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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가지’ 김정은의 콤플렉스

제주 출신 외조부-‘째포’ 어머니 고영희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곁가지’ 김정은의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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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문제 복잡했던 고경택

영곡공파 사람들은 고경택이 많은 아들을 낳은 청주한씨와는 사별인지 이별인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살았다고 했다. 6남‘ 상훈(相勳)’ 부터는 훗날 이맹인으로 확인되는 다음 부인이 낳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맹인은 고영희의 친모도 된다. 상훈-영희의 어머니 이맹인은 청주한씨보다 두 살이 많아 고경택과 동갑이다.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라 법적으로는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로는 외국인으로 간주됐다. 그때부터 일본은 귀국하지 않은 조선인에 대해 ‘외국인 등록원표’를 만들어 관리했다. 등록원표에 조선식 이름은 물론이고 일본식 이름인 ‘통명(通名)’ 등도 기록했다. 북한 전문매체인 ‘데일리NK’의 고영기 도쿄 지국장은 고경택의 외국인등록원표를 취재한 적이 있다.

“등록원표에는 고경택(高京澤)이 高璟澤(고경택)으로 적혀 있었다. ‘경’자가 다른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인의 문맹 률이 높은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를 써보지 못한 조선인들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정확히 알지 못해, 일본 공무원들이 ‘이 글자냐’하고 물으면 그냥 끄덕여 다르게 기록됐다는 것이다. 고경택의 통명은 없었다.

그때 이미 고경택은 청주한씨와 헤어졌는지, 부인은 양명녀로 돼 있다가 1959년 이맹인(李孟仁)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돼 있었다. 이것 역시 일본 공무원이 마구잡이로 등록원표를 만들었기에, 이맹인을 양명녀로 잘못 적어놓았다가 이 부부가 북한으로 가기 전에 정정한 것으로 보인다. 고상훈은 이맹인의 아들임이 분명해, 족보와 똑같은 한자로 등록원표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통명은 없었던 듯, 공란으로 돼 있었다.



그리고 항렬자인 ‘훈(勳)’을 넣은 딸이 둘 올라 있었다. 큰딸은 1952년생인 고희훈(高姬勳), 둘째딸은 1955년생인 고혜훈(高惠勳)이었다. 고희훈이 고영희이고 고혜훈이 고영숙이다. 고경택은 창씨개명을 할 때 ‘다카다(高田)’를 성으로 삼은 듯, 고희훈의 통명은 ‘다카다 히메(高田姬)’, 고혜훈은 ‘다카다 메구미(高田惠美)’로 돼 있었다.”

일본에서 좌파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과 증언을 남기지 않은 고경택이 북한식 표현으로는 ‘귀환선’인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관계자들은 고경택의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집안에 배다른 자식이 많아 이맹인이 낳은 자식만 이끌고 북한으로 갔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불법 행동을 거론한다. 광복후 고경택은 국교를 회복하지 못한 한국과 일본을 잇는 밀항선 사업을 했는데, 이것이 탄로나 ‘강제퇴거’ 명령을 받았다. 곤란한 처지가 된 고경택은 북한행을 택했다. 고경택이 먼저 북한으로 가고 이어 이맹인이 자녀를 이끌고 1962년 10월 21일 제99차 귀환선을 탄 것으로 돼 있다. 그때 고영희는 만 10세였다. 일본 주간지 ‘아에라’는 북한으로 가기 전 고경택 가족이 살았던 곳이 ‘오사카 이쿠노(生野)구 이카이노 1-16’이라고 보도한 바 있었다.

다카다 히메→고영자→고영희

1973년 3월호 ‘조선화보’(조총련 발행)는 ‘고영희의 아버지 고경택은 제주도에서 뱃사공의 3남으로 출생하여 1929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히로타(廣田) 재봉소에서 일하다 실직한 뒤 가족들과 함께 귀국선을 타고 함경북도 명간군에 정착하여 명간화학공장에서 생필직장 으로 근무했다’는 요지의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북한에 간 고경택은 임씨 성을 가진 여자와 살며 다시 자녀를 얻었다.

북한으로 간 ‘째포’들은 이름을 자주 바꿨다. 다카다 히메는 ‘고영자’로 불렸다. 고영자는 평양음악무용대학 무용과를 마치고 1971년 만수대예술단에 들어가 고영희로 이름을 바뀐 뒤인 1972년 고용희란 이름으로 공훈배우가 되었다. 다카다 메구미라는 통명을 가진 여동생은 고영숙이 되었다. 오빠인 고상훈만 항렬자를 따라 고동훈으로 개명했다.

고영희가 잘나가던 시절인 1990년대 초 고동훈은 ‘박칠성’이라는 가명으로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관에 나와 근무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의 탈북자 고영환 씨는 “그때 박칠성을 본 적이 있는데, 북한 외교관들이 그에게 많이 굽신거렸다. ‘김정일의 가족이다. 집안 사람이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화보’의 보도가 있은 1973년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때 21세의 일본 출신인 고영희는 예술단의 중심인물로 소개돼 많은 사진이 찍혔다. 그 무렵 고영희는 김정일의 눈에 띄어 김정일의 여인이 됐다. 김정일 집안의 안주인이 된 고영희는 1991년 정철-정은 형제를 데리고 정일선이란 이름의 가짜 여권으로 일본 도쿄의 디즈니랜드를 방문했다. ‘김정일의 요리사’란 책을 낸 후지모토도 ‘고영희는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를 잇는 세이칸 터널 등을 다녀왔다. 디즈니랜드가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고영희 환갑 그냥 넘겨

고영희가 김정일과 가족을 만들기 전인 1980년 김정일은 성혜림이 낳은 김정남을 스위스에 보내놓고 있었다. 1982년 모스크바에 있다가 김정남을 찾아온 이종사촌 이한영은 미국으로 가는 여권을 만들어달라고 한국대사관을 찾아갔다가, ‘조용히 한국으로 모셔졌다.’이한영 씨는 1995년 한 언론사를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3년 후 스위스에서 정은(당시 가명은 박은) 남매를 돌보던 고영숙 가족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난리가 났는데도 김정일은 정은 남매를 2000년까지 스위스에 체류하게 했다. 정남도 스위스에 있었다. 이에 대해 김정남은 일본 도쿄신문의 고미(五味) 기자와 주고받은 e메일에서 “같은 스위스에 살았지만 나는 제네바, 그들은 베른에 있어 만나지는 않았다”고 밝한 바 있다.

고영숙의 가족이 사라지고 미국이 스위스은행의 김정일 계좌를 조사하자 고영희는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뇌경색 등을 앓다가 2004년 사망했다. 그러자 스위스에 외교관으로 나와 있던 오빠 고동훈도 바로 유럽의 한 나라로 망명해버렸다.

정리하면 김정은은 곁가지이고, 째포의 아들이며 공화국을 배신한 탈북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이다. 백두혈통도 거짓이지만 한라혈통도 만들기 어렵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기관은 계속해서 고경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어 외조부를 잘못 띄웠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지난 6월 26일은 고영희의 환갑이었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으로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선포해놓은 올해 어머니의 환갑을 맞았으면, 대대적으로 경축할 만도 한데 그냥 지나갔다. 고영희를 띄우기에는 너무 약점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신동아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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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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