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원기 부족 탓 정신질환 귀신 쫓는 돌팔이가 병 키워

인조 말려 죽인 ‘저주病’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2-20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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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부족 탓 정신질환 귀신 쫓는 돌팔이가 병 키워
    질병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몸에서 에너지(氣)를 빼앗아간다. 따라서 질병에 맞서려면 음식을 잘 먹고 신진대사를 활성화해 에너지를 보호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질병이 식욕을 떨어뜨리고 운동능력을 잃게 만든다는 점. 설사 식욕이 있다 해도 위장과 간장의 운동능력이 떨어져 음식물을 에너지로 만들지 못한다. 병이 심할수록 이런 악순환은 심화되고,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면 죽음을 맞는다.

    병이 생기면 일단 생활 전반을 점검해 에너지 소모를 줄여야 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공급해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 음식은 곧 약이다. 이처럼 평상시보다 섭생에 서너 배의 노력이 집중될 때 병은 물러간다.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첫 번째 주체는 의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건강은 누군가가 보증해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 식사, 운동, 휴양, 스트레스 등 생활습관 전반을 잘 관리해 몸을 북돋울 때만 지켜낼 수 있다.

    숙부 광해군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된 인조 이종(李倧·1595~1649)은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재위 26년(1623~1649) 내내 ‘저주 타령’만 하다 건강을 해쳤다. 몸이 아프면 모두 저주에 의한 것으로 여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괴롭히고 죽였다. 한평생 정통의학을 배격하고 사술(邪術)에 의지하다 생을 마감했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定遠君·1580~1619) 이부(李?)다. 인조는 후궁의 손자 신분으로,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선친부터 왕의 풍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공빈 김씨의 아들로 선조의 첫 번째 서자였던 임해군(臨海君·1574~1609) 이진(李?)과 더불어 일찍이 악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실록은 “여러 왕자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었다.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 “정원군의 궁노들이 백모가 되는 하원군의 부인을 가두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데도 오히려 방조해 종친들의 분노를 샀다”고 적고 있다. 백수건달이 따로 없었던 셈. 광해군도 설마 이들이 후일 반정의 주역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왕실만 먹던 우유죽의 위력

    인조의 질병은 어머니 인헌왕후 구씨, 즉 계운궁과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됐다. 역대 왕은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이 생기면 근신한다는 의미에서 고기반찬을 먹지 않거나(撤膳) 수라에서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減膳)을 하곤 했다. 일부 왕들은 신하의 당파 싸움을 다스리기 위해 단식(却腺)을 하기도 했다.

    인조는 즉위 4년째인 1626년 1월 어머니 계운궁이 죽자 광해군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철선과 감선을 너무 심하게 하다 건강을 해쳤다. 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오랜 기간 지속된 철선과 비정상적으로 적은 식사량 때문에 몸이 수척해지고 얼굴이 검어지고 목소리까지 변했다. 특히 식사량은 문제가 될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근일 성상께서 늘 묽은 죽을 먹는데 몇 홉에 불과하고…전하께서는 지난겨울 어머니 병을 돌보실 때 풍한을 무릅쓰고 찬 곳에 오래 있었고 지나치게 애통해 해 옥체가 수척해지고 용안이 검게 변하셨다.”

    인조는 “건강이 염려되니 지나친 감선을 그만두라”는 신하들의 호소를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실록 곳곳에서 이런 대목이 드러난다.

    인조의 건강은 타락죽을 먹고 조금씩 회복된다. 타락죽은 쌀죽에다 우유를 넣어 끓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 소에서 나오는 우유는 젖소보다 양이 적어 왕실에서만 조리에 썼다. 조선 후기 서유구가 쓴 박물지 ‘임원십육지’에는 소에서 젖을 많이 얻기 위해 유방을 발로 차고 꼭지를 비트는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소와 농가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 3월부터 9월까지 목초가 풍성할 때만 시행됐으며, 사용처를 왕실로 한정했다.

    왕실에서 타락죽을 장기간 음용한 것은 우유의 신비한 효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한의학은 우유의 효능을 다양하게 설명한다. 진액을 만들어 장을 촉촉하고 윤기 있게 하는 한편, 원기를 회복시키며 당뇨병, 변비를 치료한다. 우유를 먹으면 설사를 하는 사람은 우유에 마늘을 넣어 3~5차례 끓여서 먹으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면 배의 냉기가 사라지고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

    효심 아닌 ‘도덕성 과시’

    원기 부족 탓 정신질환 귀신 쫓는 돌팔이가 병 키워

    저주에 쓰이는 인형.

    인조의 건강은 1623년 인목대비의 상(6월 28일)을 당한 이후 더욱 나빠졌다. 인조 10년 8월 3일의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하께서 상사를 당한 이래로 밤낮으로 애를 태운다. 수면과 수라에 절도를 잃어버렸다. 병이 나 시중을 든 지 3개월이 지났지만 곡읍(哭泣)을 슬프게 하고 푸성귀 밥을 물에 말아 드시니 손상된 건강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증상은 날로 악화된다. 8월 25일엔 안색이 검게 변하고 땀이 비 오듯 하면서 몸에 오한이 생겨 반신이 마비됐다. 약방에서는 상사로 인한 과로가 큰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사람이 무리를 하면 큰 병이 생기고 내상을 입게 된다. 병을 일으키는 데에는 과로보다 더한 것이 없고 곡읍보다 심한 게 없다”면서 “지나친 슬픔과 과로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도덕성 과시를 위한 인조의 이렇듯 과도한 반응은 ‘하늘이 낸 효성’ ‘신민이 감탄하면서 걱정한다’는 등의 찬사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실록에 실린 얘기들은 인조의 과로와 슬픔이 인목대비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만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목왕후의 상이 난 첫해, 글이 쓰인 비단 백서(帛書) 3폭을 궁중에서 발견했는데 임금을 폐하고 다시 세우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상(上)이 척속들에게 백서를 보여주고 얼마 후 친히 가져다가 불살라버렸다. 어떤 사람은 왕후가 서궁에 유폐당했을 때 직접 쓴 것이라고 말하지만, 외부 사람들은 그러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인조는 이 백서가 인목대비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찌감치 저주를 건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인조는 ‘저주병’에 들렸다. 심지어 인목대비의 측근이자 선조의 후궁이던 귀희(歸希)와 상궁 옥지가 자신을 죽이려는 저주를 걸었다는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실록의 내용은 끔찍하다.

    “귀희의 계집종 덕개는 ‘나인 이애단의 동생 이장풍이 흰 고양이의 머리를 주방에 놓아두었으며 이애단은 죽은 아이의 머리를 가지고 와 왕이 장보문에 문안드리러 다니는 길에 묻도록 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도 자신을 저주했다고 몰아붙였다. 사건은 인조 17년인 1639년 10월 14일 원손이 거주할 예정이던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를 할 때 쓰는 물건들이 발견되면서 비롯됐다. 일단의 무녀들 외에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 중에는 정명공주의 나인과 인목대비의 궁녀가 있었다. 인조는 이 사건에 정명공주가 관련된 것으로 확신하고 공주 집 나인들을 체포해 진실을 캐내려고 했지만 최명길을 비롯한 대신들이 “선왕의 핏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막아서자 그때서야 중단했다.

    ‘여우에게 홀린 듯한 病’

    인조의 이런 처세는 인목대비에 대한 상례(喪禮)가 진심이 아니라 도덕성 과시에 불과했으며 그가 광해를 내쫓은 사대부의 여망을 안은 유학적 인간이라기보다 저주를 믿는 범부(凡夫)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유학은 질병을 치료함에 있어 그 원인을 저주나 그릇된 기운(邪氣)에서 찾는 행태를 배격하고 환자 본인의 마음에서 찾는다. 치료도 마음의 근본을 되돌아보는 수양론에 무게를 둔다. 예조참의 이준은 인조의 저주설에 의한 불안증에 강력한 제동을 걸며 유학적 의료 논리를 전개한다.

    “왕의 병은 저주할 때 쓰는 물건인 썩은 뼈가 어떤 작용을 일으켜 생겨난 괴질이 아니라 원기가 허약해 생기는 호매(狐魅·여우에게 홀린 듯 정신 줄을 잃는 질환)나 사수(邪?·귀신이 붙은 듯 제정신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되는 증상)라는 질환으로 보인다.”

    이준은 인조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뱀 그림자’ 고사를 빗대어 설명한다. 진나라 주부 두선이란 자가 상관인 응림의 집에서 술대접을 받고 집에 온 후 갑자기 큰 병을 앓게 됐다. 두선은 술을 먹을 때 술잔에 어른거린 붉은 뱀의 그림자가 저주로 작용해 자신의 병이 생겼다고 확신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응림은 두선을 초대해 벽에 걸린 붉은 활을 가리키며 “술잔에 비친 붉은 뱀은 저 활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설명했고, 이후 두선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

    이준은 이런 고사를 인용한 후, 유학의 조종(祖宗)인 주자의 치료론을 덧붙였다. ‘병중에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오로지 마음을 안정하고 기운을 기르는 데만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의보감’ 사수문의 전체적인 해석도 대체로 유학자들의 논리에 부합한다.

    “사람이 헛것에 들리면 슬프지 않은 일에도 슬퍼하고, 마음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정신이 산란해 늘 술에 취한 것 같고 미친 말을 하며 놀라거나 무서워한다. 벽을 향해 슬프게 울기도 한다. 꿈에 헛것과 성교를 하고( 房事), 가위에 잘 눌린다. 추위와 더위가 매 시간 반복하며 명치끝에 꽉 찬 느낌이 들고 숨결이 가빠오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이것은 모두 정신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헛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원기가 극도로 허약해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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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를 보충하는 방법도 건강상식에 준한다. 현대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원기가 모자랄 때는 음식물로 보충한다. 쌀, 고기, 과일, 채소 등 여러 가지 음식물은 모두 몸을 보호한다. 약은 눅눅하고 찐득한 것을 쓴다. 녹각교, 아교 조청, 졸인 젓, 꿀, 인삼, 행인, 당귀, 숙지황 등을 쓴다.”

    하지만 동의보감은 일반인의 믿음을 인정하면서 사수를 질병으로 보는 견해도 기록했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어서 3년이 지나면 혼신(魂神)이 풍진(風塵)이 된다. 그것이 사람에게 달라붙으면 병이 된다. 대체로 헛것을 낀 사기(邪氣)가 온몸에 돌면 오한과 신열이 나고 땀이 비 오듯 하며 정신이 착잡해진다. 여러 해가 지나면 점차 심해져 죽을 수 있고, 죽은 뒤에는 곁 사람에게 옮아가서 한 집안이 망하는 수도 있다.”

    무소의 뿔인 서각(犀角)과 사향(麝香), 붉은 주사(朱沙)나 종유석(鐘乳石)을 갈아 먹는 것을 치료법으로 제시했다.

    귀신 쫓는 사이비 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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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말 위에서 팥죽을 먹었다 해서 이름 붙은 서울의 말죽거리.

    하지만 인조는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저주론에 더욱 골몰한다. 왕의 원기를 보충해 질병을 치료해야 할 내의원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술 더 뜬다. ‘세간에 사기 퇴치에 특효인 침법을 소유한 이형익이라는 자가 있으니 급료를 주고 불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인조는 “괴이하고 거짓돼 미덥지 않은 술법을 쓰는 자”라고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증상이 심해지자 결국 그를 불렀다.

    지방의 떠돌이 침의였던 이형익은 스스로 “번침(燔鍼)으로 사기를 물리친다”고 공언하고 다녔으며 내의원 의관들도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번침에 대한 내용은 침구서마다 해석과 용도가 제각각인데, 침을 따뜻하게 해서 놓는 것만은 틀림없다.

    ‘황제내경’ 영추편에는 ‘쉬자(?刺)라는 것은 번침으로 마비증을 치료하는 데 사용한다’고 돼 있으며 당나라 왕빙은 ‘쉬자는 화침(火針)’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명대의 장개빈은 ‘번침은 침을 시술한 이후 침 위에 뜸을 떠 따뜻하게 데우는 것이고, 쉬자는 침을 불로 달궈 적색이 된 후에 시술하는 것’으로 구분했다. 같은 명대의 ‘침구대성’은 번침과 화침, 온침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번침은 체온 정도로 달군 침이고 화침은 마유(麻油)에 적셔 불로 달군 침이며 온침은 침과 뜸을 겸용한 것으로 시골에서 많이 사용한다’고 소개했다.

    이형익과 의관들은 인조의 질환을 음적인 저주나 귀신이 일으키는 사기의 질환으로 보고 뜨겁고 붉어 양기를 가진 번침으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 이형익은 정식 의관이 아니었다. 충청도 대흥지역에서 활약한 침의인데 인조 11년 내의원의 천거로 임시 채용됐다. 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모두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흥 땅에 이형익이란 자가 있는데 침법을 약간 알아 사기를 다스린다고 세상 사람을 현혹했다”고 비판했다. 이형익의 진찰 능력에 쐐기를 박는 대목도 있다.

    “왕세자가 앓아오던 감기가 오랫동안 낫지 않아 이형익에게 진맥을 하라고 하자 그는 ‘이 병은 사기에 의해 생긴 병이므로 침을 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가 세자에게 침을 맞으라고 하자 세자는 ‘감기인데 무슨 사질(邪疾·사기가 일으킨 질환)입니까’라며 침 맞기를 거부했다. 세자의 감기는 얼마 안 가 저절로 나았다.”

    홍문관에서는 나름의 검증 결과까지 열거하며 이형익의 진료를 비난했다. “오래전부터 괴이한 방법과 신통한 비결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지만, 사대부 중에 그의 침술로 효험을 본 사람이 없고 오히려 더러 해가 따랐다.”

    심지어는 침 자리조차 제대로 못 잡는 일도 있었다. 인조 11년 10월 7일 기록에는 “상(上)이 이형익에게 번침 치료를 자주 받았는데 혈 자리가 좌우에 차이가 있어 다시 확인했다”고 쓰여 있다.

    이형익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1612~1645)의 죽음과도 깊숙이 관련됐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에도 연루됐고 학질에 잘못 대처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았지만 침을 놓을수록 소현세자의 병증은 심해져만 갔다. 소현세자의 병환은 학질에서 시작된다. 인조 23년 4월 23일 어의 박군은 소현세자의 질환을 학질로 판정했다. 4월 27일 기록에는 “치료 2~3일 만에 세자가 죽고 말았다”는 기록과 함께 이형익에 대한 질타가 잇따른다.

    “의관 이형익이 사람됨이 망령되어 괴이하고 허망한 의술로 세자가 오한전율(추워서 덜덜 떠는 증상) 증상이 있는데도 증세 판단 없이 침만 놓았으니 국문하소서.”

    소현세자가 걸린 학질은 조선시대에는 아주 흔한 병으로 ‘학질을 앓고 나야 사람이 된다’고 할 정도였다. ‘하루걸이 병’이라고도 불렸는데 하루 걸러 발열과 오한을 반복하는 삼일열 말라리아 증세를 가리킨다. 삼일열 말라리아의 치사율은 소아를 제외하면 별로 높지 않았고 자연치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자 잡은 선무당

    이형익은 치료에서도 정통의학과는 거리가 먼 오판을 한 것 같다. 오한전율은 양기가 부족해 내부의 저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도 이럴 때는 “약만 쓰고 침을 놓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돼 있다. 그런데도 이형익은 자신의 침술만을 자랑하면서 왕의 원기를 훼손했다. 학질이 치명적인 질환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학계에선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정설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인조 23년 6월 27일의 실록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사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目)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실록은 이형익에 대한 의혹도 제기한다. 인조의 애첩인 후궁 조소용이 인조와 세자 내외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적었다. “조소용이 세자 및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밤낮으로 왕 앞에서 세자를 헐뜯었다. 대역부도의 행위 및 저주를 했다고 참소했다.” 실록의 또 다른 기록은 조소용과 의관 이형익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며 의심을 한다. “이형익이 조소용의 어미 집에 치료를 위해 왕래했는데 저잣거리에 추잡한 소문이 나돌았다.”

    소현세자에게 나타난 증상을 일으키는 독약은 어떤 것일까. 조선 후기 법의학서 ‘증수무원록’에 기록된 독약은 고독과 과실, 금석, 서망초, 비상, 야갈이 있다. 하지만 ‘7개 구멍에 피를 쏟으면서 죽는’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독약은 서망초뿐이다. 서망초는 목련과에 속한 협엽회향으로 양자강 중하류에서 자라며 그 독성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개어서 피부병에 붙이기도 하는 약물이다.

    실록은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도 인조가 시신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의 과학수사대(CSI) 기록인 증수무원록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인조는 대신들의 잇단 국문과 처벌 요구에도 소현세자 사후 더 적극적으로 이형익을 비호했다. 이형익은 왕 앞에서 거침없는 언행을 하다 대신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인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형익의 은밀한 청을 받고 그 형제와 자식들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마저 박대(薄待)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예법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았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해(인조 24년) 1월 소현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강빈에 대한 진심을 김자점에게 토로했다. 김자점은 인조와 조소용 사이에서 태어난 효명옹주를 자신의 손자와 결혼시켜 왕실의 인척이 된 인물로, 인조의 복심으로 통했다. 조소용 이형익과 함께 소현세자 독살의 배후로 지목받는 인물이다.

    저주한 사람 죽여야 건강?

    ‘강빈이 심양에서 귀국할 때 재물을 많이 싣고 왔는데 이를 온 조정에 뿌린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는가. 예전에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적에 제후들에게 돈을 뿌려 정권을 잡은 자가 결국은 대업을 성취하였으니 어찌 이 일과 다르겠는가.’

    인조가 소현세자 부부를 자식이 아니라 왕권을 노리는 대결세력으로 생각했음을 자인하는 말이다. 인조는 그해 3월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 대신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큰며느리 강빈과 그녀의 남자 형제들을 왕의 음식(전복구이)에 독약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사사했다. 대사헌 김광현이 “소현세자의 병을 형편없이 간호한 이형익의 죄를 강력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 인조는 오히려 “김광현이 강빈 오빠의 사위여서 그런 말을 한다”고 나무랐다.

    친어머니 계운궁과 인목대비의 상례를 거치면서 악화된 인조의 건강에 결정타를 입힌 사건은 재위 14~15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오랑캐로 비하했던 청나라에 대한 굴욕적 사대관계 수립과 전란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인조의 병증을 악화시킨 주요인이었다. 당시 인조가 얼마나 급박한 처지에 있었는지는 서울의 ‘말죽거리’라는 지명의 유래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인조가 피난을 가다 배가 고파 동네 주민에게 팥죽을 청했는데 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말에 앉은 채로 죽을 먹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듯 객관적 발병 원인이 있었음에도 인조는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질병을 저주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저주하는 무리를 없애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며 너무도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강빈과 그 형제들이 죽고 난 다음 해인 인조 25년 4월에는 강빈이 자신을 저주해 몸이 아프다며 강빈의 독약사건에 대한 재심을 벌여 관련자 14명을 사사했다. 그리고는 “강빈의 무리가 곤장을 맞고 죽은 뒤로는 환절기가 되면 으레 아프던 허리와 다리 관절의 통증이 재발하지 않았다. 저주하는 음모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인조 21년에는 상궁 이씨가 저주사건에 휘말렸다. 인조는 상궁 이씨가 자신의 후궁이자 애첩인 조소용을 투기해 저주했다며 사약을 내렸지만 실록은 ‘조 귀인이 스스로 저주해 이씨를 모해하려고 만든 사건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인조 25년 6월에는 ‘창경궁에 저주의 변이 많이 일어난다’며 창덕궁을 수리하게 했고, 그해 11월에는 ‘궁의 터가 좋지 않아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다. 궁을 옮기는 게 침의 효험보다 빠르다’는 이형익의 말을 듣고 다음 날 창덕궁으로 궁을 옮기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마지막까지 사술에 매달려

    천하의 돌팔이 침의 이형익의 전성시대는 인조가 죽기 1년 전인 인조 26년부터 시작된다. 실록에 번침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물론 요안혈에 뜸을 뜬 기록도 나타난다. 요안혈은 허리 쪽에 있는 경외기혈로 제4, 제5요추 극상돌기 양쪽 가까이에 있다. 일반적으로는 폐결핵이나 기관지염, 요통 당뇨 등에 효험이 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는 이런 적용질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지만 이형익은 계속 뜸을 떴다.

    요안혈에 뜸을 뜨는 치료는 신료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밤에 왕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치료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계해일 한밤중 시간을 빌려 뜸을 떴다. 이는 중국 송나라 때 장고라는 사람의 임상적 경험담을 모아 편술한 ‘의설’이라는 책에 따른 것으로, 이 책에는 ‘폐결핵을 치료하려면 오방(五方)을 지키는 여섯 신이 모두 모이는 계해일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요안혈에 뜸을 떠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인조는 뜸을 뜬 지 한 달 뒤 “요안혈에 뜸을 뜨고 난 뒤에도 별로 차도가 없으니 아직 딱지가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 하면서 오히려 이형익을 위로한다. 형조판서 조경은 펄펄 뛰면서 어떤 의서에도 근거가 없는 치료를 했다며 이형익을 벌할 것을 주청했지만 인조의 대답은 “딱지가 떨어지지 않았다”뿐이었다.

    인조 27년 5월 1일, 왕은 스스로 상한(傷寒·감기)을 얻었다고 진단하고 이형익을 불러 침을 놓게 했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의관들을 소집해 진찰을 하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관들은 인조의 병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시약청도 설치하지 않았다. 5월 7일 의관들은 “상이 미시에 한기가 있고 신시에 두드러기가 크게 나고 유시에 한기가 풀렸다. 의관들이 다 말하기를 오늘은 상의 증세가 갑자기 차도가 있으니 학질 증세가 조금 있으나 곧 그칠 것이다”며 낙관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기록이었다. 인조는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원기 부족 탓 정신질환 귀신 쫓는 돌팔이가 병 키워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인조는 결국 자신의 큰아들인 소현세자처럼 큰 병도 아닌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자신의 건강을 이형익에게 맡기지 않고, 저주나 사기를 믿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살아남은 소현세자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 시대를 열지 않았을까. 인조의 삶은 지도자의 건강에 대한 철학과 믿음이 국가와 가족, 자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진 이라 하더라도 건강 비결은 소박하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고쳐나가며, 평소 건강상식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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