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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⑩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질문과 비판, 하려면 똑바로 해라

  •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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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나라는 공화정이거나 왕정이다”라 했고, 한편으로 “공화정은 ‘왕정이 아닌 것’”이라고 정의했다. 명백한 이분법이자 동어반복이다.

우리가 서양의 절대주의 시대, 즉 봉건국가 말기와 근대국가 초기에 나타나는 상비군(예를 들면 국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왕권의 시대를 ‘절대왕정(absolute monarchism)’이라고 한다. 봉건 귀족의 보수적 지지와 특권적 모험상인(그들은 당시 미숙했던 부르주아지인데, 제국주의의 선조들을 이렇게 부른다)의 계급적 이해 위에서 성립한 체제였다.

나의 관찰과 기억으로는, 서양의 어떤 왕정도 ‘전제적(專制的·despotic)’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가장 ‘전제적’이었을 때조차 그들은 ‘봉건적(封建的·feudal)’이라거나 ‘절대적’이라고 학술용어로 점잖게 부른다.

의미론적 질문의 오류

이와는 달리, ‘전제적’이란 말은 ‘동양’과 관련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전제주의(despotism)’란 말은 동양 사회의 정치적 특성, 아니 단지 정치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사회의 일반적 특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예견된’ 개념이라는 점이다.

의심나면 발음해보면 된다. ‘오리엔탈 데스포티즘(oriental despotism)’, 얼마나 부드러운가. 반면에 ‘웨스턴 데스포티즘(western despotism)’이나 ‘옥시덴탈 데스포티즘(occidental despotism)’을 발음해보라. 더 상식적인 실험을 해보자. ‘전제왕권’ 하면 머리에 무엇이 연상되는가. 루이 14세인가, 태종(太宗)인가. 단연코 후자일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조선 왕정은 전제적인가, 아닌가?’ 사실 ‘조선 왕권의 전제성’은 종종 검증되지도 않고, 즉 이런 질문을 거치지 않고 ‘전제적인 왕조 정부 운운’ 하며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무색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조차 정확한 질문은 아니다.

이 질문은 곧장 우리에게 ‘전제적’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전제정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국가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여 민의나 법률에 제약을 받지 않고 실시하는 정치’라고 정의되어 있다. 아직 조선 왕정에 대해 이 이상의 개념 규정을 가지고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종종 이러한 질문은 ‘조선시대 정치구조는 어떠했는가’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조선시대 정치를 뭐라고 이름 붙일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왕정의 전제성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뤄진 적도 없지만, 이뤄진다 해도 ‘이 얼룩말이 검은 줄을 친 흰 동물이냐, 흰 줄을 친 검은 동물이냐?’ 이상의 생산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모든 역사적 질문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의미론적 맥락에서 제기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기호와, 우리가 확보한 과거의 증거 사이에서 어떤 이해할 수 있는 연관성을 확보할 것인지가 역사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개념사가 풍부하게 보여줬던 것처럼 어떤 용어가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용어로 과거의 사실을 규정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불임(不姙)의 논법은 더 이상 안 된다. 의미론적 질문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그럼 너는 잘했냐?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포스터. 야당인 민주당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고 했더니, 자유당에서 ‘갈아봤자 더 못산다’고 했다. 이런 반론은 법정에서는 물론, 역사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 나는 원치 않게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다. 내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출판했던 시기가 하필이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개봉 시기와 겹쳤기 때문인데, 나는 기존 학계의 통설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던 터이므로 세인들의 궁금증과 관심을 자아내게 됐던 것이다. 나에 대한 반론도 있었는데, 그중 이런 것이 있었다.

“광해군을 쫓아낸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지켜졌는가. 그 명분은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광해군 시기에 벌어진 부정을 바로잡겠다던 이들은 광해군 때 권신들이 했던 나쁜 관행을 답습했다. 예컨대 광해군 때 권신들이 백성 등에게서 뺏은 토지는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이를 비난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시중에서 불렸으며 익명서도 나돌았다.”

광해군대의 어지러운 정치 때문에 반정을 했다고 하지만, 반정 이후에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논리다. 말하자면 ‘그놈이 그놈이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는 선거 구호를 조선 버전으로 바꾼 셈이다. 실제로 광해군대 세력가들이나 반정 이후 공신(功臣)들이나 마찬가지라는 사료도 있다.

그러나 공신들의 이러한 특권 세력화가 끊임없이 견제되고 공론화됐던 것이 인조대의 정치사였다. 즉 곪아서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서 딱지가 앉는 과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인조 초반의 재정이나 민생 등 경제적 어려움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나는 내 책에 가해진 ‘그놈이 그놈이었다’는 식의 반론을 ‘물타기’라고 불렀다. 물타기는 그 자체로 역시 탈정치화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무능했다고 해서 이승만 독재와 부패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타자에 기대어 자신의 불의를 합리화하는 데 이르면, 물타기 논리는 곧 비열한 타락의 논리이기도 하다. 부부싸움에서 이런 어법이 지속되면 파탄이 멀지 않았다.

위와 같은 반대질문(counter-question)은 법정에서 유효할지 모르지만 역사 공부 세미나에서는 의미 없다. 법정은 목표가 정의(正義)를 얻는 것이지만, 세미나룸의 목적은 먼저 역사의 진실을 좀 더 정밀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A냐, B냐를 둘러싼 싸움은 사실 C가 진실일지 어떨지를 판단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A와 비(非)-A 사이의 차이는 단지 영(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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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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