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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인질사건’ 마지막 생존자 강영일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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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에서 배운 게 어때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26년 전 사건 현장이었던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가정집. 지금은 지방 교도관 자녀들의 기숙사로 활용되고 있다.

강 씨는 19년 긴 세월 동안 공책 3권 분량의 수기를 썼다. 탈주사건에서부터 유년시절까지 기억나는 대로 상세하게 기술했다. 수기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그는 “1988년 검거된 뒤 서울구치소 독방에 갇혔는데, 거기서 독방 동기로 만난 출판사 푸른숲 사장(현 강태형 문학동네 대표)이 써보라고 권했다”고 했다.

“그분이 ‘글재주 없어도 대화한 건 대화대로, 생각한 건 생각대로 쓰라’고 하셨어요. 두어 페이지 써서 그분 방으로 올려 보냈더니 좋다고, 이 정도면 된다고 해서 쓰게 됐습니다.”

수기에 따르면 강 씨는 서울 안암동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10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고, 강 씨는 중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양말공장에 들어갔다. 학교 다닐 땐 어머니가 쥐여준 50원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 빵 하나 살 돈으로 배부를 리 없었다. 시장에서 사과나 배를 한두 알씩 훔쳐 먹었고, 그러다 걸리면 꿀밤을 맞았다. 그는 “못된 짓이란 건 알았지만 범죄란 생각은 못했다”며 “그렇게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범죄에 내성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친구들과 패싸움한 일로 법원에서 계속 출두하라는 고지서를 보내왔지만, 어머니는 포장마차 때문에 벌금 내라는 고지서와 함께 찢어버리곤 했다. 어느 날 끌려간 경찰서에서 ‘그간 잘못한 일을 다 쓰라’는 형사의 윽박지름에 과일 훔친 일, 공중전화 동전을 턴 일 등을 써냈다. 거기에 법원 출두 기피 건이 나와 처음 구속됐다. 14세 때다. 가정법원에 가위탁돼 있다가 4개월 후 나왔다. 더는 양말공장에서 일할 수 없었다. 이후 절도와 강도로 소년원과 교도소에 한 번씩 다녀왔다.



▼ 제대로 직장을 다녀본 적 있나요.

“1987년 8월에 8·15 특사로 가석방되고 장안동 퇴폐이발소에 취직했어요. 인천소년교도소에서 이용기술을 배웠거든요. ‘오토코’라고, 일본 헤어패션지 보면서 연습해서 포마드 기름 바르는 각진 머리도 할 줄 알았고, 기름 없이 손 드라이도 할 줄 알았어요. 일당을 1만8000원 받기로 했어요. 근데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인천 어디에 있었냐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징역에서 배웠다’고 말해버렸어요. 다음 날 주인이 일당을 1만2000원으로 깎자고 하더라고요. 기술을 어디서 배웠는지가 중요합니까? 어릴 때니까 빈정 상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 뒤론 직장 구하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전과자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럼 돈 적게 받을 텐데? 성질도 나고 고민도 되고….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무렵 친구들이 한 건 하자고. ‘1인당 1000만 원 떨어진다’는 말에 흔들렸습니다.”

첫 강도에선 30만 원, 두 번째엔 70만 원씩 벌며(?) 유흥비도 쓰고 어머니에게 일해서 벌었다고 속이며 돈도 갖다드렸다. 돈 떨어지면 다시 칼을 들고 가정집을 털었다. 그러다 친구들과 함께 검거됐다. 총 7건, 피해액은 1000만 원가량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수유리 집을 터는데 통장에 200여만 원밖에 없었어요. ‘집이 이렇게 좋은데 돈이 이거밖에 없어요?’ 하니까 아주머니가 ‘이 돈 모으려면 얼마나 걸리는 줄 아세요? 5년 모은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아요. 당시 보통 월급이 30만 원이니까 생활비 쓰고 매달 5만~10만 원씩 저금한다면 그 정도 모이는 거죠.”

이재오 의원과의 인연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일당 탈주사건이 종료된 다음 날인 1988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 지면.

강 씨는 탈주 후 붙잡혀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을 만나게 됐고, 허인회 전 열린우리당 청년위원회 위원장 등 운동권 학생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구치소에 데모하다 잡혀온 운동권 학생이 많았어요. 이들이 저를 보고 놀라는 거예요. 우리 사건이 국가가 작업한 가짜로 알았대요. 당시 신문에 5공 비리가 1면에 뜨다가 이게 뒤로 가고 우리 사건이 1면을 차지하니까 운동권에선 국가 공작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 이재오 의원이 옆방에 있었다고요.

“제가 수갑을 채워 허리에 묶어두는 혁수갑을 차고 있었어요. 1주일에 한 번 목욕할 때만 열어줘서 변 누고 닦는 것도 힘들고, 등이 가려우면 바닥에 누워 뭉개댔어요. 학생들과 친해지다보니 저한테 인권변호사 붙여주겠다고 했어요. 3개월 후에야 일반 수갑보다 무거운 자석수갑을 차게 됐어요. 제가 이걸 풀어달라고 난동을 부려서 교도소에서 기물파손으로 추가 송치하려고 할 때 이재오 선생이 중재에 나서 징벌만 받게끔 해주셨어요. 저한테 상당히 고마운 분이세요.”

▼ 19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서울구치소를 시작으로 순천, 광주, 대전, 대구, 안양교도소를 거쳤어요. 순천교도소선 검정고시를 보려면 광주교도소로 가야 하는데, 탈주 전력이 있는 저를 보내줄 수 없다고 해서 광주교도소로 옮긴 뒤에야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어요. 2006년 영화 ‘홀리데이’가 개봉되고 좀 힘들었죠. 교도소를 너무 비하해서 그 영향이 있었거든요. 모범수라 교도관 입회 없이 30분씩 면회할 수 있었던 것도 취소되고 직계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어요. 그러다 2007년 6월에 출소했어요.

종교생활 하며 마음 편해지는 장기수들을 보고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목사님과 인연이 되어 그 부부가 저의 수양부모님이 되어주셨어요. 자주 면회 오시고, 영치금도 넣어주시고, 편지 보내주시고….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그분들 덕분에 내가 선한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인성을 갖춰야겠다고 다짐했죠. 젊을 땐 욕쟁이였는데 서른 되면서 욕을 안 쓰는 거 같아요. 어릴 적 친구들 만나면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정도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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