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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⑩

“음식 발효에 좋은 옹기 만들다보니 인생도 무르익었네요”

강진 봉황옹기의 맥 이어온 옹기장 정윤석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음식 발효에 좋은 옹기 만들다보니 인생도 무르익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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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발효에 좋은 옹기 만들다보니 인생도 무르익었네요”
“돈만 있으면 시골에서도 학교 다닐 수 있는데 내가 서울에서 공부도 못하고 왜 이러고 있나 싶더군요.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 옹기를 배워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그는 옹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동무들이 멋진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나갈 때면 부러움과 창피함으로 몸을 숨기곤 했지만, 그는 평생 옹기장이로만 살아왔다. 한참 뒤 마련한 서른닷 마지기 농사를 돌보는 일 외에 그는 다른 일에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다. 10대에 감행했던 서울행이 그의 인생에 유일한, 미완의 모험으로 남아 있다.

“옹기 일이 힘들 때면 한 번씩 그때 일을 떠올려보곤 했어요. 그때 참고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보다 나았을까, 더 잘살았을까 하고요.”

전쟁 후 경제 부흥기와 이어지는 산업화 시기를 생각하면, 서울에서 무슨 일을 했어도 지금쯤 부자가 돼 있었을 것이다. 대신 칠량옹기의 맥은 사라지고 말았을 테지만.

치솟는 물가에 직거래로 돌파



그는 옹기를 외삼촌에게 배웠다. 그의 집안도 옹기집안이었지만 아버지는 옹기상인이었고, 외가는 할아버지도 삼촌도 옹기장이였다. 당시 옹기일 하는 사람으로는 보통 일꾼과 옹기를 직접 만드는 성형사, 그리고 대장이 있었는데 그는 애초부터 보통 일꾼보다 보수를 서너 배 많이 받는 성형사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그런 굳은 결심과 노력 덕택인지 그는 보통 사람보다 빨리 일을 배워 5년 만에 ‘기술자’가 되었다. 여러 기물을 다 잘 만들고, 흙 선택부터 불 때기까지 두루 아는 숙달된 옹기장이가 된 것이다.

“5년이면 빠른 편이었지요. 스무 살 무렵에 큰 독(열 말 넘게 들어가는 특대짜리)까지 다 만들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큰 독은 더 나이가 먹어 힘 좋을 때 주로 만들었지요.”

그가 옹기를 배우던 시절은 옹기를 싣고 갈 배가 항시 대기할 정도로 옹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였다. 형편이 조금씩 피면서 어느 집이나 장독대를 마련하던 시절이었다. 남보다 일찍 기술자가 되어 일감도 많았건만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막상 기술자가 되고보니 보수가 전만 못해진 것이다.

“기술을 배울 때는 예를 들어 독 하나 값에 쌀 두 말을 팔아올 수 있었다면, 기술자가 되었을 때는 쌀 한 말 반밖에 못 팔게 된 겁니다. 물가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데 옹기장이가 받는 보수는 잘 오르지 않으니, 죽어라고 일해도 가난을 면키 어려웠지요.”

옹기장이로 살아오는 동안,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팽창기 그의 화두는 솔직히 ‘얼마나 잘 만들까’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물가를 어떻게 따라잡을 것이냐’였다. 만드는 것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오직 배운 대로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아예 고민거리도 못 되었지만,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 인플레는 심할 수밖에 없었고 1차 생산자인 그는 늘 허덕이는 신세였다. 더구나 결혼하고 새살림을 시작하던 때여서 생활은 더욱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스물셋에 장가가서 그해 입대했는데, 휴가 두 번 나온 동안에도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첫 휴가 때 물가와 두 번째 휴가 때 물가가 다른 걸 실감할 정도로 물가가 빨리 뛰었습니다.”

“음식 발효에 좋은 옹기 만들다보니 인생도 무르익었네요”

가마 앞에서 이야기하는 옹기장이 부자. 내용을 들어보니 가마에서 ‘연묵은’(연기를 많이 먹어 검어진) 옹기에 대한 것이었다. 요즘은 일부러 연묵은 옹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이들도 있다.

그 시절 옹기장이들은 소변을 보고 허리춤도 채 여미지 못한 채 뛰어와 일을 했고, 담배조차 물레를 돌리면서 피울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물레를 돌려도 살림은 좀체 나아지지 않자 그는 마침내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다른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어요. 물론 만드는 개수에 따라 돈을 받는 도급제였습니다. 많이 만들면 많이 벌 수 있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이 안 벌리더군요. 마침 옹기 공장을 판다는 집이 있어서 그걸 사서 독립했지요.”

1970년대 후반, 옹기가 서서히 쇠퇴해가던 무렵이었다. 옹기 일을 그만두는 집이 하나둘 늘었지만, 그래도 수요는 있어서 그는 한 선주와 계약을 하고 선불을 받아 일했다.

“계약한 선주에게만 판다는 약속을 하고, 1년에 여섯 가마분을 납품하기로 했습니다. 한 가마에서 나오는 옹기 수는 1000점이 넘어요. 하목(荷木·땔감)이 워낙 비싸니 한번 구울 때 최대한 많이 넣거든요.”

가마에 쟁일 때 큰 독도 아래위 겹쳐 쌓고, 항아리마다 작은 그릇들을 넣어 구우면 1000개는 좋이 넘는다. 그렇게 한 가마 구워 그가 받은 돈은 100만 원 남짓.

“두 가마를 땔 때까지는 직공으로 일할 때보다 벌이가 낫더군요. 그런데 기술자 둘 데리고 제가 사업자가 되어 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제 작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지고, 그렇게 1년 지나니 빚이 생기더군요.”

옹기 수요의 절정기는 김장철을 앞둔 가을이다. 여름철에 미리 받아 쓴 돈이 고스란히 빚으로 쌓이자 그는 ‘이런 식이라면 결국 단봇짐을 싸야 쓰것다(막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원인을 분석해보니 역시 물가였다. 재료비는 올랐는데 옹기 값은 그대로니 많이 구워도 손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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