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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⑭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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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쇼팽이 빈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폴란드에서는 민족혁명이 일어났다. 폴란드를 지배하던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폴란드에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폴란드인 쇼팽은 위험인물로 낙인 찍혔다. 당장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혁명세력에 힘을 보태고 싶었지만 주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폴란드의 위상을 세우라고 만류했다. 연주와 출판은커녕 생계도 어려워졌다. 조국에 대한 근심과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국 파리로 이주할 것을 결심한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성향의 음악이 빈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파리음악계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쇼팽은 8개월의 짧은 빈 생활을 마치고 서둘러 파리로 향했다.

파리로 가는 도중 러시아가 폴란드의 민족혁명을 유혈 진압하며 바르샤바를 잔인하게 짓밟았고, 때마침 콜레라까지 퍼져 폴란드인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그너처럼 언변과 필력으로 활동하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투철한 민족적 애국심을 가진 쇼팽은 조국 폴란드를 박해하는 부조리한 처사와 인권탄압에 격분했다.

이때 쇼팽은 에튀드 10번(Etude C minor Op.10 No.12) ‘혁명’을 작곡한다. 물론 ‘혁명’은 쇼팽이 부제로 넣은 것은 아니고 후세에 붙인 것이다. 그의 10개의 연습곡(에튀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곡은 왼손으로는 격정적이고 우수에 젖은 선율을 반복하고 오른손은 당당하고 저항적인 선율을 연주해 당시 쇼팽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폴란드인들은 연주 시간이 3분이 채 안 되는 이 곡을 조국해방의 강한 의지가 담긴 곡으로 믿고 있다. 이 곡이 작곡된 지 88년이 되는 1919년 폴란드는 독립했지만, 20년 만에 다시 독일의 침공을 받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1990년 레흐 바웬사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되면서 폴란드는 진정한 독립을 이루게 된다. 이 긴 시간 동안 쇼팽의 ‘에튀드 10번 혁명’은 세대를 넘어 핍박받는 폴란드인에게 강렬한 독립의식을 불어넣었다.

쇼팽의 아버지 미코와이는 자신이 프랑스인이었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쇼팽도 자신의 부계(父系)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다. 193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쇼팽에게는 빈에서와는 전혀 다른 멋진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먼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 루이18세, 샤를 10세 왕정을 거쳐 7월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평등한 자의 아들’이라 불렸던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구체제에 대한 도전의식이 고양되었고, 문학과 미술, 음악 등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양식이 자유롭게 등장했다. 동시에 그 조류를 찾아 유럽의 수많은 예술가가 파리로 모여들었다. 위고, 하이네, 드 뮈세, 발자크, 뒤마, 상드, 라마르틴, 앵그르 등의 예술인을 위시해 케루비니, 로시니, 마이어베어, 리스트, 오베르 같은 쟁쟁한 음악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던 쇼팽이 활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두 번째로 쇼팽은 주로 ‘피아노’에만 한정된 작품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18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 휴대전화가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것처럼, 1820년부터 피아노 제작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피아노는 더욱 풍성한 음량과 맑은 음질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피아노 음향에 열광했다.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교양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풍조가 형성될 정도였다. 1845년경에는 인구 100만 명의 파리에서 6만 대의 피아노가 있었다고 하니, 가히 모든 음악을 피아노로 감상하는 시기였다.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 교향곡도 피아노로 편곡된 선율로 감상했고, 오케스트라 반주가 필요한 오페라도 아리아만을 뽑아 피아노 반주로 살롱음악회를 열 만큼 파리 음악계는 피아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위고, 괴테 같은 대문호의 신작이 아니면 베스트셀러는 거의 악보였다. 음악출판사는 신작 출판에 사활을 걸었고 유럽의 작곡가들은 출판계약금과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유럽의 그 어느 도시보다 파리에서는 피아노 악보출판과 피아노레슨을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새로운 음악사조와 피아노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폴란드 바르샤바에 위치한 성십자성당. 이곳에는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도 작용했다. 오스트리아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폴란드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 귀족들의 망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나라도 프랑스였다. 폴란드 귀족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그대로 지키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조국의 유능한 인재 쇼팽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성심성의껏 후원했다.

파리에 온 지 5개월 만인 1832년 2월, 쇼팽은 플레엘 살롱에서 전곡 암보(暗譜) 연주로 성공리에 데뷔했다. 암보로 홀로 독주회를 한 최초의 피아니스트가 되면서 쇼팽은 당당하게 파리의 음악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쇼팽 이전에는 연주자들이 항상 악보를 보고 연주를 했고, 독주회 중간에 다른 연주자가 찬조출연해서 연주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3개월 후에 열린 두 번째 연주회에서는 무대 공포증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실력을 의심받게 된다. 이 ‘트라우마’ 때문에 소심했던 쇼팽은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 공식 연주회는 30여 회만 했고, 지인들끼리의 부담 없는 살롱음악회에 집중했다. 어쨌든, 명망 있는 가문 인사들의 레슨 요청이 이어지면서 쇼팽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당시 파리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2프랑 정도였는데, 쇼팽은 레슨 1회에 20프랑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하루에 5, 6명의 학생을 받아도 예약이 밀려있을 정도의 ‘스타 강사’였으니 불과 1년 전 빈에서의 궁핍했던 생활은 달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파리 사교계 여인들도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고 미끈한 손가락에서 나오는 감미로운 선율을 선사하는 이 피아니스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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