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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⑥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선조실록’은 왜 수정됐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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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 소장된 기록도 수집해야 했으니 각 관청 기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방 각 아문에 고증할만한 문서와 여러 도감(都監·국가 행사를 주관했던 임시 관청)의 ‘등록(謄錄)’과 ‘승정원일기’ 전부 및 ‘승전단초책(承傳單抄冊)’과 연도별 소·차 및 관상감의 연도별 ‘역년기(曆年記)’ 등을 모두 실어 보내도록 했다. 지방은 팔도 감사들에게 급히 하유(下諭·지방관리에게 서울로 가져올라오게 함)하고, 서울은 각 아문과 한성부(漢城府)의 오부(五部)가 책임지도록 했다.

광해군 원년 10월 일실된 사료를 모아 실록 편찬을 시작할 당시 총재관(總裁官)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었다. 그리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광해군 3년(1612) 11월에 대제학에 오르며 편찬에 참여하고, 이정구의 건의로 현헌(玄軒) 신흠(申欽·1566~1628)이 합류했으니 실록 편찬의 진용은 이항복-이정구-신흠이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로 짜인 것이었다.

실록 편찬 라인

이런 인연 때문인지 이정구는 후일 이항복을 가리켜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항복은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와 연루돼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한직인 중추부로 옮긴 후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를 반대하다 함경도 북청에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정구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박응서 등의 역모사건과 이어진 김제남 옥사에 연루돼 파직됐지만 이정구는 광해군 13년 외교문서를 담당할 전문가가 없자 다시 등용됐고 춘천으로 유배를 갔던 신흠 역시 인조반정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이항복-이정구-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이 각종 사건으로 실각하자 이를 대체한 사람은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었다. 그는 김제남 옥사의 와중이었던 광해군 5년 8월 예조판서 겸 대제학을 맡아 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선조실록 완성

광해군 8년 11월 드디어 실록이 완성됐다. 통상 2~3년 안에 끝나던 편찬이 무려 10년 가까이 걸렸다. 선조실록은 실물 책제(冊題)에, ‘선종실록’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통상 ‘선조(宣祖)’라고 하지만, 선조의 묘호는 원래 ‘선종(宣宗)’이었다. 그러다가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의 자손이라는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오기(誤記)를 바로잡은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극복을 이유로 ‘선조’로 바뀐 것이 광해군 8년 5월이었다. 이에 따라 실록 명칭도 ‘선조대왕실록’이 되어야 맞지만 그해 11월에 편찬된 실록에는 ‘선종대왕실록’으로 그대로 뒀다. 아마 5월 당시에 활자로 인쇄가 끝난 상태여서 굳이 수정하지 않고 놔둔 듯하다. 다시 찍으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된 사초 등은 자하문 밖 세검정에서 물에 씻어 지운 다음 재생용지로 사용했다.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편찬에 참여한 신하들을 위로하는 잔치인 세초연을 여는 한편, 춘추관을 비롯한 각처의 지방 사고(史庫)에 실록을 봉안(奉安)한다. ‘봉안’은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실록의 위상을 용어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우리가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 때문이다. 의병 활동 기록도 선조수정실록에 많다.

‘선조실록’은 편찬에 참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광해군 10년 7월에 지방의 4개 사고에 봉안됐다. 그런데 ‘선조실록’은 편찬이 늦어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록의 내용,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수정 논의가 나온 것일까?

‘선조실록’이 편찬된 뒤 광해군 때는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잠복해 있었을 뿐이고, 드러났다 해도 바로잡을 의지도 경황도 없었다. ‘선조실록’에 대한 수정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계해반정으로 정권이 인조로 바뀐 뒤의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조실록’의 수정은 무엇보다 인상이 좋지 않다. 손을 댄 실록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거시적으로는 조선이 식민지로 귀결됐다는 역사적 현실, 미시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이후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맞물리면서 ‘선조실록’의 수정은 ‘선조(宣祖) 이래 격렬한 당쟁(黨爭)의 결과’라는 뻔한 해석에 그쳤다.

수정 논의

하지만 그렇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선조실록’의 수정 논의는 인조 원년에 처음 제기됐지만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계속 중단되다가 효종 8년(1657)에 이르러 마무리됐다. 인조 원년 8월 경연 석상에서 특진관 이수광(李?光), 이정구 및 임숙영(任叔英) 등은 ‘선조실록’이 ‘역적(賊臣)’의 손에 의해 편찬됐으며, 애초 이항복이 총재관이 돼 제학 신흠 등과 찬수하다가 계축옥사(광해군 5년·1613) 때 이들이 쫓겨나고는 이이첨 등이 초고를 산삭(刪削)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를 없앴다고 주장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쓴 그분이다. 원래 이수광은 당색으로 치면 북인이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 시기에 낙향해 있다가 반정 후에 조정에 들어온 경우다. 임숙영도 귀양을 갔다가 반정 후에 조정에 들어왔다. 이정구는 ‘선조실록’ 편찬관으로 참여했다가 김제남 옥사 전후로 배제됐던 인물로, 앞서 다룬 바 있다.

이정구 등의 발론이 있은 지 이틀 뒤 좌의정 윤방(尹昉)은 구체적인 선조 지문(誌文)의 실례를 들어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할 이유를 제기했다. 그는 ‘선조실록’ 편찬의 총재관이었던 이산해(李山海)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세자에게 국정을 전담시킨 것은 게을러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한 점과 선조의 자손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수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후 수정 논의는 ‘선조실록’이 ‘사실이 왜곡된 역사(誣史)’라는 공감대가 이뤄지면서 해를 넘겨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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