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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위대한 악녀 도금봉

욕망 앞에 당당한 새로운 여성의 시작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위대한 악녀 도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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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악녀 도금봉

생전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 도금봉.

그러나 또순이 도금봉은 달랐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무능력한 이대엽이 세차를 하러 한강가로 차를 몰고 가며 “이 추운 겨울에 세차를 어떻게 하나” 투덜대자, 또순이는 자신이 세차할 테니 돈을 달라며 한겨울 한강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들어가 마이크로버스를 닦는다. 한심한 이대엽은 처음에는 이 추운 겨울에 물을 안 묻히게 돼 다행이라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도금봉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 아주 약간 숙연해진다. 물론 도금봉을 돕는 식의 사내답지 못한 행동은 절대 안 한다. 일확천금에 눈이 먼 이대엽이 사기를 당하자 도금봉은 기지를 발휘해 사기꾼을 속여 넘기고, 사기꾼에게 “여간내기가 아니다. 졌다”는 항복 선언을 얻어내고야 만다. 그뿐 아니다. 무능력하고 포기가 빠른 이대엽을 부추겨 일을 하도록 만들고 급기야 새나라 택시를 모는 당시 최고의 직업을 가진 남자로 만든다. 남성을 성공의 길로 인도하고 격려하는 여자 또순이는 성실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속의 여성상을 한번에 바꿔놓았다. 최은희가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시대에서 번민하고 갈등하지만 윤리적 결단에 의해 욕망을 억누르는 여자였다면, 김지미는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남자들과 원하지 않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괴로워하다 결국 남자로부터 벗어나 혼자 살아가려는 여성을 연기했다. 그러나 도금봉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고, 심지어 변변치 않은 남성을 수족처럼 부려 자수성가하는 독립적이고 기가 센 여자를 연기해낸다. 당시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된 이 영화는 근대화의 출발선에 선 아시아 여성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찬사와 함께 도금봉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때 도금봉은 모두가 사랑할만한 현명하고 성실한 조국 근대화의 일꾼으로서의 여성상이었다. 그녀의 새 출발은 이렇듯 대단했다.

1965년 여름, 평론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말이 좀 안 되는 한국 최초의 본격 공포영화를 보러 극장에 몰려들었다. 영화 제목은 ‘살인마’(이용민 감독). 주연은 도금봉. 귀신이 된 도금봉의 무시무시한 복수극이었다. 이듬해 여름. 또다시 도금봉을 주연으로 한 공포영화가 등장한다. 평론가들은 여전히 질 떨어지는 이 공포영화에 관객들이 몰려드는 것에 탄식하지만,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목 없는 미녀’(이용민 감독). 전편에 이어 여전히 말이 안 되는 이 영화에서 도금봉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원한에 사무쳐 자신을 억울하게 살해한 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두 편의 공포영화에서 도금봉은 사랑받지 못한 여자였다. 돈에 눈먼 남자들에게, 비겁하고 치사한 남자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여자였다. ‘또순이’에서 강인하고 성실한 활력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두루 사랑받고 존경받는 캐릭터였던 여자가 공포영화에서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원한에 찬 여자 캐릭터로 변한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1967년, 도금봉이 출연한 세 편의 영화가 공개된다.‘치맛바람’(이규웅 감독)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감독) ‘산불(김수용 감독)’이 그것이다. ‘치맛바람’은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지만 재미도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허장강이 안방에 앉아 구부정하게 몸을 기울이고 구멍 난 양말을 깁고 있다. 항상 악역만 하던 그가 박봉의 월급쟁이로 출연한 것.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에 지쳐 있는 허장강에게 대학까지 보내놓았지만 룸펜이 된 동생 김순철이 용돈을 달라며 철없는 억지를 부린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아버지 김희갑이 슬그머니 들어와 허장강에게 용돈 타령을 한다. 한숨만 나오는 허장강. 설상가상, 허장강의 중학생 아들과 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월사금, 용돈, 참고서 값을 줄줄이 외며 그의 주름을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아버지, 동생의 목소리가 높아져 방 밖으로 나가려 하자, 왈칵 문이 열리며 아내 김지미가 핏대를 세우고 들어와 허장강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당신이 벌어오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못 버틴다. 파산이다! 내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 찍소리 못하는 남자들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보고 김지미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치장한 뒤 집을 나선다. 사람들이 “김지미의 저렇게 무서운 모습은 처음이야” 하며 감탄할 때 그녀는 선배 언니를 찾아간다. 바로 바로 도금봉. 계주이며 결혼에 실패한 여자.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돈을 융통해 이자놀이를 하고 계를 꾸리며 나름 성공해 이 바닥에서는 소문이 짜르르한 기 센 여자다. 천하의 김지미도 도금봉 앞에서는 언제 허장강 앞에서 큰소리 쳤나 싶게 고양이 앞에 쥐요. 사자 굴 안의 여우다. 계원 중 하나가 조카가 승진에 실패했다고 하자, 그 회사가 어디냐, 당장 쳐들어가자며 벌떡 일어나 치맛자락을 바짝 당겨 잡고 문을 열어젖히는 도금봉과 그녀의 계원들. 도금봉이 찾아간 곳은 살살이 서영춘이 전무로 근무하는 회사. 다짜고짜 조카가 승진을 못할 경우 서영춘이 빌려간 돈을 갚을 여유를 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모르는 서영춘의 비밀을 까발리겠다며 사무실에 드러눕는 도금봉. “얘들아 눕자!” 한마디에 계원들은 일치단결 사무실 바닥에 누워 서영춘을 곤란하게 한다. 김지미가 계원이 돼 돈 좀 벌어보겠다고 하자 도금봉은 가족 교육이 먼저라며 김지미의 집으로 계원들을 이끌고 쳐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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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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