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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인질사건’ 마지막 생존자 강영일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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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1988년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지강헌.

북가좌동 고 씨 큰딸을 비롯해 인질범으로 잡혔던 피해자 중 몇몇은 이후 법정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증인으로 나서는 등 강 씨 편에 서줬다. 강 씨는 “인질과 인질범 모두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상해나 강간 등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인질범과 인질은 서로를 ‘오빠’ ‘누나’ ‘아가씨’ 등으로 호칭했고, 한 여중생은 인질로 붙잡혀 있으면서 고입 시험을 보러 학교에 다녀오기도 했다. 첫 번째 은신처였던 성북구 안암동의 피해자는 탄원서에 ‘죄송하다고 몇 차례 말했고, 식구들에게 구타하거나 욕설하지 않았으며 처녀인 나를 절대 안정시키려 했다’며 ‘가장 안쓰럽게 느꼈던 것은 아버지와 술을 들면서 후회의 빛을 보이며 울었던 것이었다’고 썼다. 두 번째 은신처인 성동구 행당동 피해자가 쓴 탄원서의 일부는 이랬다.

자기네가 떠나면 곧 신고하라고 하였으며 저의 남동생한테 공부 열심히 하고 자기네처럼 되지 말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아울러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었습니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솔직히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습니다.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12월 탄원인 박○○

▼ 피해자들의 증언이 도움이 됐나요.

“검사가 탈주죄에 대해 15년을 구형했는데 7년이 선고됐어요. 행당동 아주머니가 증인으로 나와 증언이라기보다는 변론을 해줬어요. ‘강영일 저 친구 자수하려고 했는데 지강헌이 윽박질렀다’고 하도 얘기하니까 재판장이 중간에 끊으면서 ‘증인, 위증하면 처벌받는 거 아시죠?’ 했어요. 그러자 대뜸 ‘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셨어요. 그 말이 제겐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선한 거짓말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들렸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 자수하려 했던 게 아니었나요.

“아니죠. 그저 실패하면 죽는 거라고만 각오했지, 자수는 생각조차 안 했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강 씨의 회고에 따르면 1988년 당시 2심을 앞둔 미결수들을 모아놓은 영등포교도소에는 장기수가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공사장 하루 일당이 8000원이던 그때, 젊은이들은 유흥비를 벌 목적으로 절도나 강도짓을 했고, 그렇게 붙잡혀 와 10~15년형에서 많게는 무기형을 받았다.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정권이 넘어가던 시기, 온 사회가 민주화 열기로 들끓던 때라 정부는 불법집회와 범법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천명한 상황이었다. 강 씨는 “운동시간에 모이기만 하면 ‘청춘을 이 안에서 보내야 하다니…’ 하며 교도소 담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연스럽게 ‘야, 우리 도망 안 갈래?’ 하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강 씨는 7건의 강도를 저지른 혐의로 1심에서 15년형, 2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한의철, 안광술은 친구이자 공범이었고, 그보다 14살 위인 지강헌은 구치소에서 안광술로부터 소개받았다. 강 씨는 “구치소에서 교도관들 이발해주러 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헌이 형이 ‘어이 아우, 꼬바리(담배꽁초를 뜻하는 은어) 좀 갖다줘’하고 부탁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 형기에 불만이 있었다고요.

“구치소에서 잠실 살던 형과 같이 있었는데, 2000만 원을 주고 변호사를 사서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걸 봤어요. 1심에서 무기형을 받고도 짱짱한 변호사를 써서 형기가 5~7년으로 줄어드는 것도 봤고요. 당시엔 약속한 만큼 형기를 줄여주면 돈을 더 받는 ‘조건부 변호사’가 있었어요. 주로 검사, 판사 그만두고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변호사들이었죠. 그런 걸 보고 울화가 치밀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변명이지만….”

지강헌이 경찰과 대치 중에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쳤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 말은 이들 일당의 슬로건 같은 것이었다.

“구치소에 같이 있던 어떤 형이 돈 있고 빽 있는 자들에게 기우는 사회 풍조에 대해 열을 올리며 얘기하곤 했어요. 그러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다’라고 하는데,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저도 정말 ×같다며 불만이 많았는데, 간단하게 8글자로 압축해주니까 마음에 깊게 와닿았어요.”

이 표현은 그가 탈주 중에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 그는 ‘나는 법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단다. 무식해서 한자는 잘 모르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나라 법에 큰 불만을 품고 있단다. ○○야, 방송에서 떠드는 만큼 우리는 흉악범이 아니란다…’라고 썼다. 7~15년에 걸쳐 있던 이들 일당의 형량은 당시 수십억 원 횡령 혐의로 7년형을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회장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지강헌도 마지막 순간에 “돈 없고 권력 없이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제 살기에 지쳤다”고 외쳤다.

▼ 전경환 씨와 비교해 억울한 마음이 있었나요.

“북가좌동에서 경찰과 대치할 때 기자들이 경찰 몰래 담 너머에 숨어 이거저거 물어봤어요. 제가 ‘나는 칼을 들었을 뿐이고 그는 권력을 들었을 뿐인데 뭐가 차이냐’고 했더니 기자들이 ‘그래도 강도가 더 나쁜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꺼져!’ 하고 욕했을 거예요.”(웃음)

▼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고요.

“책을 봤는데, 사람을 찔러 피를 보면 확 돈다고 해요. 찔린 사람은 살려고 소리 지르고, 찌른 사람은 조용히 하라고 계속 찌르고…. 그래서 죄를 저지를 때도, 도망 다닐 때도 항상 친구들에게 ‘칼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때려라. 절대 칼을 쓰지 말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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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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