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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④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싸움

  • 김민경| 전략기획팀 기자 holden@donga.com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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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창업자 구치오 구치가 사망하면서, 그는 구찌를 네 아들에게 맡긴다. 둘째 아들 알도가 해외시장을 개척했고, 넷째 로돌포는 새로운 제품으로 사세를 키웠다. 한동안 구찌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형제간의 다툼이 재발했다. 특히 알도의 두 아들은 무분별한 라이선스 사업을 통해 구찌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아버지를 탈세 혐의로 고발해 감옥으로 보냈다. 경영권을 얻은 로돌포의 아들 마우리치오는 우여곡절 끝에 투자사에 모든 지분을 빼앗기고 전 부인이 보낸 청부업자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된다. 전 부인은 사치와 방탕으로 구찌 몰락에 속도를 붙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웃느니 롤스로이스를 타고 울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구찌는 만신창이가 됐다. 1980년대에 구찌 이름을 붙인 상품이 2만 2000개에 달했다고 하니 명품은커녕 싸구려 라이선스의 실패 사례가 된 것이다.

구찌를 구한 두 천재, 도미니코 드 솔레와 톰 포드

구찌가 오늘날의 구찌가 된 건 1994년 도미니코 드 솔레와 톰 포드라는 두 명의 탁월한 천재가 영입된 덕이다. 도미니코 드 솔레는 하버드대를 나와 구찌의 미국 지사장을 맡고 있었고, 배우 겸 모델이던 톰 포드는 인테리어업과 의류업을 거친 스물아홉 살의 디자이너였다. 섹시하고 매력적이어서 매스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톰 포드는 구찌의 유산을 모던하게 해석한 제품들을 내놓았다. 그가 구찌에 온 첫날 디자인한 제품이 대나무 손잡이를 붙인 배낭이었다. 톰 포드의 구찌를 보고 전문가들은 ‘이것은 구찌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톰 포드는 ‘나는 구찌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비자는 새로운 구찌에 열광했다. 구찌는 매 시즌 트렌드를 창조했다.

도미니코 드 솔레는 구찌의 가격을 30% 정도 낮춰 루이비통과 경쟁했다. 또한 라이선스를 거둬들여 명품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 결과 파산 직전이던 구찌는 2년 만에 매출이 3배로 늘었고,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했으며, 다시 2년 뒤인 1998년에는 ‘올해의 유럽기업’에 선정됐다.



그보다 앞서 명품이 어떻게 ‘산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브랜드는 루이비통이었다. 전쟁 후 루이비통은 트위기 같은 모델을 위한 가방을 만드는 등 일종의 스타 마케팅도 도입했지만 1980년대까지는 어디까지나 전통 있는 장인 가족 기업으로 조용히 명성을 이어갔다. 즉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있음이 뚜렷했다. 루이비통가의 사위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앙리 라카미에는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선 제작보다 유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중간상을 없애고, 일본에 매장을 내고, 대중적인 가죽 제품을 내놨다.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귀족스포츠인 요트 대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구찌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키운 도미니코 드 솔레(왼쪽)와 톰 포드.

라카미에가 경영을 맡은 지 7년 만에 수익은 30배나 늘어났다. 1986년 그는 루이비통을 주류 회사인 모에 에네시와 합병하고 지방시도 사들여 당시 프랑스 상장 기업 중 6위에 해당하는 LVMH그룹을 탄생시켰다.

LVMH 부회장이 된 라카미에는 회장과의 주도권 갈등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베르나르 아르노가 럭셔리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현재 LVMH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는 총자산 411억 달러를 보유한 유럽 1위, 세계 4위의 갑부다(2011,). 당시 그는 크리스찬 디오르와 셀린느를 인수한 참이었다. 아르노 회장은 라카미에의 상황을 알게 되자 그의 라이벌, 즉 LVMH 회장을 만나 주식을 인수하기로 한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회장과 부회장의 갈등을 이용해 아르노 회장이 주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LVMH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1년 넘는 살벌한 법정 다툼과 치사한 언론 플레이를 통해 아르노 대 라카미에의 싸움이 계속됐고, 1990년 법원이 아르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프랑스 역사상 가장 적대적인 기업 인수 사건이 마무리됐다.

“럭셔리한 수익률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은 럭셔리 산업뿐”이라고 생각한 아르노 회장은 끊임없이 명품 브랜드들을 인수했다. 구제불능이라고 포기했던 구찌가 톰 포드와 데 솔레에 의해 반짝반짝 빛이 나자, 그의 야심도 다시 불붙었다. 구찌와 루이비통의 ‘핸드백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르노 회장은 처음엔 비밀리에, 그리고 나중엔 공공연히 구찌의 주식을 매집했다.

1999년 구찌는 거의 그의 손에 들어간 듯싶었다. 그러나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반전이 일어났다. 크리스티 경매, 프랭탕 백화점, 의류업체 르두트 등을 소유한 PPR그룹이 구찌 주식 40%를 매입해 구찌그룹을 형성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톰 포드와 데 솔레가 아르노 회장이 내겠다는 가격보다 훨씬 싸게 PPR에 주식을 넘긴 것이 알려졌다. 톰 포드와 데 솔레가 아르노 회장에 대해 가진 불신과 반발은 그만큼 컸다. 이어 PPR은 이브생로랑, 발렌시아가, 보테가 베네타, 부쉐롱 등 전통 있는 하우스와 알렉산더 매퀸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을 보태 LVMH에 맞서는 글로벌 패션그룹으로 세를 불렸다(톰 포드와 데 솔레는 그 뒤에 구찌를 떠났다).

20세기 명품의 역사는 아르노 회장 전과 후로 나뉜다. 아르노 회장 이전의 명품은 장인들이 전통을 이어가는 가족적 공방이었다. ‘한 땀 한 땀’ 제작이 사업의 본질이었고, 장인과의 의리, 고객들과의 신뢰가 돈보다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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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전략기획팀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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