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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⑫

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 그의 ‘영원한 그림자’ 뒤 프레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 그의 ‘영원한 그림자’ 뒤 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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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 그의 ‘영원한 그림자’ 뒤 프레

자클린 뒤 프레.



그러나 짧은 행복이었다. 뒤 프레는 1971년부터 자주 쓰러졌고, 기억력은 급격히 감퇴했다. 악보가 겹쳐서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중추신경계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그의 근육감각은 서서히 마비되어갔다. 1973년 3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첼로 활을 잡을 수 없게 된 후에는 후학을 양성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날로 병세는 악화됐고 걷는 데도 어려움을 느꼈다.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다가, 나중에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도 얼굴을 돌리지도 못했다. 언어능력도 떨어져 말하는 데도 힘들어했다. 오로지 자신의 음반을 들으며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은 곁에 없었다. 그의 남편은 아내가 병마와 싸우는 사이에 러시아 출신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1958~)와 동거하며 두 아이를 낳았지만, 이 사실을 숨긴 채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눈물겨운 오랜 투병생활 끝에 뒤 프레가 42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자 비난의 화살은 남편 바렌보임에게로 날아들었다.

“예술작품, 정치적 해석은 옳지 않다”

바렌보임은 나치의 공포를 피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한 러시아 유대계 집안에서 1942년에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이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사사한 바렌보임은 뒤 프레처럼 어린 나이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이미 7세 때 무대에 선 바렌보임은 그의 가족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자 장학금을 받고 홀로 유럽을 돌면서 대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후일 그가 “인생의 9년간은 아르헨티나에서 보내고, 나머지 인생은 다른 곳을 떠돌았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떠돌이인생은 10세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스페인 국적과 함께 팔레스타인 시민증도 가지고 있다.



철학 문학 등 인문학에 조예가 깊고 날카로운 평론가답게 이성적이며 때로는 독설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미 특유의 열정과 유희는 그의 음악을 통해서 나타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르헨티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케스트라와 펼치는 정기 공연에는 국민적 음악이 된 탱고를 수만 명 관객에게 선사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조국을 빛낸 대표적인 음악가로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 못지않은 환영을 받고 있다.

1954년 여름, 어린 바렌보임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도착한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지휘자의 꿈을 마음속에 새긴 뒤였다. 우연한 기회에 바렌보임이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본 푸르트벵글러는 “11세 나이에는 가질 수 없는 연주 실력을 가졌다”며 극찬했다. 그는 즉시 베를린필하모닉과 협연하도록 어린 바렌보임을 초청했다. 무죄로 밝혀졌지만,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공적 활동이 2년간 금지된 푸르트벵글러의 제안에 바렌보임의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사이 푸르트벵글러는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강렬했던 푸르트벵글러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바렌보임의 지휘에는 낭만주의자 푸르트벵글러가 가지고 있던 강하고 빛나는 역동적인 선율의 움직임과 인간의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은은한 음색이 그대로 배어 있다. 바렌보임은 로마, 파리, 빈, 잘츠부르크 등 유수의 음악도시에서 연주 활동과 ‘마스터 코스’를 통한 사사를 병행하면서 피아노뿐 아니라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다. 화려한 기교와 능숙한 테크닉에 의존한 수동적인 연주가 아니라 지휘봉을 내젓는 순간 음향에 시적인 영감까지 불어넣었다.

1975년 파리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가 되어 고전과 낭만, 현대음악을 섭렵하면서 14년간 역량을 마음껏 펼쳤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즉시 베를린으로 날아가 3일 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이는 동베를린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환희의 진실을 알려주는 특별한 음악회였고, 세계인에게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와 함께 베를린 동쪽에 위치한 오페라극장 예술감독을 맡게 된다. 1990년대에는 독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했다. 독일 낭만음악의 서정적이면서도 중후한 매력을 세련되고도 여유롭게 표현하며 느린 템포로 시작해 정점을 향해 점차 고조되는 음악을 힘 있고 격정적으로 연주했다. 그는 독일 낭만주의, 그중 특히 바그너 음악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올라섰다.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원흉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의 추종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저술과 강연, 인터뷰를 통해 “예술작품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고 꾸준히 주장했다. 결국 바렌보임은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1년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방문한 바렌보임은 슈만과 스트라빈스키 음악을 연주하고는 앙코르 곡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서곡을 연주했다. 바그너 곡을 연주하기 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앙코르 곡을 듣기 싫은 관객은 나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가 홀로코스트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앞서 바렌보임은 1999년 중동의 평화와 화해를 제시하며 이스라엘과 아랍 음악인들이 모인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디반 오케스트라를 창단할 때 아랍 국가에서만 200명이 넘는 연주자가 오디션에 몰렸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성취를 이루면서 2002년에 스페인의 세비야로 오케스트라 본거지를 옮겼다. 세비야는 7세기 동안 유대인과 무슬림이 평화롭게 살았던 상징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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