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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⑭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조국과 두 여인이 만든 ‘피아노 시인’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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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픔’ 마리아

쇼팽은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날에는 난폭하게 변했다.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의자를 내던지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그래도 쇼팽은 최대 수입원이었던 레슨을 계속했고, 그에게 몇 년씩 배운 제자도 1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주자, 혹은 음악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제자는 단 2명뿐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노래하듯이 건반을 연주하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19세에 만났던 성악 전공 학생 콘스탄차와의 첫사랑 이후 쇼팽은 이렇다 할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25세에 여행지 독일 드레스덴에서 아버지의 옛 제자 펠릭스 보진스키와 해후하면서 사랑을 만난다. 보진스키의 여동생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만났을 때는 열한 살 꼬마숙녀였다. 이후 파리로 돌아가서도 마리아에 대한 연정을 떨칠 수 없어 편지로 사랑을 전했다. 사랑을 꽃피운 지 1년 되어가던 즈음, 쇼팽은 정식으로 마리아에게 청혼을 했으나 가족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청혼한 지 1년이 지난 뒤 마리아의 부모는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쇼팽은 당시 170cm의 키에 50kg이 채 되지 않았고, 얼굴도 매우 창백했다. 여러 차례 각혈을 해 ‘쇼팽이 죽었다’는 소문도 퍼진 터였다. 쇼팽은 마리아의 편지를 모아 폴란드어로 ‘나의 슬픔’이라고 적어놓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음악에 파묻혀서 살아가던 1838년 5월의 어느 날, 쇼팽은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난다. 오로르 루실 뒤팽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조르주’라는 남성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이미 두 아이를 둔 이혼한 남작부인이었다. 상드는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남장을 하는 기행으로 많은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한 인기 소설가였다. 150cm 정도의 키에 풍만한 체형이었지만 매혹적인 언어구사력과 관능적인 미소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2년 전 처음 만났지만, 쇼팽은 단아하고 청순한 마리아에 빠져 상드에게는 눈길조차 주질 않았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심신이 지쳐버린 그는 ‘어머니 같고 누이 같은 여인’ 상드의 마력에 푹 빠져들었고, 쇼팽은 상드와 그의 아들 모리스, 딸 솔랑주와 함께 스페인 휴양지 마요르카 섬으로 요양여행을 떠났다.

“솔랑주를 잘 돌보시구려”



쇼팽은 상드의 내조를 받으며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고 폐결핵 진단까지 받게 된다. 지금이야 백신 개발로 폐결핵이 치명적인 전염병이 아니지만 당시 폐결핵은 ‘백색 페스트’로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를 간호하는 상드의 부담도 컸다. 파리로 돌아온 상드는 자유분방했던 삶을 청산하고 헌신적으로 쇼팽을 내조했고, 쇼팽은 자애롭고 다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드가 딸 솔랑주와 불화를 겪자 쇼팽은 딸의 편을 들어 아내 상드에게 조언을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상드는 매정하게 돌아섰고, 장장 9년의 독특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은 허무하게도 종지부를 찍었다. 1847년 9월 쇼팽에게 보낸 상드의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솔랑주를 잘 돌보시구려. 당신이 몸 바쳐 돌보려는 사람이 그 아이라니까요. (중략) 빨리 병을 치료하길! 9년간 우정의 시간이 이렇게 이상하게 끝난 것을 신에게 감사해야겠군요. 가끔 소식이나 전해줘요.”

혼자 남겨진 쇼팽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48년 2월 연주회를 결심한다. 연주회는 다른 악기 연주자와 성악가와 함께 기획되었지만, 자주 감상할 수 없는 쇼팽의 연주에 관객이 몰려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고, 이에 고무된 쇼팽은 그날 바로 다음 연주회를 계약했다. 쇼팽과 파리의 운이 다했을까. 연주회 6일 뒤 2월 혁명이 발발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내각과 루이 필립 국왕은 물러나고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를 수반으로 하는 제 2공화정이 성립된 것이다. 쇼팽을 후원하던 주변 인물들은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쇼팽의 레슨 학생 수도 급격히 줄었다. 한가로이 피아노를 배우며 예술을 논하기에는 너무나 불안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제자였던 제인 스털링의 조언을 받아들여 쇼팽은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영국에는 프랑스에서 피신한 유능한 예술가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아무리 쇼팽이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연주한 인정받은 연주자라 할지라도 영국은 피아노 음악보다는 성악에 더 열광했다. 수입 역시 파리에서만 같지 않았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도 알게 되었다. 폴란드의 어머니와 누이를 불렀고, 헌신적인 스털링도 쇼팽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넜다. 결국 쇼팽은 자신의 심장을 폴란드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지금 파리 몽소 공원에는 피아노 치는 쇼팽과 상드의 동상이 서 있지만 실제 상드는 병문안도 오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반면 스털링은 쇼팽의 죽음을 애도했고 5000 파운드에 달하는 장례비용을 부담했다.

쇼팽은 파리를 대표하는 모든 예술가가 잠든 ‘페르 라세르 묘지’에 묻혔고, 19년 전 바르샤바를 떠나올 때부터 간직한 조국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그의 유언대로 쇼팽의 여동생은 쇼팽의 심장을 폴란드로 옮겼다. 혹자는 쇼팽을 자신의 한계에 갇혀 피아노에만 집착했고 인기 위주의 짧은 소품만 작곡했다고 비판하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클래식 작곡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쇼팽의 묘지를 사랑의 우편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솔랑주(상드의 딸)의 남편이 조각한 쇼팽의 대리석 묘비는 특별히 환하게 빛나고 있다. 팬들이 헌정한 수많은 꽃다발에 파묻힌 비석 위에 새겨진 그의 얼굴은 그의 음악처럼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신동아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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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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