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 파국으로 끝난 이 결혼의 주인공 찰스는 아일라 위스키 애호가다.
1848년 빅토리아 여왕은 로열 로크나가(Royal Lochnagar)증류소를 처음 방문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998년 찰스가 이곳을 방문했다.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찰스의 사랑은 로열 로크나가에서 멀리 떨어진 아일라 섬의 라프로익(Laphroaig)증류소에서 본격 표출된다.
아일라는 작은 섬이지만 ‘위스키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이 표현은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깊이가 없다. 무라카미가 부인과 함께 아일라 섬에 잠깐 들러 몇몇 위스키 증류소들을 들러보고 쓴 기행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린 것은 유명 작가의 유려한 필체 덕도 있지만, ‘위스키의 성지’라는 낭만적인 표현이 주는 인상 때문이었다. 아일라는 어떤 곳이기에 대단한 찬사를 받게 됐을까. 필자는 여러 해 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곳을 방문했다.
아일라(Islay)는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는 헤브리데안 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발음이 영어 스펠링과 다른 것이 큰 특징이다. 아일라의 크기는 남북으로 약 40km, 동서로 약 32km이고 인구는 3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의 3분의 1은 바닷가 마을인 행정중심지 보모어(Bowmore)에, 나머지 3분의 1은 남쪽의 항구 도시인 포트엘렌(Port Ellen)에, 나머지 3분의 1이 섬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체감 인구밀도는 아주 낮은 편이다.
로열 워런트의 힘
이 섬은 8개나 되는 위스키 증류소 덕분에 유명해졌다. 긴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증류소에서는 품질 좋은 스카치위스키를 생산한다. 강력한 향을 품은 이탄(피트)으로 볶은 몰트보리로 만들었기에 수많은 아일라 위스키 마니아를 탄생시켰다. 2005년에 설립된 킬코만(Kilchoman)증류소를 제외한 7개 증류소는 대단한 유명세를 누린다.
북쪽에는 부나하번(Bunnahabhain)과 쿠릴라(Caol Ila) 증류소가 있고, 남쪽 포트엘렌 마을 근처에는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라프로익(Laphroaig) 증류소가, 섬 중간에 보모어 증류소와 브루크라디(Bruchladdich) 증류소가 있다. 지역별로 술맛 차이가 확연해 남쪽 3개 증류소제 위스키는 피트향이 강하고, 북쪽의 2개 증류소제 위스키는 상대적으로 향이 약하다. 중간쯤에 있는 보모어는 중간쯤이다. 브루크라디 증류소는 피트향이 강하지 않은 제품이 주종이었으나 최근에는 상당히 강한 제품도 출시하고 있다.
과거 아일라에는 여러 증류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중 유명한 것이 1820년대 후반 설립됐다가 폐쇄된 포트엘렌(Port Ellen) 증류소다. 증류소가 폐쇄됐음에도 이곳에서 생산한 제품은 인기가 높아 지금도 위스키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된다. 사람들은 조류 관찰과 낚시, 캠핑 등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도 이 섬을 찾는다. 아일라의 해안선은 정말 아름답다. 미니어처 다도해와도 같은 풍경이다. 섬 내륙에는 ‘헤더(heather)’라는 관목이 깔린 초원과 구릉이 펼쳐져 있다.
1994년 6월 29일 찰스는 좋아하던 아일라의 라프로익 증류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일정이 빠듯해 개인 비행기로 도착해 증류소에 20분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그런데 찰스의 비행기가 활주로를 지나 멈춰 서는 사고가 났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비행기가 망가졌다. 이 바람에 대체 비행기가 올 때까지 라프로익 증류소에 2시간 반 정도 머물게 됐다.
이것이 증류소 지배인인 이안 헨더슨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그는 개인비서와 경찰 관계자 한 명을 대동하고 온 찰스 왕세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위스키 제조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찰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 질문을 했다. 찰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위스키를 만드는 철학을 끝까지 고수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지배인의 부인이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라프로익 위스키를 음미했다. 증류소 직원들과도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대체 비행기가 도착해 떠날 시간이 되자 라프로익 증류소는 찰스에게 기념으로 자사 위스키가 들어 있는 오크통 두 통을 선물로 증정했다. 이 위스키 통이 훗날 자선단체에 기부돼 높은 가격으로 경매되었다. 찰스는 보답으로 왕세자의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수여했다. 로열 워런트는 왕실에서 구매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왕실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증이다. 해당 상인으로서는 큰 영광이고 상응하는 경제적 이익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영국 왕실의 로열 워런트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왔다. 현재 로열 워런트 허가권을 가진 이는 세 명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에든버러 공, 그리고 찰스 왕세자다. 로열 워런트의 문장은 수여자에 따라 달라진다. 라프로익 증류소는 싱글 몰트위스키로는 최초로 로열 워런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런 인연은 그 후로도 이어져 2008년 6월 4일 찰스는 새 부인 카밀라와 함께 재방문했다.
1998년 12월 슬로베니아는 찰스의 공식방문에 맞춰 수도 류블랴나에서 영국 주간 행사를 열었다. 행사장을 찾은 찰스는 슬로베니아 대통령에게 기념으로 라프로익 한 병을 선물했다.
올해 만 64세인 찰스가 2012년 9월 18일까지 왕세자로 있다가 즉위한다면, 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된다. 많은 이야기를 만든 찰스가 술에 대해서는 또 어떤 일화를 남길지 관심이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