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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대선

최태민 사위 Mr.Q 정윤회 “박근혜 막후인물설 추적”

  • 허만섭 기자 | mshue@donga.com

최태민 사위 Mr.Q 정윤회 “박근혜 막후인물설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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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가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뒤 총재로 취임하자 정 씨는 총재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 정치권 사정을 잘 아는 다른 관계자는 당시 정 씨의 영향력이 컸다고 회상했다.

“한국미래연합 창당 자금을 대어온 모 씨가 당무에 자주 간섭했다고 한다. 무리한 측면이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정윤회 실장이 그를 제지했다. 격분한 모 씨가 정 실장을 제외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모 씨는 자금을 회수해 가버렸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는 “당시 정 실장이 박근혜 의원 곁에서 창당 작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여러 사람은 정윤회 씨가 박근혜 의원의 비서실장일 때도 은인자중(隱忍自重)해왔다고 말한다. 다음은 A씨의 설명이다.

“나, 요양 가야 할 것 같다”



“정윤회 실장은 의원실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도 소수의 사람과만 친하게 지냈다. 이들에게도 자신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 학력, 심지어 나이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술을 마시다 내가 궁금해 ‘서로 민증(주민등록증) 까보자’고 했다. 그때 그가 1954년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꽤 의식했다. 저녁 약속을 잡을 때도 ‘국회에서 가까운 여의도에서 보는 건 어떤가’라고 하면 늘 ‘강남으로 가지’라고 했다. 또한 박 의원이나 본인과 관련해 질문 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에이, 뭐 그런 걸 물어보나’라고 했다.”

박근혜 후보는 2004년 3월 한나라당 대표가 됐다. 이후 정윤회 씨는 박근혜 의원실을 떠나 종적을 완전히 감춘다. 이 상황을 모 인사는 이렇게 술회했다.

“더위가 채 가시기 전인 2004년 어느 날, 정윤회 실장이 ‘나 몸이 안 좋다. 요양가야 할 것 같다. 앞으로 한동안 못 보게 될 거다’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는 사라졌다. 그를 만나온 거의 모든 사람이 그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스스로 신변을 정리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최태민 목사의 사위가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박근혜 의원에게 부담이 될 터였다. 이후 ‘정윤회가 뒤에서 박근혜를 돕는다’는 이야기만 나왔다. 그러나 그를 접촉했다는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그와 통화했다는 사람이 있기에 찾아가서 ‘정말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다’라고 하더라.”

정윤회 씨와 관련되는 의문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의문은 ‘박근혜에게 있어 정윤회가 수평관계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수평관계에 대해 정치권에선 추측이 무성하다.

이에 대해 2004년까지 정 씨를 만나본 사람들은 “핵심측근은 맞지만 멘토라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말한다. “박근혜보다 나이가 어리고 박근혜를 깍듯하게 모셨다” “오랫동안 관찰한 바로는 스마트한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우직한 스타일이었다” “박근혜의 워딩을 만들어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박근혜의 주변을 관리하는 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였다.

둘째 의문은 ‘최태민 공세 차단 이외에 박근혜가 정윤회와 결별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선 정윤회 씨를 만나본 이들은 대체로 수긍했다. 이들은 “정윤회가 상관인 박근혜에 대한 의리가 대단하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한다”고 했다. 박근혜의 관점에서 정윤회에게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경우 “최태민 목사와의 인연도 있는데다 충성심과 능력을 갖춘 정윤회를 멀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후보는 2007년 대선 경선 검증청문회에서 “대통령이 돼도 최 목사 가족과 계속 관계를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윤회 비서가 능력이 있어 실무 도움을 받았다. 법적으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윤회, 수면 위로 나와야

이러한 정황상 같은 강남에 거주하면서 2004년 이후 박근혜와 정윤회가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현실이 오히려 비정상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정윤회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언론을 비롯해 누구도 정윤회를 만나지 못하는 점 또한 이상하다고 하겠다.

이는 무엇인가 인위적이고 강력한 통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의 증발이 더 불길해 보이는 이유다. 만약 박근혜 정권의 수립을 가정해본다면 말이다.

열린 사회에서 예측불가능성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앞으로의 정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공적(公的) 시스템’에 의해서만 작동되어야 한다. “정윤회가 ‘박근혜 정권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정치권 일각의 시선에 당사자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윤회 씨가 수면으로 등장해 할 말을 하는 게 낫다고 본다.

최태민과 박근혜

고(故) 최태민 목사는 육영수 여사 사망 이듬해인 1975년 퍼스트레이디 대리를 한 박근혜 후보에게 위로 편지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다. 박 후보는 2007년 대선 경선 검증청문회에서 “마음에 와 닿고 만나보고 싶어 만난 분 중 하나”라고 했다.

이후 최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75년 5월 개최한 구국기도회에서 박 후보를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런데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최 목사에 대해 이권 개입, 횡령, 사기, 융자 알선 등의 권력형 비리와 여자관계 의혹이 제기됐다. 박정희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련 씨는 비망록에서 “1977년 박 전 대통령이 최 목사를 친국했다”고 썼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최 목사는 전두환 합동수사부에 의해 강원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후 박 후보가 이사장을 맡은 육영재단의 고문을 지내는 등 박 후보와 인연을 유지해오다 1994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대선 당시 ‘신동아’ 6월호는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관련 보고서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보고서 내용의 사실성을 함께 검증했다. 1980년 보안사령부 처장으로서 최 목사를 수사한 이학봉 전 의원은 2007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최태민 목사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 의혹과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1970년대 말 중앙정보부 파견 검사로서 최 목사를 수사한 백광현 전 내무부 장관은 ‘신동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다. 최태민 비리가 사실인지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신동아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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