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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18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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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연하 모차르트와 교유

여름 시즌뿐 아니라 가문과 관련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작의 개인적인 여가 선용까지 신경 써야 했기에 하이든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가 섬긴 에스텔하지 공작 4명은 인색하지 않았으며 그의 외부활동에 대해 ‘자애로운 동의’를 해줬다. 아무리 사치스러웠다 해도 외딴곳에 자리한 시골 궁전이었기에 하이든은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은 온 유럽에 퍼졌고 그 결과 두 차례의 영국 연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극진한 환대 속에 자신이 20년 동안 번 액수 이상을 몇 년 안에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스텔하지 가문의 4번째 수장이 그와 다시 일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자 하이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은혜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성격 때문인지 그의 음악은 모차르트처럼 완벽하거나 베토벤처럼 지적이지 않았지만 친근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는 모차르트보다 24세나 많았지만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눴다. 49세의 하이든이 25세의 모차르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진솔하게 다가갔다. 모차르트도 이에 화답해 1782~85년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6곡의 ‘하이든 4중주’를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이 곡의 일부는 하이든이 비밀결사조직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축하 자리에서 먼저 가입한 모차르트에 의해 연주됐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Free’(자유)와 ‘Mason’(석공)이라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원래는 석공조합조직으로 출발했다. 기하학과 자연법칙을 중시하던 석공들의 모임은 지식인들이 참여하면서 점차 사교모임으로 확장됐고, 자유 평등 박애의 3대 이념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적을 품었다. 이후 유럽은 물론 미국으로도 전파돼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가입하면서 이목이 집중됐다.



에스텔하지 가문의 니콜라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은 그간 예술에 쏟아 부은 막대한 지출을 줄이려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소속 예술단체의 규모도 크게 줄였다. 그럼에도 하이든은 작고한 공작의 유언에 따라 연금과 연봉은 그대로인 채 과중한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불행한 결혼생활

1790년 12월 하이든은 초청을 받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 모차르트와 만찬을 함께했다. 그때 모차르트는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향하는 하이든의 건강을 우려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노인 하이든의 건강 때문이 아니라 1년 뒤에 병사한 모차르트 때문에 마지막 만찬이 되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하숙집 딸 알로이지아 베버와 사랑에 빠졌다가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츠와 결혼했다. 하이든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이든은 가발 제조업자 켈러의 딸들에게 음악교습을 하면서 막내딸인 테레사를 깊이 사랑했으나 수녀가 된 테레사 대신 언니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하이든은 마리아 안나와 극심한 불화를 겪었다. 두 사람은 자식도 없이 끔찍한 결혼생활을 했고, 서로 늘 새로운 연인을 만들곤 했다.

기악을 성악 반열에 올린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하이든하우스

헤어진 연인이 가난해지면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던 하이든이지만 베토벤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스물이 갓 넘은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하이든이 영국을 오가고 에스텔하지 가문의 연주로 동분서주하면서 교습 시간이 줄어들었다. 베토벤은 이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부정적으로 회고했다. 하이든도 베토벤의 ‘오만방자하고 배은망덕한’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교습 시간이 줄자 하이든은 베토벤을 다른 작곡가에게 보내려고 했는데, 성격 급한 베토벤은 그때 이미 비밀리에 다른 개인교습을 받고 있었다.

1800년 하이든은 스코틀랜드 출신 시인 제임스 톰슨의 전원시 ‘사계’를 각색해 영어 대본의 오라토리오를 만들었다. 톰슨의 시는 5541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는데 하이든은 이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부 39곡으로 편집해 풍광, 온도, 색채 등 각각의 계절적 특징에 적합한 화성과 박자, 멜로디로 생생하고 조화롭게 표현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3명의 농민이 목가적으로 계절의 차이를 노래하지만 일관성 부족이라는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천지창조’엔 여러 명의 천사가 등장해 신에 대해 서술하지만 ‘사계’는 인물이 다채롭지 못하다는 것을 하이든도 안타까워했다.

헤어진 연인도 살갑게

하이든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가장 상업적이고 예술적인 작곡가였으나 다양성을 추구하는 빈의 관객은 베토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제자 베토벤은 이미 스승 하이든의 가르침보다 높고 멀리 나가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 스승의 음악적 경쟁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베토벤이 아무리 자신을 험담하고 스승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해도 하이든은 워낙 관용적인 사람이라 베토벤의 음악을 폄훼하거나 격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년의 하이든은 ‘사계’ 등 대작을 만들면서 기력이 노쇠해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변함이 없었다. 하이든이 유언장을 작성할 때는 아내 마리아 안나가 사망한 후였기에 그는 모든 옛 연인에게 섭섭해하지 않을 정도의 돈을 남겼으며 친척과 지인들에게도 골고루 분배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공한 1809년 어느 날, 병상의 하이든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 빈에 주둔한 프랑스 장교들과 빈의 귀족, 지식인, 평민 등 생각과 사상, 이해관계가 다른 각계각층의 추모객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기렸다. 소탈하며 친근하고 유쾌한 그의 음악은 비록 열렬한 추종자는 많지 않을지라도 입에 거품을 물고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그럴싸한 논리로 반대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고 늘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여기고 만족하게 살았다. 하이든의 음악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천재들과 함께 사랑받으면서 굳건히 살아남은 것도 이런 인생관 때문일까.

신동아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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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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