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 본체도 재설계해 공기저항을 줄였다. 본체는 강도 높은 허니콤 구조의 알루미늄 재질을 선택했다. 컴퓨터 설계기술이 없어 수동식 계산기에 의존해 설계해야 했다. 연구자들은 수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고된 정신노동을 반복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카파로켓은 고도 100km에 다다를 수 없었다. 이토카와 팀은 로켓을 기구에 매달아 하늘 높이 띄운 후 창공에서 점화하는 ‘라쿤’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창공에는 돌풍 등 통제할 수 없는 숱한 변수가 있어 포기했다.
결국 추진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고도를 높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카파-4형까지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를 사용했는데 이것 대신 새로운 복합추진제를 개발해 사용해보기로 했다. 복합추진제는 고분자화합물에 과염소산 암모니아를 혼합해 로켓연료실에 수납하는 것으로 무연화약보다 더 큰 추력을 얻을 수 있다.
복합추진제는 우주 개발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막 개발한 것이었기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연구진은 폭발을 불러오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끈질기게 연구해 복합추진제를 사용하는 카파-6형을 만들었다. 카파-6형은 고도 60km 정도까지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승으로도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요구한 상층 대기 관측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일본은 한숨을 돌렸다.
그때 고도 60km까지 로켓을 올린 나라는 미국과 소련 영국 그리고 일본뿐이었다. 카파-6형은 21기가 발사되었다. 1960년 7월, 카파-8형이 처음으로 고도 200km를 넘어 전리층의 F층에 도달했다. 본격적인 우주 관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자, 세계가 일본의 우주 개발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일본은 카파로켓 19기를 유고슬라비아와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게 되었다.
카파로켓, 대기권 넘어서다

일본 우주 개발의 아버지 이토카와 교수.
빈약한 발사장에서 도달고도를 높인 로켓을 시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사고가 입증해주었다. 1962년 5월 24일 카파로켓-8형 10호가 발사 직후 추락해 2단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흩어지고 화재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미치카와에서의 실험은 중지되고 말았다.
이토카와 팀은 펜슬로켓 발사 성공 후부터 태평양을 향해 로켓을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새로운 로켓의 메카로 가고시마(鹿兒島)현 오스미(大隅)반도의 우치노우라(內之浦)가 선정돼, 카파로켓-8형 10호가 사고를 내기 전인 2월 2일 기공식을 했다. 미치카와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발사장으로 선정된 우치노우라는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폭적인 지원을 해 발사장 이전 작업이 빨라졌다.
우주 개발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다양한 기관이 탄생했다. 1963년 과학기술청이 항공우주기술연구소(NAL·National Aerospace Laboratory)를 설치해 기초연구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청은 1964년 우주와 관련된 항공기술만 연구하는 우주 개발추진본부도 만들었다. 로켓 개발을 주도하던 도쿄대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1964년 생기연의 이토카와 팀과 항공연구소가 합병해 우주항공연구소(ISAS·Institute of Space and Aeronautical Science)를 출범시킨 것이다.
정부의 우주 개발 참여 이끌어내
로켓의 시대도 바뀌고 있었다. 29개종이 개발된 카파로켓 시대는 종료하고 람다(Lambda)로켓 시대가 열렸다. 람다로켓은 2000km 고도 도달을 목표로 했기에 위성을 올리는 초보적인 플랫폼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4단으로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단이 너무 많다 보니 단 분리에 문제가 있어, 람다는 4차례나 발사에 실패했다. 단 분리를 한 다음에는 궤도를 수정해야 하는데, 궤도를 수정하는 유도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