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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18

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단종 유배지 강원 영월

  • 최학│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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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과 영월

청령포에서 차를 달려 30분이면 닿는, 하동면 와석리 마대산 자락에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가 있다. 그의 묘와 집터가 산언덕에 있으며 근래 지은 문학관이 이웃해 있다. 청령포가 물에 갇힌 유배지라면 이곳은 산으로 닫힌 또 다른 귀양지다. 소년왕은 그 육신이 갇혀 있었지만 김삿갓은 정신의 차양 속에 제 일생을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간을 찾아든 때는 벌써 해질녘이었다. 늦가을, 산속 냉기가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흙길이 질척거려 걷기도 힘이 들었다. 이윽고 다다른 그의 묘소. 외로운 봉분 하나가 석양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 외롭고 스산한 그의 생애와 다를 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묘 자락에 소주 한잔이라도 붓고 싶지만 그럴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늘은 높지만 머리 쳐들 곳 없고,

땅은 넓지만 다리 펼 곳이 없네.



밤중에 누각에 오른 것은 달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요,

사흘 굶은 것은 신선이 돼보겠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네.

- 김병연 시 ‘스스로 탄식하며(自嘆)’

부랑의 생애. 그의 떠돌이 삶은 30년이 넘는다. 따라서 그의 이곳 산중 삶도 두세 해를 넘지 않는다. 스물 초반에 떠난 집을 해골이 돼서 찾아왔다. 구천을 방랑하는 그에게는 이제 제 죽음의 징표라고 만들어놓은 무덤조차 거추장스러우리라.

나도 그와는 아주 연분이 없지 않다. 1979년 봄, 당시 나는 장편 역사소설 한 편을 쓴다며 허구한 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뒷날 모 일간지에 연재됐던 졸작 ‘서북풍’이 그것이었는데 이야기는 홍경래 난에 관한 것이었다. 평안도 박천에서 군사를 일으킨 홍경래는 파죽지세로 가산, 선천 등 인근 고을을 점령한다. 가산 군수 정시는 끝까지 저항하다 봉기군에게 참살되지만 선천 부사 김익순은 인부와 병부를 내놓으며 순순히 항복한다. 이 장면을 그리는 과정에서 나는 벌써 삿갓 김병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김익순의 항복에는 이미 김병연의 비극적 생애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익순의 친손자인데 그때 나이 겨우 넷이었다.

난이 평정되고 김익순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자 김병연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산간 오지 영월로 들어와 화전민이 된다. 스무 살 나이 때 김병연은 영월 동헌의 백일장에 나아가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논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했다. 그러나 뒤늦게 집안 내력을 알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백일장 이전에 벌써 자신의 가족사를 알고 있었다는 학계의 주장도 있는데 음미해볼 만하다. 20대 초 그가 서울로 올라가 이름을 바꾸고 권문가에서 공부를 한 행적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결국 그는 영월로 돌아왔다가 처자식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오르는데 한때나마 조상을 욕하면서까지 입신양명을 꿈꿨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그러한 유랑을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그는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각지를 방랑하며 수많은 시를 지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유랑생활은 57세로 그가 전라도 화순에서 숨지면서 막을 내렸다. 화순에 있던 그의 무덤은 차남 익균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는 특유의 재기와 해학으로 세상을 풍자한 즉흥시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자신 양반의식을 버린 적은 없었다. 그의 시들이 함량 미달의 양반들을 조롱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그리곤 있지만 봉건사회의 체제와 질서를 비판한 경우는 없었다. 이것이 그의 시가 가진 한계였으며, 운명적 충격을 소화하는 데 평생을 소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근원적 요인이기도 했다.

신동아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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