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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④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애틋한 ‘겨울 여자’ 장미희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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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장미희의 이름을 널리 알린 김호선 감독의 영화 ‘겨울 여자’ 포스터.

영화의 라스트. 신성일이 죽고 장미희는 혼자 남는다. 어딘가를 바라본다. 고향이 없는 그녀. 만약 고향이 있다면 별처럼 먼 곳일, 그곳을 바라보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시선 어딘가로 화면이 바뀌면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 황량한 모래밭에 바람이 불고 빨간 우산이 떼굴떼굴 굴러가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화면은 정지되고 ‘끝’ 자가 떠오른다. 두 번째 망치. 고백하자면 나는 영화가 주는 강렬함을 ‘속 별들의 고향’으로 처음 경험했다. 경험은 알랭 들롱 주연의 ‘암흑가의 세 사람’의 라스트, 또는 왕우 주연의 ‘심야의 결투’ 라스트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의 비장하고 처절한 죽음에서 느껴지는 격한 감정이 아니라 추상적인 이미지와 주인공의 감정이 결합된 또 다른 종류의 격한 감정이었다. 먼 훗날 빨간 우산 장면은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처녀’를 표절한 것이고, 배구 장면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블로우 업’ 중 테니스장 장면을 표절한 것임을 알았고, 어찌 보면 무척이나 감성적인 장면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나의 감동은 훼손되지 않았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장미희는 심한 조울증 또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상의 병을 앓는 여자인 것 같다. 그녀는 고아이고, 소매치기다. 밤마다 자신의 차가운 몸을 데워 주고, 지갑을 빼앗겨줄 남자를 찾아다니는 불량소녀다. 그녀는 추워서 덜덜 떠는 어리고 연약한 동물 같기도 하고, 젊고 아름다운 몸을 이용해 생존하는 것에 아무런 윤리적 갈등이 없는 강한 짐승 같기도 하다. 임신을 한 그녀는 만만한 신성일을 찾아가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한다. 사실 거짓말이다. 누구의 아이인지 그녀도 모른다. 다만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안정된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일은 너무 쉽게 넘어간다. 신성일이 아기를 제 자식처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의 ADHD 증상은 심해진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같이 되어버린 장미희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들어왔고,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난폭해진다. 이런 어려운 역을 20대 초반의 신인 장미희가 설득력 있게 소화해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전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감정 기복이 심한 여주인공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장미희는 ‘겨울 여자’와 ‘속 별들의 고향’의 성공으로 1970년대 말 최고의 인기 여배우가 된다. 이듬해인 1979년 그는 ‘하녀’(1960) ‘이어도’(1977) 같은 괴작을 만든 감독 김기영과 만난다. 영화 제목은 ‘느미’. 벙어리이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자 장미희는 서울 변두리 벽돌 공장 공장장의 아내다. 예순이 다 된 늙은이와 살며 그의 아이를 낳고 그에게 학대받으며 낮에는 벽돌을 나르고 밤에는 그의 손발을 씻겨주고 섹스 상대가 되는 여자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트럭 운전사 백일섭은 늙은 남편 앞에서 장미희에게 노골적으로 집적거린다. 늙은 남편은 힘으로는 백일섭과 상대가 안 되니 장미희에게 손찌검을 한다. 그 사이에 끼어든, 대기업에 취직할 예정인 인텔리 하명중. 백일섭은 정욕에 미쳐 장미희의 남편을 트럭으로 깔아뭉개 죽여버리고 장미희에게 결혼하자며 울부짖다 교도소로 간다. 대기업에 취직한 하명중은 장미희를 차지하기 위해 물량 공세를 편다.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남자들은 모두 불행한 죽음을 당하는 이 이상한 영화에서 장미희는 특별했다. 화장 안 한 맨 얼굴에 연약한 어깨와 빈약한 가슴을 드러내고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들을 물어뜯는다. 심지어 자신을 돌보아주다 회사에서 강제 퇴직당한 하명중과 함께 자살을 하려고 연탄불을 방 안에 피워놓고 드러누웠다가 하명중이 가스 냄새를 맡고 일어나려 하자 베개로 그의 얼굴을 덮어 죽이려 한다. 하명중과 헤어질 때, 그가 사 모은 살림살이를 마을 사람들에게 경매로 헐값에 팔아버린 뒤 돈 절반을 뚝 떼어 하명중에게 주는 모습.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하명중을 냉혹하게 뿌리치고 떠나는 장면 등에서 그녀의 냉혹함은 설득력이 있다. 장미희는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해지면 신의 질투가 심해지고 결국 신이 행복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여자 역을 맡아, 마음속에 포악한 살쾡이 같은 일면과 천사와 같은 순수함이 불화를 이루는 모습을 연기했다.

1983년, 20대 장미희의 아름다운 매력이 최고로 꽃을 피운 영화가 만들어진다. 장미희와 배창호의 만남이었다. 제목은 ‘적도의 꽃’. 영화가 시작되면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어느 집 어두운 구석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쓰고 있다. 사내는 부잣집 아들인 것 같고 취직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모두 그만두고 말았으며, 부유한 아버지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무위도식하는 청년이다. 그가 자기 집 맞은편에 이사 온 한 여자를 카메라 뷰 파인더로 보고는 반해버렸다. 이것은 장미희의 첫 흥행작 ‘겨울 여자’의 한 장면과 비슷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겨울 여자’와 ‘적도의 꽃’ 두 영화에서 여주인공 장미희는 자신의 존재를 감춘 불쾌한 남자들, 즉 스토커의 폭력적인 시선에 갇힌 불행한 여자다.

여배우 학대하는 영화



‘겨울 여자’의 주인공 이화는 꿈속에서 스토커로부터 도망쳐 교회로 들어간다. 그곳은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녀가 믿는 신과 목사인 아버지가 지켜줄 수 있는 곳. 그녀는 안도의 기쁨에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춘다. 그런데 스토커는 보란 듯이 성역을 침범해, 이화 앞에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잠에서 깨어난 이화에게 온 편지. 스토커가 보낸 것이다. 스토커는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교회 안에서 가면을 쓰고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 불쾌한 남자와의 만남과, 그의 강간을 거부한 뒤 남자의 자살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는 이화를 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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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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