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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정담

“옹색한 골목길, 일제 흔적조차 아름다운 동네서 사는 즐거움”

‘西村 지킴이’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교수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옹색한 골목길, 일제 흔적조차 아름다운 동네서 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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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색한 골목길, 일제 흔적조차 아름다운 동네서 사는 즐거움”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체부동 한옥집. 파우저 교수는 1936년 지어진 이 낡은 한옥을 수리하는 과정을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그가 체부동 막다른 골목 끝에 놓인 장독대를 가리켰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은 주위의 몇몇 가구로만

이어진다. 이웃을 제외하면 오가는 이가 거의 없으니 길이라기보다는 숫제 마당이다. 집집마다 물건을 내놓고 쓴다. 여러 가구가 가꾸는 화분이 어우러져 작은 텃밭이나 화단을 이룬 곳도 많다. 창성동의 사람 둘이 간신히 지날 만한 골목 한쪽에서는 줄줄이 이어진 화분 줄기에서 고추와 토마토, 호박이 영글고 있었다. 꽃사과 향기도 물씬 풍겼다. 또 다른 골목길 화분에는 맨드라미와 국화가 한창이었다. ‘사람 사는 동네’라는 느낌이 생생했다.

비슷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살 비비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 그것이 파우저 교수가 생각하는 서촌의 가치다.

2010년 서울시는 서촌 한옥마을을 보존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경복궁 서측 제1종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발표했다. 일단 이 지역을 재개발해 아파트를 세우는 건 불가능해졌다.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이 정책이 북촌에서처럼 진행된다면, 또 다른 형식의 마을 파괴가 시작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북촌의 한옥은 사는 집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 됐잖아요. 저마다 집을 번듯하게 고치는 바람에 동네의 풍경이 꼭 영화세트장 같아졌어요.”



그가 계동에 마음을 붙이고 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파우저 교수는 “서촌에서 보존해야 할 건 한옥 한 채 한 채가 아니라 그 집들을 품고 있는 골목길, 그리고 그 속에 펼쳐진 마을 공동체”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주연’이 만들어졌다. 그는 “한옥 보존만 강조하다보면 체부동의 붉은 벽돌담 같은 것은 전통적인 한옥의 요소가 아니니 철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그런 식의 한옥마을 보존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봄 통인동 154-10번지에서 벌어진 ‘이상의 집’ 보존 논란이 떠올랐다. 시인 이상(李箱)이 27년의 생애 중 20년을 살았다고 알려진 집이다. 2004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집에 실은 이상이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2008년 문화유산 지정은 취소됐고, 한옥 관리를 맡고 있던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재단법인 아름지기는 기존 집을 허물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이상의 집’ 터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기념관을 신축하겠다는 거였다. ‘구조적인 변형이 심해 한옥으로서의 보존가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파우저 교수는 펄쩍 뛰었다.

“왜 그 집을 허물고 새로 한옥을 지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지난 80년간 한자리에 있었던,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집을 놓고 ‘한옥의 원형대로 짓지 않았으니 보존가치가 없다’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파우저 교수를 비롯한 ‘서주연’ 회원 등의 강한 반대 끝에 철거는 무산됐다. 파우저 교수의 집에서 채 2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운 그 한옥은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이상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촌을 오가는 이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는 사랑방 구실도 한다. 당초 도로면에 붙어 있던 지저분한 간판과 마감재를 떼내고, 전면 유리를 통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고친 집은 단출하되 격이 있어 보였다.

사람 사는 곳

“옹색한 골목길, 일제 흔적조차 아름다운 동네서 사는 즐거움”

꽃과 풀이 어우러진 서촌 골목을 걷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 서촌의 좁은 골목은 이동 통로이면서 동시에 마당이자, 텃밭이자, 화단으로 다채롭게 이용된다.

파우저 교수는 서울시가 옥인동의 수성동(水聲洞) 계곡을 복원하며 경관 문제 등을 이유로 옥인아파트를 철거한 것에 대해서도 무척 아쉬워했다. 1969년 준공한 초창기 시범아파트로, 서울의 한 시대를 상징하던 공간이 영영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아파트에 살아온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도 이제는 뿔뿔이 흩어졌죠. 저는 그런 게 아쉽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전통을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의 것으로 한정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 바로 윗세대의 삶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세월이 흐르면 전통이 되는 건데 말입니다.”

서촌에는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지은 직원용 사택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13인의兒孩가도로를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오감도’의 배경이 됐을 좁고 어둡고 막다른 골목도 여전하다. 파우저 교수가 바라는 건 비록 옹색하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지나간 삶의 기록을 보존하면서, 그 위에 오늘의 역사를 더해가는 것이다.

그는 최근 ‘체부동 한옥 프로젝트(che budong.blogspot.com)’라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체부동 낡은 한옥을 고치는 과정을 공개하고, 관심 있는 이들과 함께 서촌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9월 중순부터 공사를 시작해요. 물 새는 지붕을 수선하고, 마당에 떨어져 있는 화장실도 집 안으로 옮길 겁니다. 별채와 본채를 연결하고,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도 만들려고 해요. 한옥의 겉모습과 멋은 유지하면서 내부 구조는 살기 편하게 고치는 거죠. 우리 집이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 다른 분들도 저처럼 서촌에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조금씩 고쳐가며, 가꾸며, 함께 나누며 사는 게 서촌에서의 삶이라고 그는 믿는다. 10월 13일 열리는 상량식도 일반에 공개할 생각이다. 그가 속한 ‘몸-도시포럼’에서 진행하는 ‘흐르는 골목’이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자세한 일정은 블로그를 통해 공지한다.

신동아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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