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3/4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옛 전차와 어느 가족.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바뀐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강북 중심부에서 강남으로 가려면 시청 앞 광장을 지나 소공동 거리를 지나 3호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이 길을 지나갈 때면 내 눈에 익숙한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시청 앞을 지나 소공동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플라자호텔이 있고 왼쪽에는 조선호텔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반갑게 하는 것은 조선호텔을 지나 한국은행에 도달하기 전에 길 오른쪽 건물의 넓은 벽에 붙어 있는, 현대식 전광판이 아닌 재래식 광고판이다. 1980년대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광고판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옛날의 광고문구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문구 밑에는 항공사 여승무원이 아름답게 미소 짓는 모습이 있다. 아마도 모델이 된 승무원은 그동안 몇 번에 걸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미소를 띠고 있는 여승무원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풍경#41 모나미 볼펜

대형서점에 부속된 문방구 코너에 가보면 편리한 도구가 많이 나와 있다. 스티커 포스트잇, 형광펜, 서류 분류함, 스테이플러, 그리고 색깔과 굵기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필기도구가 즐비하게 전시돼 있다. 거의 모든 것이 다 새로운 것들이지만 그곳에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모나미 볼펜을 발견했다. 1960년대에 내가 쓰던 모나미 볼펜과 똑같이 볼펜의 몸통은 흰색이고 볼펜의 아래쪽과 볼펜심을 움직이는 스위치 부분은 검은색이다. 볼펜의 몸통 위에는 ‘Monami 153 0.7’이라는 검은색 글자와 숫자가 박혀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몽당연필을 모나미 볼펜의 몸통에 끼워 쓰기도 했다. 모나미는 프랑스어로 내 친구란 뜻인데 불어로 표기하자면 ‘mon’과 ‘ami’를 띄어 써야 한다. 아마도 모나미는 내가 가장 처음 접한 프랑스어 어휘일 것이다. 문방구에는 내가 초등학교 때 쓰던 문화연필도 그대로 있다. 그런데 연필 몸통에 칠한 색상과 디자인은 달라져 있다.

풍경#42 효의 가치



프랑스의 모든 학교와 관공서 건물 입구에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새겨져 있다. 193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학교 교실 뒷면에는 충(忠)과 효(孝)라는 글자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1990년대 어느 대학 총장은 효(孝)라는 가치를 세계로 수출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012년 7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효(孝)를 바탕으로 윤리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이라는 어느 기업의 광고 문구가 보였다. 며칠 후 택시를 타고 가는데 거리의 작은 공원 입구에 ‘효(孝)공원’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이 보였다.

자유, 평등, 박애가 혈연과 지연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라면 효는 혈연으로 맺어진 자기 부모에 대한 가족주의적 의무다. 효를 근본가치로 내세우는 사회에서 윗사람은 단지 군림하고 지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보살피고 자애를 베푼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상하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따뜻한 정은 있을지 모르지만 효를 내세운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관계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국가의 통치철학으로 삼은 이후 효라는 가치는 거의 7세기 동안 한국인의 가족생활을 지배하고 사회생활을 규제했다. 오늘날 가족관계에서만 보자면 효라는 가치의 규제력은 상당히 느슨해진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했고,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그럼에도 효라는 가치를 대신할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충분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파리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평등한 성인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아직도 나이 차이가 인간관계를 상하관계로 만든다. 물론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지만 지속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면 나이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약해졌지만 형님의 권위는 여전하다.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유교의 장점을 재평가하려는 지적 운동이 활발하다. 그러나 유교의 근본이라는 효의 가치 안에 들어 있는 수직적 인간관계를 청산하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유교적 가치의 복원은 권위주의적 가치로의 회귀로 끝날 수 있다.

풍경#43 에너지 절약 구호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일수록 구호와 광고가 많다. 서울 거리를 걷다보면 화려하게 번쩍이는 광고들, 지하철 연결통로와 객차 안, 거리의 전광판에서 TV 화면을 거쳐 컴퓨터 화면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광고 이미지와 광고문구가 난무한다.

최근에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어’라는 제목의 지적 자서전을 펴낸 미국 보스턴대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1970년대 자동차를 타고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등 동유럽 사회를 돌아보고 난 다음 서유럽 국가들을 순방했다. 그는 두 사회를 비교하면서 동유럽 공산권 사회에는 공적 장소에서 정치적 구호가 많이 보였는데 서유럽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오니 도처에 상품광고가 널려 있다고 말했다.

3/4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연재

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더보기
목록 닫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댓글 창 닫기

2023/0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