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⑮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3/4
나치당원으로 출세가도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1984년 내한한 지휘자 카라얀이 부인 엘리에트 여사와 함께 김포공항 귀빈실로 가고 있다.

당시 히틀러는 새로운 국가 창설을 위해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 바로 이 이상에 부합하는 ‘맞춤형 인물’인 카라얀은 초고속 승진하며 자신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독일의 유명 인사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는 나치 정부에 협조했지만, 유대인 음악가 구명에 나서자 히틀러의 오른팔이던 파울 괴벨스가 즉각 푸르트벵글러를 견제하고 나서 그를 자극할 수단으로 ‘아들뻘’ 되는 카라얀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즉흥적으로 주관적인 영감을 자유로이 해석했다. 반면 당시 그와 ‘양대 산맥’이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지휘자는 작곡가가 창조한 음악의 단순 전달자’라는 생각에 악보에 충실한 음악을 선사했다.

카라얀은 이들의 중간 접점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나간다. 토스카니니처럼 작곡자의 의도는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음악적 느낌을 위해 특정 부분에서는 푸르트벵글러처럼 직관적인 해석을 가미해 과장했다. 그러다보니 카라얀의 작품은 매우 일관적이었다. 인간의 귀에 가장 아름답게 들리도록 깔끔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인위적 음색’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전제적인 흐름에 중점을 두다보니 섬세하고 세밀한 부분이 지니는 미학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피아노의 강약 대립은 의도적으로 두드러진다. 카라얀의 음악은 세련된 음색을 정갈하고 심오하게 유지하다가 절정으로 상승하면서 격정적으로 휘몰아친다. 이때에 박자가 더욱 빨라져 대부분 카라얀의 공연은 다른 지휘자 공연보다 일찍 끝나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학창 시절 음악사는 B학점이었으며 다른 음악학 과목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그의 커리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사에서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미학적 관점에 대한 의견을 한 번도 피력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나치당 협조 이력을 의식해 정치·이념적인 집필과 발언에 더욱 무관심했다.

한때 히틀러는 카라얀이 연주하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보고 독일적이지 못하다고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카라얀은 괴벨스와 헤르만 괴링의 비호를 받아 징집도 피하고 안정된 음악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시 상황으로 그의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45년 2월에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베를린이 잿더미가 되자 불타는 수도를 뒤로하고 이탈리아 밀라노로 아내와 함께 피신했다. 밀라노에서 빈털터리로 종전(終戰)을 맞은 카라얀은 가축수송 기차에 겨우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합군사령부는 나치당원과 나치 선전무대 활동경력을 이유로 그에게 활동금지령을 내리지만 이번에도 카라얀에게 행운이 날아든다.

카라얀은 1938년 아헨 음악총감독으로 재직할 때 연상의 성악가 엘미 홀거뢰프와 결혼했고, 1942년 이혼하자마자 9세 연하의 베를린 갑부집안 출신 아니타와 결혼한다. 아니타의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 재혼 전에 카라얀은 외부 연주에 집중하고 아헨극장 일에는 소홀했다는 이유로 이미 해고를 당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종전 후에는 마치 카라얀이 가엾은 유대인 아가씨와 결혼을 감행해 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카라얀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결국 1947년 10월 활동금지라는 족쇄를 풀 수 있었다.

사실, 카라얀의 성공에는 녹음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나치 전력으로 활동금지된 2년간 카라얀은 스튜디오 녹음 음반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전승국에서는 나치 동조 예술가들의 모든 외부활동을 규제했지만 협소한 스튜디오에서 관객 없이 녹음하는 것은 외부활동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카라얀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고, 음반이 만들어내는 음향의 마술에 푹 빠지면서 녹음활동에 몰두했다.

당시까지 녹음 음반은 단순한 공연기록이었을 뿐이었지만, 공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불필요한 소리를 배제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지휘자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3번이나 발매하는 기염을 토했고, 유럽인들 사이에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켰다. 카라얀은 일생 동안 통산 2억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3/4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목록 닫기

지휘봉을 든 ‘백발의 제왕’ 카라얀

댓글 창 닫기

2022/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