당(전위당)을 건설할 수 없으므로 전술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봤다. NL은 전위당은 북한에 존재하므로(북한 노동당) 구축할 필요가 없으며 야권을 비판적으로 지지해 한국의 정치체제를 바꿔나가는 게 먼저라고 여겼다. NL이 1992년 대선 때 백기완 후보를 돕지 않았고, 1997년 대선 때 권영길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까닭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이 배출한 의원 10명 중 NL은 현애자 전 의원이 유일했다. 민노당은 PD의 정당이었다. 그런데 2004년 민노당 당권을 NL이 차지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최고위원 선거에선 ‘세팅 논란’ ‘조직적 담합 투표에 따른 몰표 현상’이 벌어졌다. 경기동부라고 불리는 세력을 비롯한 NL그룹은 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 범PD계를 누르고 당권을 잡았다. 2004년 9월 이전의 민노당과 이후의 민노당은 헤게모니 집단과 정책에서 성격이 크게 다르다. 민노당에서 PD는 평등파 혹은 좌파, NL은 자주파로 불렸다.

    4·11총선에서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한 진보신당은 자주파(NL)에게 종북주의를 버리라고 요구하면서 민노당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이 주축을 이룬다. 진보진영 내부의 종북 논란과 관련해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2008년 2월 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은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시점이 4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몇 년 전에 내가 당에 절대로 주사파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의 모 인사가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며 주사파들과 나의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주사파는 내게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민주노동당 가입을 권유하는지 자랑을 했다. ‘동지, 김 주석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 것 같소. 내 생각에 김 주석이라면 남조선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했을 것이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진보정당을 같이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종북주의자들이 온갖 편법으로 민주노동당의 조직을 장악해 들어와도 징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당시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때 내가 탈당으로써 경고했던 일이 지금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운동을 해봤다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도 이해가 안 간다. 이른바 평등파도 한때 망해가던 소련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지만 동구의 몰락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처럼, 북한을 모델로 삼는 자주파도 언젠가 생각을 바꿀 것이다. 이게 많은 사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주사파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다. 주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 어떤 경험적 증거, 어떤 정합적 논리, 어떤 상황적 변화를 들이대도 깨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김영환, 하영옥의 민혁당

    ‘조선일보’는 경기동부연합이 1990년대 최대 운동권 조직인 경기동부지역연합에서 유래했다고 썼다. (3월 24일자 ‘교섭단체 노리는 정당 실제 지도부, 국민은 모른다’ 제하 기사 참조) 이 보도는 사실의 일각을 담고 있기는 하나 진실과는 다르다. 경기동부연합은 1990년대 운동권 최대 조직이 아니다. 또한 주사파만의 조직도 아니다. 경기동부연합은 1991년 결성한 전국연합의 하부조직으로 성남·용인 일대를 아울렀다. 전국연합은 고 김근태 전 의원, 이인영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 소속했을 만큼 이념 지향이 다채로웠다. 재야민족민주운동의 전국조직 전국민주민족연합(전민련)의 후신이라고 보면 된다.

    경기동부의 핵심은 오히려 1999년 안보당국이 적발한 민혁당과 교집합을 이룬다. 민혁당을 거론하지 않고는 현재의 경기동부를 이해할 수 없다. 민혁당은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싹이 튼 주사파의 원조 격인 김영환 씨가 주도해 만든 불법 정당이다. 김 씨는 ‘강철서신’이라는 주사파 팸플릿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1991년 강화도에서 북한 잠수정을 타고 월북해 김일성을 만나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남조선에서 지하당을 조직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듬해 3월 16일 민혁당을 창당했다. 김영환, 하영옥, 박○○ 3인이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김 씨는 눈으로 본 북한에 실망한데다 식량난 소식을 접하면서 민혁당 활동에 회의를 느꼈다. 1995년 ‘푸른사람들’을 조직하면서 북한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97년 민혁당은 김 씨 주도로 해체 수순을 밟았다. 중앙위원회 표결에서 2:1로 해체를 결정했다. 그런데 하영옥은 김영환을 변절자로 여기면서 민혁당 산하의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를 관리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2번이던 이석기 국회의원 당선자가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이었다. 이의엽 통합진보당 전략기획위원장 겸 19대 총선 선대위원장은 민혁당 영남위원회 산하 부산지역위원장으로 일했다.

    하영옥의 재건 민혁당은 1999년 사정당국에 적발되면서 와해됐다. 1999년 검거된 김영환은 오래전 전향했다는 이유로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다. 하영옥과 이의엽 위원장은 각각 1999년, 2000년 검거됐다. 이석기 당선자는 2002년 5월 구속된 후 2003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이 당선자는 경기동부의 기관지 격이라는 평가가 있는 ‘민중의 소리’에 참여했고 사회동향연구소라는 이름의 여론조사기관을 설립했다. 4·11총선 때 경기 성남중원 후보로 결정됐다 성추행 전력이 밝혀져 낙마한 윤원석 전 민중의 소리 대표가 이 당선자의 최측근이다. 이의엽 위원장은 이정희 대표 시절 민노당에서 정책위의장을 맡았다.

    차관급 관료로 일하는 민혁당 출신 인사의 증언이다.

    “민혁당 당원은 나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운동권 단체의 요로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석기 당선자가 민혁당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당원 100명이 횡적으로 연결돼 서로를 잘 몰랐다.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와 전국엽합 산하 경기동부연합은 인맥이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이 당선자가 경기동부연합에서 주류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경기동부연합은 이념 스펙트럼이 다채로운 곳이었다.”

    “이석기는 민혁당 넘버 투”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민혁당 사건을 알린 1999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또 다른 NL 출신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중하조직 성원은 소수의 민혁당원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몰랐다. 민혁당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적어도 수천 명에 달한다. 당원이 100명이면 그 아래 다수의 합법단체마다 세포가 있고 그 사람들이 핵심부의 지도를 받아 다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민혁당원 100명 중 25명가량이 전향한 것으로 파악된다. 나머지 75명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영옥은 공식 무대에서 사라졌다.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다. 이석기는 하영옥의 재건 민혁당에서 넘버 투였다.”

    자민통 그룹에 몸담았던 한 인사의 견해다.

    “하영옥의 현재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것을 두고 그가 아직도 지하당 활동을 한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핵심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북한식 조직의 특징이다. 자민통도 그랬다. 하영옥은 민혁당이 와해됐을 때 조직원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해 지하당을 재건한 인물이다. 지금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공개 조직에서 역할하고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전대협 조국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한 인사는 “하영옥이 막후의 실력자라고도 할 수 있고, 내부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려났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에서 경기동부라고 불리는 이들과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회 인사들은 이렇듯 교집합을 이룬다. 경기동부는 하영옥의 재건 민혁당 출신 인사와 외대 용인캠퍼스를 비롯한 경기 동남부의 학생운동 세력, 성남지역의 재야세력, 전국연합 산하 경기동부연합에 남은 NL세력이 이룬 네트워크를 진보진영 내부에서 가리키는 말이다.

    전국연합은 1997년 이후 사실상 해소됐다. 1991년 출범 당시 참여한 인사가 각자도생한 것. NL도 분화했다. 이인영 등 전대협 출신은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전대협을 막후에서 조종한 반미청년회 소속이던 안희정 충남도지사 같은 사람도 제도권으로 편입했다. 반미청년회 총책이던 조혁 씨는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 NL계 비합법 조직을 이끌던 한 인사의 설명이다.

    “1997년, 1998년께 전국연합이 사실상 와해된 후 NL이 PD가 꾸려놓은 진보정당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핵심 간부들은 각자 자기 길을 갔다. 정치권으로 간 사람도 있고, 생업에 전념하는 이들도 있고, 생각을 바꿔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시대가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급진적인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와해된 전국연합에서 중하부에 있던 이들이 코어(core·핵심)가 떠난 곳에서 주요 간부로 올라섰다. 1991~97년의 전국연합과 군자산의 약속을 내놓은 전국연합은 인적 구성은 물론이고 지도부 또한 다르다. 옛 민노당 당권파이던 경기동부니 울산연합이니 인천연합이니 하는 곳에 속한 인사들은 NL의 핵심 리더들이 각자도생한 뒤에도 오랫동안 생각을 바꾸지 않은 이들이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2004년 이후 민노당 당권을 장악했고, 현재 통합진보당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영옥의 민혁당 출신 중 전향하지 않은 이들은 2000년 무렵부터 진보정당에 참여했다. 그들은 주사파의 시초이던 김영환은 물론이고 안희정, 이인영, 조혁 등이 모두 건강한 길로 갔는데도 낡은 이념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PD는 사민주의나 서유럽 진보정당 모델로 스스로를 일신하지 않았는가.”

    전세 빼서 선거지로 집단 이사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이석기 국회의원 당선자가 2003년 6월 25일 교도소의 배려로 특별휴가를 받아 나와 생명이 위독한 어머니 김복순 씨와 만났다. 이 당선자는 2002년 5월 구속됐다.

    ‘신동아’는 하영옥 전 민혁당 중앙위원을 인터뷰하고자 그를 수소문했으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진보언론과도 인터뷰를 꺼려온 이석기 당선자 쪽으로도 연락을 취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하 전 중앙위원과 이 당선자가 이 기사와 관련해 이견(異見)을 피력해오면 ‘신동아’는 6월호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진보정당에 들어가기 시작한 NL은 민혁당 그룹이 2000년 이후 민노당에 입당한하면서 PD가 장악하던 조직을 하나둘 접수하기 시작했다. 당권 다툼 과정에서 위장전입, 당비 대납, 불법 지구당 창당 등이 일어났다. 이정희 대표의 여론조사 조작 시비 때 진보신당 쪽에서 “그쪽은 원래부터 그런 짓을 해왔다”는 반응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경기동부만 뭇매를 맞았으나 민노당 당권파를 과점했던 울산연합, 인천연합도 공히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 주사파 계열인 이들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했다. 일부 언론이 경기동부가 위장 전입으로 용산지구당 당권을 장악했다고 소개한 사건은 실제로는 인천연합이 저지른 것이다.

    한 PD 계열 인사의 설명이다.

    “용산지구당에선 벌어진 일은 위장전입보다 더 독한 것이었다. 거주지나 직장이 위치한 지역 외에는 당적을 옮기지 못하게 하자 인천연합 사람들이 전세를 빼서 용산구로 이사를 갔다. 한 집에 수십 명이 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이 지구당 당직을 독식했다. 2000년 총선 때는 울산연합이 세력 우위를 이용해 울산 북구 후보를 갈아치워버렸다. 최초의 국회의원을 낼 수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패배했다. 경기동부도 이러저런 편법으로 전국 곳곳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주사파가 2005년 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을 장악한 것도 민노당 내부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7대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후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일시적으로 20%에 육박하기도 했으나 정파 갈등은 민노당을 추락으로 이끌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2009년 내놓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민노당의 지배정파로서 자주파는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소수 의견을 무시 혹은 거부했는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사태를 빚게 했다. 민주노동당 분당(分黨) 사태는 지배정파의 비민주적이고 패권적인 행태가 당내의 민주적 토론과 의사 결정 구조를 훼손함으로써 당 활동가들과 당원을 축출해버린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이후 진보신당을 창당하는 데 힘을 모았던 것이다.”(한국 진보정당 운동사, 246쪽)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2008년 2월 3일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회 혁신안 중 일심회 사건 관련자 제명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비대위 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당대회장을 빠져 나가고 있다.

    조 교수는 민노당 정책위 부위원장,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을 지냈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2006년 북한 핵실험과 이른바 ‘일심회 사건’ 이후) 평등파 계열에 속하는 정파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정파 연합 구조를 유지하는 데 대한 회의가 집중적으로, 전면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당 내부에서 노선투쟁이 전개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우리 민족 제일주의’와 식민지 규정 등 지배정파로서 자주파의 노선과 세계관이 너무나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이라는 데 있었다.”(같은 책, 254쪽)

    2007년 민노당 대선후보 경선 때 자주파는 노회찬 당시 후보를 음해하는 동영상을 제작해 유포했다. 2008년 2월 임시전당대회에서 당권파가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을 상당한 표차로 부결시키면서 2008년 2월 민노당은 분당됐다.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는 민노당을 나가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자주파 계열의 헤게모니 그룹인 종북파가 자주파 전체를 장악하고 있고 또 시대착오적인 사태인식이 종북파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이 통과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같은 책, 263쪽)

    조 교수는 자주파의 종북·패권주의의 근원으로서 9월 테제를 꼽는다.

    “자주파, 특히 종북파에게 민노당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통일전선적 성격을 지닌 정당으로, 그것은 전략적 지위의 정당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통일전선적 성격의 전술 정당이기에 그들에게 민주노동당은 장악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고 당을 장악하면 종북파 노선의 패권주의적 관철이 우선시되었다. 즉 종북주의 때문에 패권주의가 나타는 것이다. 이들의 기본노선과 숙원사업은 2001년에 마련된 59쪽 분량의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이른바 9월 테제 문건에 잘 드러나 있다. 1930년대식 통일전선전술의 사고를 담고 있는 9월 테제의 내용은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정신을 자신의 길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종북파에 의해 포획된 자주파가 지역과 중앙의 당권을 위해 세팅 선거, 위장 전입, 집단적 주소 이전, 당비 대납, 대리투표, 흑색선전 등 다채로운 불법과 편법을 감행한 것, 북핵 문제에 대한 상식 이하의 태도나 이른바 ‘일심회 사건’, 코리아연방공화국 파동, 대선공약으로 ‘미군 철수 후 북핵 폐기 항목’을 슬그머니 끼워 넣기 등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9월 테제의 내용을 무리하게 현실화시키려는 데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같은 책, 265~267쪽)

    자주파 전체가 종북노선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종북파가 자주파를 장악하고, 자주파가 당권을 쥔 게 2004년 9월 이후의 민노당이라는 것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경기동부다. 조 교수의 언급에서 ‘전략적 지위의 정당’은 통일전선 전술을 원용하면 4월 11일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한 북한의 노동당 혹은 별도의 전위당이다.

    주사파가 진보정당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로 처음 결정한 때는 1997년 대선 무렵이다. 이후 진보정당 가입이 이어졌으나 2001년 9월 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조직적 참여가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군자산에서 강령을 결의한 후 종북파가 대대적으로 민노당에 입당한 것. 이들은 2004년 9월부터 당권파로 떠올랐다. 2005년엔 당 기관지인 ‘진보정치’ ‘이론과 실천’ 편집진을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체해버렸다. 2006년 민주노동당 당원 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일심회 사건 때 평등파가 이들의 제명 및 출당을 요구했으나 자주파는 오히려 이들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도왔다. 일심회 사건은 2008년 민노당 분당의 핵심이슈로 작용했다. 종북이란 단어가 일상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북한은 일심회에 보낸 지령문에서 민노당을 ‘민회사’로, 시민단체는 ‘연회사’로, 반미투쟁은 ‘수출’로, 김정일은 ‘사장님’으로 표기했다. 최기영 당시 민노당 사무부총장은 민노당 인사 300여 명의 성향을 분류해 북한에 보고했다. 주사파에 비판적인 일부 진보 인사가 북한을 ‘본사’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으로 지칭하는 것은 일심회 사건을 거치면서다.

    주사파 민노당 장악 사건

    통합진보당은 4·11총선을 거치면서 옛 민노당 당권파 탓에 시끄러웠다. 서울 관악을 여론조사 연령대 조작 문자 파동, 비례대표 선출 현장투표, 온라인투표를 합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의혹, 청년 비례대표 선출 시 투표관리자가 데이터 저장 프로그램을 변경했다는 주장이 불거져 나왔다. 2월 말 유시민 공동대표가 나흘간 당무를 거부한 것도 민노당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는 게 통합진보당 한 인사의 설명이다.

    경기동부의 조직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진보신당의 한 당원은 지난해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이 당선한 4·27 재·보궐선거 때 분당에서 겪은 경험담을 장문의 글로 내부에 전했다.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남 ○○○ 사무실을 어렵게 찾아갔는데 입구에서부터 충격적이었습니다. ‘2012년 집권을 준비하자!’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경기동부구나 하는 충격이 와 닿았습니다. 자신들을 집권의 주체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가장 싫어하고 배척하는 조직이지만 그들의 활동만큼은 매우 존경스러웠습니다. 경기동부는 비록 우리는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진보신당은 자신의 정체성조차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지향이 있으며 그것 때문에 혼란을 겪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전국적 활동망이 부러웠습니다. 일요일에도 거기서 잠을 청하게 됐는데 성남 활동가의 일부는 성남시의회 항의 농성장에 결합하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멀리 전남 순천(국회 본회의장 최루탄 투척으로 유명한 김선동 의원이 4·27 재·보궐선거 때 당선했다)으로 선거 지원을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사업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전국을 포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진보신당은 절대로 경기동부를 이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중앙일보’가 보도한 ‘야권연대 관련 현황’이란 제목의 문건은 통합진보당의 현 구도를 잘 설명하고 있다. 문건은 통합진보당 정파를 ▶범경기동부연합(당권파와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연합당권파) ▶인천연합(전국농민회 포함) ▶범울산연합 ▶좌파(심상정+노회찬, 500명 내외 불과) ▶참여당(진성당원 수는 최대이나 지역단위로 미편제)으로 분류했다. ‘통합진보당 내부현황’이란 대목에선 ‘유시민 공동대표의 당무거부 시 비공식 첫 번째 조건이 (경기동부연합) 장원섭 사무총장 사퇴, 이에 장 총장은 총장직은 유지하되 광주 광산갑에 조기 낙향하는 것으로 정리됨’ ‘(야권연대 협상대표이자 경기동부연합 소속 이의엽 정책위의장이) 협상 내용을 자파 이외에는 전혀 공유하지 않아 타 정파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적었다. 심상정·노회찬 당선자는 지난해 말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진보당에 참여했다.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통합진보당 내부현황

    이정희 대표가 물러난 서울 관악을에서는 이상규 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이 당선했다. 진중권 교수는 “이정희가 얼굴이라면, 이상규는 몸통’이라고 했다. 이 당선자는 전국연합 산하 경기동부연합이나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와 무관하다. 경기 동부지역에서 지역운동을 한 적도 없다. 그는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조직은 없다. 그 이야기가 뭐 아주 옛날 90년대에 전국연합이라고 하는 전국적인 연대단체가 있었는데, 그중 일개 지역조직, 그것을 가지고 계속 부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그의 설명 자체는 거짓말은 아니다.

    이정희 대표의 남편인 심재환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경기동부연합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연대체이며 10여 년 전에 해산된, 90년대에 활동하던 민주재야단체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단체를 만들어 색깔론을 제기하는 것은 이미 언론이길 포기한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조직인 것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91년경으로 알고 있다. 그때 전국연합이라는 진보적 운동단체가 결성됐고, 그 하부조직으로 지역조직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지역조직의 하나로 결성돼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국연합은 2001년경에 6·15 공동선언 이후 정세가 바뀌면서 통일연대, 민중연대라는 진보적 운동단체가 새로 생기면서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안다. 그렇게 이름만 유지하다가 2007년에 공식적으로 해산했다”고 말했다.

    심 변호사의 설명 역시 사실에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이 설명은 빌 클린턴의 그것을 닮았다.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클린턴은 “나는 그녀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클린턴은 구강성교를 했다.

    경기동부는 보수 일간지가 보도한 것처럼 전국연합 산하 경기동부연합과 오롯이 연결되지 않을뿐더러 경기 동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이가 많지만 특정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조직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재건 민혁당 출신 인사들과 외대 용인캠퍼스 일대의 학생운동, 성남·용인 지역의 활동가, 마지막 남은 종북파가 전국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이다.

    이석기 당선자는 진보세력이나 통합진보당 내부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비례대표 일반명부 투표 1위를 했다. 투표 전부터 그가 1위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통합진보당 당선자의 상당수가 경기동부 네트워크에 속했거나 자주파와 가까운 인사다. 윤원석 전 대표를 대신해 출마해 국회에 진입한 성남시 시의원 출신의 김미희 당선자(성남 중원), 이정희 대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한 이상규 당선자도 이 네트워크에 연결된다.

    청년 몫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입한 통합진보당 김재연 당선자는 해군을 해적으로 지칭해 물의를 일으킨 김지윤 씨를 당내 선거에서 예상과 다르게 압도적 표차로 제쳤다. 경기동부가 조직력을 발휘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지윤 씨는 PD계열인 ‘다함께’ 소속이다. 다함께는 PD면서도 NL쪽과의 친분도 두터운 모습을 보이는데, 심상정 노회찬 당선자보다는 1980~90년대의 PD와 닮은 조직이다. 반면 김재연 당선자는 경기동부 네트워크의 적자(嫡子)로 불린다. 그는 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용인캠퍼스, 서울캠퍼스를 망라한 외대 출신이 경기동부 핵심부의 주류를 이룬다. ‘민중의 소리’ 여기자 성추행 전력으로 사퇴한 윤원석 전 대표, 이석기 당선자, 이용대 전 민노당 정책위의장이 외대 출신이다. 우위영 통합진보당 대변인도 외대를 나왔다.

    김일성주의 신봉한 하영옥 그룹이 경기동부 핵심

    야권연대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새누리당보다 다채롭다. 한명숙 전 민주통합당 대표가 4월 1일 경기 고양시에서 이정희·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와 함께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보수진영 일각에선 주사파가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을 장악하려고 한다고 우려한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를 비롯한 극우에 가까운 인사가 이런 견해를 표명한다.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주사파가 통합진보당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심상정, 노회찬 같은 인사가 버티고 서 있는데다 리버럴한 국민참여당 세력의 힘도 만만찮다. 이정희 대표는 경기동부의 지원으로 민노당 대표에 올랐으나 하영옥, 이석기 같은 민혁당 출신 인물과는 결이 다르다. 그들보다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다만 이 대표의 남편인 심재환 변호사는 부인보다는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경기동부가 수령론을 버린 지 오래고, 인간중심 사상을 비롯한 주체철학의 일부만 고수한다는 평가가 진보진영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더 우세하다. 서구 정당 역사에서 급진 세력이 제도권으로 편입한 뒤 우경화한 것도 경기동부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일성주의자

    NL계열 출신인 하태경 국회의원 당선자(부산 해운대기장을)는 총선이 끝난 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석기 당선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석기가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와 함께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NLPDR)에 나선 오래전 동지다. 유권자를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이석기는 지금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석명(釋明)해야 한다.”

    마음속 양심이 품은 생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파쇼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 당선자는 공인이다. 국회의원이면서 입법기관이다. 자신의 지향과 정책을 밝히는 게 마땅하다. 공직에 진출한 김일성주의자이던 사람에게 김일성을 지금도 추종하느냐고 묻는 것은 색깔론이 아니다. 야권의 일각을 형성한 마지막 주사파는 대선 국면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직도 김일성주의를 고수한다면 제도권 정치를 떠나는 게 옳다. 경기동부는 자신들의 지향, 가치를 12월에 열리는 대선 전에 석명해야 한다. 그게 야권연대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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