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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⑤ 희생양

기득권 지키려 ‘公共의 적’ 만들었다

남미 人身공양 中 분서갱유 유럽·美 마녀사냥…

  • 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기득권 지키려 ‘公共의 적’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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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응징한 마녀사냥

진시황은 유생과 술사를 잡아들여 심문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자 460여 명을 산 채로 파묻어 죽였다. 술사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은 분명 진시황의 과오일 수밖에 없지만, 그가 학문을 말살하고자 무고한 유학자 등을 집단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군주를 기만하고 유언비어로 백성을 현혹시켜 왕권을 약화시킨 이들을 일벌백계로 처벌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권에 저항하고 질서를 흔드는 것은 가장 심각한 범죄였다.

한때 유럽을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마녀사냥도 비슷하다. 마녀사냥 또는 마녀재판은 15세기부터 18세기 사이 유럽에서 광풍처럼 몰아쳤다. 수백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알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과장된 숫자고 수십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학계의 의견이 모아진다.

중세 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성경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선악과를 통해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인식 탓에 중세 기독교에서는 여성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강했다.

흔히 마녀사냥 혹은 마녀재판이라고 하면 중세 유럽에서 이단을 심판하는 종교재판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톨릭교회가 마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후다. 물론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전해져온 마녀의 존재에 대한 믿음 등이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한 바탕이기는 하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 이후 중세 유럽 세계는 크게 변했다.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종교개혁 움직임이 움트는 등 교회의 권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중세 사회의 몰락이 시작됐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마녀사냥이 등장한다.



마녀재판의 기원은 1428년 스위스 발레 주의 이단 심문소가 마녀 사건을 다루면서 시작됐다고 알려진다. 1435년에는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에서 마녀로 지목된 8명을 상대로 마녀재판이 열렸다. 이단자에 대한 처벌을 합리화하는 측면에서 이단자의 이상한 행동을 과장해 묘사했다. 공격의 대상이 된 것 중 하나가 사바트(Sabbat)라고 부르는 야간 집회였다. 악마에 대한 숭배와 유아 살해, 인육 먹기, 악마와의 집단 성교, 광적인 춤 등이 이 집회에서 이뤄진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마녀들이 전문적으로 영아나 유아를 살해한다는 풍문은 공포감을 더욱 높였다. 1617년 한 마녀재판에서 마녀로 지목된 콜레트 뒤 몽은 마녀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동묘지 근처에서 열리는 사바트 장소에 도착했더니 개, 고양이와 산토끼 형상을 한 악마들과 함께 있는 15명 정도의 마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마녀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어둡게 치장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녀들이 악마들을 숭배한 다음 개 형상의 악마와 집단 성교를 했다. 또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사바트를 떠날 때 악마는 검은 가루를 주면서 다른 사람과 가축에게 뿌리라고 명령했다.”

마녀사냥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결부되면서 증오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 마녀들은 전형적인 유대인 여자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마녀들의 야간집회를 유대인의 안식일인 사바트로 부르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녀 재판에서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의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사바트 참가 여부였다는 점에서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근거로 마녀사냥이 활용된 측면도 강하다.

돈 많은 과부가 주된 타깃

마녀재판은 대부분 가혹한 시련(ordeal)이라고 불리는 시험을 거쳐 유죄 여부를 결정했다. 우선 눈물 시험 방법이란 게 있다. 마녀는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으므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둘째는 바늘 시험이다. 악마들은 지울 수 없는 표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관찰하면 마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발가벗겨놓고 치밀하게 흔적을 관찰했다. 만약 몸에 점이나 부스럼 등이 있으면 바늘로 찔러 피가 흐르는지 시험했다. 마녀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고난 시험은 불로 지지는 방식이다. 불에 달군 쇠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의 살을 지지면 다치는지를 시험했다. 마녀라면 악마가 도움을 줘서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네 번째는 물에 빠뜨리는 시험 방식이다. 마녀 혐의를 받은 사람을 꽁꽁 묶어 깊은 물에 던져 물위로 뜨는지를 시험했다. 마녀라면 악마가 도와서 물위로 뜨게 한다고 생각해서 떠오르면 마녀로 간주해 화형에 처했다. 떠오르지 않으면? 당연히 물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많은 사람 특히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한 것을 미개한 문화 탓, 혹은 집단 광기 탓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당시 상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녀사냥이 무조건적으로 미친 짓이고 무지와 미개의 산물로 내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흑사병이 14세기 유럽을 휩쓸면서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 유럽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신적 기반인 기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금이 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뜩이나 십자군 원정과 르네상스, 종교개혁의 태동 등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중세 봉건 질서는 크게 요동쳤다. 중세 봉건 질서를 지탱하는 계급관계가 무너졌고 사회경제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국가와 교회에 대한 외경심을 환기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고, 또한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 필요했다.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전쟁으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다. 마녀사냥은 여성을 비하하고 악마화하며 여성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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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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