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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영하 17도 山中에서 새가 되어 날다

월정사의 눈발 흩날리는 새벽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영하 17도 山中에서 새가 되어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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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현기 스님의 깊은 말씀이 있으신, 저녁 공양 이후의 ‘현기 스님과의 차담’ 시간에 잠시 꾸벅 졸기는 했으나 어렵사리 9시까지 버텼고, 이후 잠에 골아떨어졌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의 월정사를, 그 기막힌 눈이 거룩한 위로처럼 드리워진 사찰이며 산책로며 오가는 차량 한 대 없는 도로 위를 걸어볼 수 있었다. ‘달’의 ‘정기’ 아니런가. 보름달이 높이 떠 하얗게 세속을 비추고 있어서 특별한 가로 조명이 없어도 능히 사찰 안팎을 걸으며 체감온도 영하 17도의 오대산 골짜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 있었다.

강퍅한 사람도 詩人 되는 곳

이런 곳에서라면 아무리 마음이 강퍅한 사람도 한순간에 시인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시인이라면 오죽하겠는가. 한국 서정시의 드높은 경지를 일구고 있는 시인 고형렬의 시 ‘지금 월정사’가 생각나는, 그런 고즈넉하면서도 그윽한, 그야말로 달의 정기가 서려 있는 월정사의 새벽이었다.

영하 17도 山中에서 새가 되어 날다
오늘 오대산 하늘을 찾아와서

달은 월정사 마당을 비춘다



마음의 그림자는 적광전 벽에 붙어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은 똑바로 하늘로 솟아 있다

앉아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예언을 하신

아버지가 계시는

저쪽 진영당은 문이 닫혀 있다

처마와 마당에 달빛이 지나간다

아아 무섭고 슬프다 너흰 공부를 똑바로 해라

적광전에 부처님만 혼자 계신다

달은 월정사 마당을 지나간다.

달빛의 도움을 받으며 눈발 흩날리는 오대산 골짜기를 올려다본다. 나무를 따라 눈을 들고 능선을 따라 목까지 들어 저 먼 데를 올려다본다. 어릴 적, 눈물 훔치며 읽었던 소설 ‘만다라’의 대미는 저 오대산 골짜기에서 끝이 났다. 소설 속 법운 스님은 고뇌 속의 파계와 파계 속의 구도를 거듭하던 지산 스님이 암자 앞에서 얼어 죽은 것을 발견해 폭설 속에서 홀로 다비식을 치른다. 다비를 하는 도중 법운 스님이 소설 속에서 내내 앓고 앓던 ‘병 속의 새’라는 화두가 풀린다. 비좁은 암자 안에 싸늘하게 얼어버린 지산 스님을 누이고, 불길을 만들어 그 암자를 태워 다비식을 치르는 그 순간, 불길 속에서 새 한 마리가 뛰쳐나와 날아가는 것을 법운 스님은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산의 시체를 등에 업었다. 뜻밖에도 시체는 가벼웠다. 영혼으로만 살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무게가 없다던 말이 생각났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산은 영혼보다는 육체의 욕망에 멱살을 잡혀 몸부림치던 파계승이 아니었던가.(…)

희끗희끗 눈발이 흩날렸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장작을 날라 방에 쌓았다. 공양간을 뒤져보니 장명등에 넣으려고 준비해둔 석유가 반 초롱쯤 남아 있었다. 장작더미에 골고루 석유를 뿌렸다. 그리고 그 위에 지산을 눕혔다.(중략)

나는 성냥불을 던졌다. 확 불길이 솟았다. 석유 먹은 마른 장작더미는 배암의 혀처럼 불꽃을 떨며 황홀하게 타올랐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만다라’를 살펴보니, 소설 앞 대목에서 큰스님 아래 여러 스님과 대중이 모여 앉아 설법을 듣고 또 저마다의 화두를 붙잡고 논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소설이 묘사한 화두와 설법 장면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가히 영혼의 모든 무게를 내던지는 것이었으되, 1박 2일의 템플스테이가 그러한 것을 터럭만큼이라도 닮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아무튼 다시 날은 밝았고, 아침 공양 후 전나무숲길을 걷는 것으로 월정사 템플스테이는 끝이 났다. 흡사 탈속한 듯이 1박2일의 그럴 법한 흉내는 내었으되, 곧 산을 떠나 고속도로에 오르면 맹속의 질주에 몸을 떨 것이며 서울에 이르러 꽉 막히게 될 올림픽대로며 온갖 신호등 따위에 신경이 곤두설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1박2일은 그저 무위로 그칠 일이 되는가. 어쩌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세속도시의 번잡함이 오히려 편해지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 또 얼마쯤을 지내다보면 ‘아! 월정사’ 하고 마음이 일렁거리리라는 점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월정사가 있고 보름달이 있고 눈 내린 새벽이 있고 신성하기까지 한 전나무숲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다.

영하 17도 山中에서 새가 되어 날다

월정사에서 우리는 세속도시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신동아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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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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