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헬리콥터로 달러 뿌려 금융위기 불길 잡다

벤 버냉키 美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 하정민│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03-20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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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1월 21일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전미경제학자클럽(NEC). 얌전하고 소심해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연단에 올랐다. 그로부터 3개월 전, 세계의 중앙은행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이하 연준)의 이사가 된 벤 버냉키(60)였다.

    버냉키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 공대(MIT)를 졸업한 수재지만 연준 입성 전에는 미국 경제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신경제’ 호황과 곧바로 이어진 2000년대 초 닷컴 버블로 한창 들떠 있던 미국에는 대공황 전문가이던 그를 주목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연단에 오른 그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미국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처럼 장기 불황에 시달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버냉키는 답했다. “인구구조, 생산성 등 많은 면에서 미국의 경제구조는 일본과 완전히 달라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가능성이 낮다. 설사 그런 위기가 온다 해도 밀턴 프리드먼이 언급한 대로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듯 중앙은행이 대규모 통화완화 정책을 단행하면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다.” 유명한 그의 별명 ‘헬리콥터 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언급으로 그는 일약 세계경제학계의 시선을 끄는 인사가 됐다.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가 인플레이션 파이터, 즉 물가 안정에 있다고 믿는 다수의 경제학자나 중앙은행 관계자와 달리 물가 안정보다는 경기 부양, 즉 디플레이션 파이터의 임무를 중시하는 버냉키의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이날 발언 때문이었을까. 2006년 1월 연준 의장이 된 버냉키는 취임한 지 불과 2년 반 만인 2008년 9월 세계 금융위기라는 초대형 태풍을 맞게 된다. 그는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금리 인하, 과감한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금리 인하로도 경기가 예상만큼 살아나지 않을 때 국채 매입 등으로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 직접 돈을 푸는 방식)를 단행하며 시스템 붕괴 위기에 놓였던 세계경제를 일단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대공황 전문가로서 그의 진가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일각에서는 버냉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을 조기에 감지하지 못해 금융위기를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며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의 주원인인 세계경제의 과잉 유동성은 버냉키의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유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최소한 ‘제2의 대공황’을 예방한 공로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숫자·언어 영역에서 두각

    벤 샬롬 버냉키는 1953년 12월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오거스타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약사, 어머니는 교사였고 유년 시절 토라(유대교 율법서) 강독을 비롯한 유대식 가정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특유의 투철한 교육열로 무장한 그의 부모는 똑똑한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버냉키는 어릴 때부터 숫자와 언어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 철자 맞추기 대회인 ‘스펠링 비(spelling bee)’에서 우승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속독을 익히고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미적분학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1971년 버냉키는 대학입학시험인 수학능력적성검사(SAT)에서 1600점 만점에 1590점을 얻어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그가 경제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것은 1920년대에 대공황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똑똑한 손자에게 대공황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버냉키는 ‘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대공황을 못 막았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였고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박사 논문을 쓰며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밟던 버냉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시카고 학파의 거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였다. 버냉키의 별명이 된 ‘헬리콥터의 통화 살포’는 원래 프리드먼 교수가 자신의 강의에서 즐겨 사용하던 비유였다. 프리드먼 교수가 학생들에게 종종 ‘헬리콥터가 하루만 돈다발을 떨어뜨리는지, 아니면 매일 와서 돈을 살포하는지에 따라 통화정책의 효과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진다’는 유의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버냉키는 프리드먼 교수가 1960년대 초 발표한 ‘미국의 1867~1960년 화폐사(史)’를 탐독했으며 대공황의 원인이 자유경제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연준의 과도한 통화긴축 정책에 있었다는 이론에 매료됐다. 이는 약간의 물가상승 부담을 각오하더라도 중앙은행이 경기침체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디플레이션 예방에는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확대가 최선이라는 그의 지론으로 굳어졌다.

    1979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딴 버냉키는 스탠퍼드대, 뉴욕대, 프린스턴대 등 미국의 주요 명문대를 거치며 교수로 승승장구했다. 20년 넘게 학계에서만 활동하던 버냉키는 2002년 8월 연준 이사로 뽑히면서 본격적으로 세계경제계에 데뷔한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하는 연준 이사는 임기가 14년에 달하며 연준 의장을 포함해 총 7명뿐인 자리다.

    연준 이사가 된 지 석 달 만에 이른바 ‘헬리콥터 연설’로 유명해진 버냉키는 2005년 6월, 조지 부시 대통령의 가정교사나 다름없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부시 대통령과 돈독한 교분을 쌓았고 결국 4개월 뒤인 그해 10월 부시 대통령은 그를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다.

    연준 首長 오른 스타 학자

    버냉키가 2006년 2월 제14대 연준 의장으로 공식 취임했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그가 연준 의장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의 전임자가 무려 20년간 연준을 통치하며 막강한 영향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한 앨런 그린스펀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연준 역사상 최장수 의장을 지낸 그린스펀은 절묘한 통화정책으로 고성장, 저물가의 소위 ‘골디락스(goldirocks) 경제’를 구현해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찬사를 받았다. 연준 의장에게 붙는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란 수식어도 그린스펀으로부터 유래했고 연준이 경제 분야에서 누구도 도전하기 힘든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 또한 그린스펀의 공이 크다.

    그린스펀은 의도적으로 모호한 화법과 어눌한 말투를 써 소위 신비주의 통화정책을 구사했다. 연준과 금융시장의 거리를 최대한 떨어뜨려 놓은 뒤 알 듯 말 듯한 단어를 사용해 시장을 움직이는 식이었다. 정보기술(IT) 버블이 고조되던 1996년 “주가 상승이 과도하다”는 직설적인 말 대신 “금융시장이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 빠졌다”고 언급해 경제 전반에 큰 충격파를 미치지 않고 주가 상승을 진정시킨 것이 좋은 예다.

    반면 버냉키는 교수 출신답게 직설적이고 평이한 화법을 사용했다. 연준 의장의 권위는 시장과 떨어져 있어야 제대로 나온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냉키 스타일은 생소했다. 전임자에 비해 무게감과 카리스마가 떨어져 연준의 권위에 손상을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헬리콥터로 달러 뿌려 금융위기 불길 잡다
    초보 의장, 서브프라임 경고 무시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여파에도 2000년대 초중반 미국 경제가 주도한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바로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 때문이다. IT 붐이 꺼지고 9·11 테러가 발생한 2001년부터 약 2년간 그린스펀은 6.5%에 달하던 미국의 정책금리를 1.0%까지 끌어내렸다.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그린스펀 풋(put)’으로 불렸다. 파생상품시장의 풋 옵션처럼,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그린스펀이 금리를 내려 어김없이 살려놓을 것이란 의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하지만 6~7년간 지속된 저금리 정책은 ‘버블’이라는 독버섯을 키웠다. 2007년 4월 미국 2위 모기지업체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한국의 법정관리에 해당하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과잉 유동성이 집중된 미국 부동산시장이 불안하다는 경고였다. 지난 수년간의 저금리 정책을 그만두고 유동성의 고삐를 조여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했지만 세계경제와 주식시장이 워낙 호황을 보이고 있던 시기라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버냉키가 비판받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서브프라임 위기를 조장한 사람은 전임자 그린스펀 전 의장이지만 현직 연준 의장으로서 서브프라임 징후를 빨리 발견하지 못해 금융위기 선제대응에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 1월 약 5년 만에 공개된 2007년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1년에 8번 열리는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 회의로 미국의 정책금리 수준을 논의하는 자리) 회의록에 따르면 버냉키가 당시 서브프라임 위기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일부 회의 참가자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위험을 지적했지만 버냉키는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약 1년 만인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이후 베어스턴스, 모건스탠리, AIG 등 대형 금융회사가 줄줄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는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에 직면한다.

    비록 초기 대응은 늦었을지 몰라도 대공황 전문가 버냉키의 진가는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발발한 후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핵심이 바로 양적완화 정책이다.

    2006년 버냉키가 처음 연준 의장이 됐을 때 미국의 정책금리는 5.25%였으나 그는 이를 제로(0%) 수준으로 낮췄다. 금리를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수준까지 낮춰도 가시적인 소비증대와 투자증대 효과가 없자 버냉키 의장은 2008년 3월부터 지금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찍어낸 돈을 시중에 직접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기준금리가 제로 금리에 근접해 기준금리 인하만으로는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쓰이며 중앙은행은 국채, 회사채, 모기지담보증권(MBS) 등을 사들여 시중 통화량을 늘린다.

    연준은 2008년 11월부터 시작해 2010년 3월에 끝난 1차 양적완화 때 1조7000억 달러, 2010년 11월~2011년 6월의 2차 양적완화 때 6000억 달러를 시중에 풀었다. 1차 양적완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쓰러져 가던 미국 금융회사들의 자본력을 확충시키는 게 주목적이었고, 2차 양적완화는 디플레이션을 막아보자는 뜻에서 시행됐다.

    진가 발휘한 ‘헬리콥터 벤’

    2012년 9월부터 시작된 3차 양적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준은 3차 양적완화 실시 후 매달 400억 달러 상당의 모기지담보증권을 사들이고 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다. 현재 8%를 넘나드는 미국의 실업률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4~5%의 2배 수준이다.

    2011년 8월에는 양적완화와는 다른 묘한 방식으로도 통화량을 늘렸다. 만기가 짧은 단기채권을 팔아 만기 6년 이상의 장기채권을 매입하는 소위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를 실시한 것이다. 4000억 달러 규모의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는 급격한 통화량 증가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기업들의 조달금리를 낮춰 산업계의 자금순환을 원활히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활용됐다.

    3차례의 양적완화로 미국 경제는 1920년대 대공황과 같은 초유의 파국은 면할 수 있었다. 무지막지해 보여도 이렇게 돈을 많이 뿌려놓으면 신용도가 낮은 가계나 기업도 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고, 이자 부담이 크지 않기 때문에 당장 손에 쥔 돈이 없어도 저축보다는 소비를 늘릴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 찍어낼 수 있는 미국 중앙은행 수장이기 때문에 펼칠 수 있는 정책이긴 하지만 버냉키가 금융위기 후폭풍 진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금융위기를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또한 “양적완화는 기존 경제학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변칙적이고 미친 정책이지만 금융위기 동안 연준이 보인 대응방법은 올바른 것이었다”며 “나는 버냉키 의장의 연임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모든 정책은 양면성이 있다. 연준 수장 버냉키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에게 ‘제2의 대공황’을 예방한 공로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버냉키는 통화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임자 그린스펀과는 달리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린스펀이 선문답 같은 애매한 간접화법으로 금융시장에 혼란을 야기하고 다소 독선적으로 연준을 운용한 것과 대조적으로 버냉키는 직설적이고 솔직한 소통을 선호했고 원칙과 합의를 존중했다. 그는 100년을 헤아리는 연준 역사상 처음으로 매 분기 통화정책회의 기자회견을 정례화한 의장이기도 하다.

    3연임 여부에 촉각

    하지만 양적완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기부양 효과는 제대로 내지 못하고 물가 상승과 달러 가치 하락만 부채질할 것이란 지적이다. 달러화는 세계 거래의 중심통화(기축통화)다. 양적완화로 인해 기축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달러화로 표시된 원유나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이 뛰어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공산이 크다.

    또 초저금리의 장기화는 저축률의 과도한 둔화와 이에 따른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경제 전반을 왜곡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가계부채 증가로 인한 양극화 심화로 서민 계층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10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로 고민 중인 한국도 이 대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달러 약세가 세계 환율전쟁(currency war)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통화전쟁은 각국이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자국 통화가치 하락(평가절하·devaluation)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총성 없는 경제전쟁’이다.

    수출 증가와 자국 내 일자리 확보를 겨냥한 각국의 통화전쟁은 미국의 양적완화 이후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엔 약세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책, 즉 ‘아베노믹스’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영국 중앙은행도 설립 319년 만에 최초로 외국인 총재를 임명하고 파운드화 하락 정책 추진을 본격화할 태세다. 자국 통화가치 급등으로 인한 수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한국,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도 자국 통화 강세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경제계는 이제 버냉키 의장의 3연임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06년부터 4년 임기의 연준 의장으로 일해온 그의 두 번째 임기는 2014년 1월 31일 끝난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가 한창일 때 양적완화에 반대하던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버냉키 의장을 교체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진 그의 3연임 포기설은 올해 들어 점차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유명 이코노미스트 린 리저는 “버냉키 의장이 이번 임기를 마치면 학교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반면 일부 전문가는 그의 연임을 점치기도 한다. 아메리프라이즈 파이낸셜의 러셀 프라이스 이코노미스트는 “지금은 통화정책이 사상 최고로 복잡한 시점이므로 이 이례적인 조치를 처음으로 고안한 버냉키보다 연준 의장직을 더 잘 수행할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만약 버냉키 의장이 올해 말 사임한다면 세계 금융시장은 상당한 혼란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프라이스 이코노미스트의 말대로 세계경제가 아직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양적완화 자체가 유례없는 정책인 만큼 이를 주도해온 버냉키의 부재는 큰 변화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할 때 그의 3연임 여부에 관계없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바로 버냉키가 1914년 설립된 FRB의 100년 역사상 호불호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고 정책 찬반논란이 큰 의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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