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영화 ‘300’과 스파르타의 ‘쌩얼’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3/4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도. 스파르타와 아르고스는 그리스 내의 도시국가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했고, 아테네보다도 가까운 거리였다.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480년대부터 420년대까지 살았다. 참고로 공자(孔子)는 73세까지 살았고, 그의 생존 연대는 기원전 551~479년이다. 맹자(孟子)는 84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생몰연도는 기원전 372~289년 설이 유력하다. 그러므로 헤로도투스는 대략 공자와 맹자 사이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소아시아 남부 할리카르낫소스(현 터키) 지방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오니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 숙부 파니앗시스가 서사 시인이었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리그다미스 왕대에 이르러 독재자 타도를 목표로 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파니앗시스가 목숨을 잃었고, 헤로도투스는 사모스 섬으로 망명했다. 당시 체재 기간이 상당히 길었는데, 여기서 ‘역사’ 3권을 저술했다. 이 경험도 사마천과 비슷하다.

기원전 450년경 리그다미스 왕이 타도되고 민주정이 성립되었는데 헤로도투스도 뭔가 이 혁명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료는 없다. 귀양살이에서 귀국한 뒤, 기원전 444년경 1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여행을 갔고 아테네에 매우 오래 체류하면서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과 교유했다. 페리클레스 치하에서 아테네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므로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계획한 남이탈리아 투리오이 식민지 건설에 참여한다. 그의 여행 거리는 동쪽으로는 바빌론/수사,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바르케, 남쪽으로는 나일 상류의 시에네(현 아스완), 북쪽으로는 흑해 북안의 그리스 식민도시인 오르비아를 중심으로 크리미아 반도, 우크라이나 남부 주변에 이른다. 이 역시 사마천이 세 번에 걸쳐 중국 양쯔강 등 남부 지역, 제나라 등 중부 지역, 쓰촨 지방 등 서남 지역을 답사했던 경험에 비견될 수 있다.

‘역사’는 총 9권이다. 헤로도투스는 1권 첫머리에서, “이 책은 할리카르낫소르 출신의 헤로도투스가 인간 세계의 사건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 특히 양자가 어떠한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해, 스스로 연구, 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헤로도투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저서 ‘역사’는 지중해 지역의 세계사로 보는 편이 타당하며, ‘역사’의 내용을 페르시아 전쟁으로 환원시켜 읽는 것은 무례한 일로 보인다. 우선 당시 지중해 지역을 ‘유럽 대 중동’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중국의 전국시대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실상에 부합할 것이다.

그는 “크든 작든 관계없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도시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술하면서 이야기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일찍이 강대했던 나라 대부분이 오늘날에는 약소국이 되었고, 우리 시대에 강대하게 된 나라도 전에는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운이 결코 오래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국도 소국도 똑같이 다루면서 서술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배경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 신비주의, 오만, 무력, 노예, 짐승, 괴물 등으로 표상되는 동양의 또 다른 모습이다.

처음부터 헤로도투스가 스파르타와 아르고스의 전투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거기에는 다른 배경이 있었다. 터키 지역에 리디아라는 왕국이 있었는데 원래 헤라클레스 가(家)에 있던 주권이 메름나스 가라 불리는 크로이소스 가문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크로이소스는 세력이 점점 커지는 페르시아와 그 왕 키로스를 경계하면서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으려 했고 동시에 페르시아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키로스는 크로이소스의 전략이 어긋난 틈을 이용해 사르디스로 진격해 크로이소스를 사로잡으라고 명했다. 전초전은 키로스의 승리였다. 키로스가 낙타 군대로 하여금 기병에 대항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말이란 낙타를 두려워해 그 모습을 보거나 그 냄새를 맡기만 해도 견디지 못한다. 키로스는 이 점에 착안해 크로이소스가 눈부신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했던 기병대를 무력화했다.

이런 전략 때문에 크로이소스는 사르디스에서 키로스 군에게 포위됐다. 크로이소스는 동맹군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 전쟁 중이었다. 그 전쟁이 바로 300 대 300으로 싸우고도 모자라, 한판 더 싸웠던 그 우스운 전투였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대립을 서술할 때 첨부했던 스파르타와 아르고스 전투, 여기서 헤로도투스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어떤 메시지였을까? 말 그대로 사실을 전해주는 것뿐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잔인한 어리석음을 덤덤한 척 말해준 것이었을까?

3/4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목록 닫기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댓글 창 닫기

2023/0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