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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전체론·본질주의·경이(驚異)의 오류

  •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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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본질론을 설파했다. “여기에 지하동굴이 있다. 동굴 속에는 죄수가 갇혀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동굴 벽만 보고 산다. 목도 결박당해 머리를 좌우로도 뒤로도 돌릴 수 없다. 죄수의 뒤로 횃불이 타오른다. 죄수는 횃불에 비친 자기 그림자만 보고 산다.”

이와 관련해 하나 더 소개할 흐름이 있다. 최근 몇몇 역사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과거 유네스코가 했던 것보다 훨씬 큰 스케일로, 그리고 헤겔이 했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이름하여 ‘빅 히스토리’.

‘빅 히스토리는 문자의 발명과 기록으로 시작되는 역사시대 그리고 인류의 등장과 진화로 설명되는 선사시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춘 인문학적 역사 분석을 우주의 탄생인 빅뱅이나 별과 태양, 지구의 형성,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 등 자연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는 역사 분석으로까지 확대시킨다. 그리고 137억 년에 걸쳐 나타난 다양한 기원을 과학적 지식과 근거들을 통해 살펴본다.

또 빅 히스토리는 단순히 분석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만 확대시킨 것이 아니라 빅 히스토리의 시각과 틀 속에서 전체적인 구조와 패턴을 이해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이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빅 히스토리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융합 연구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구축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3D를 포함한 각종 자료를 인터넷상에 구현해 서로 연결해줌으로써 자료 이용을 효율화, 개방화하고, 개별 연구에서 수행할 수 없거나 발견할 수 없었던 규모와 소통의 연구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65년 유네스코의 역사 프로젝트보다 나은지 잘 모르겠다.



빅 히스토리의 논리를 보면 전자문화지도와 여러 가지 면에서 상통한다. 물론 대상 시기가 빅 히스토리는 이름에 걸맞게 13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유네스코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역사 전체를 IBM 컴퓨터에 프로그래밍하는” 방식이 진지하게 거론됐다는 점이다. 전체론이 기술력을 등에 업고 프로젝트로 재등장하는 셈인가.

어떤 종류의 역사 기록은 디지털화할 수 있고, 그것이 유용할 수 있다. 또 학제 간 소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감한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에 대해 내가 느끼는 시큰둥함도 이전 경험이나 오늘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왜 소통과 탐구는 꼭 ‘전체’를 전제로 해야 할까. 전체가 실제 전제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유령과 본질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3월 4일 러시아 모스크바 그랑프리 곤봉에서 동메달을 딴 손연재. 체육사에서 볼 때 ‘역사적인 사건’일 것이다.

실연당한 친구가 늘 술을 마시며 실의에 빠져 있다. 강의도 빠지고 먹지도 않고, 저러다 폐인이 될 것 같다. 안타깝다. 그래서 친한 친구가 한마디한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그러자 실연당한 친구가 시니컬하게 맞받는다. “나답지 않다고? 나다운 게 뭔데?”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장면인데, 학생들에게 가끔 철학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다. 말하자면 원래 ‘나(I)’가 있는데, 이게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좀 이상하게 된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또는 ‘원래 나’가 있는 게 아니라 상황, 시기에 따라 존재하는 그 자체가 ‘나’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앞의 것은 본질론이 되고, 뒤의 것은 관계론 얘기가 될 것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나’라는 이데아(Idea)가 있어서 그것이 현상(現象)하는 것이 지금의 나라는 말인데, 바로 이때 현상과 대비되는 이데아로서의 ‘나’가 본질(本質)이 된다. 본질이나 이데아, 이런 게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 곧 바로 ‘나’다, 이런 사유도 있을 수 있다. 역사학은 오히려 이런 사유에 익숙하다. 왜냐하면 대상을 시대성, 상황성을 중심으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실재의 깊은 곳에 본질이 있다는 견해에 따르면, 인간, 나라, 세대, 문화, 이데올로기, 또는 제도에 관한 사실(facts)은 해당 주제의 본질을 얼마나 잘 드러내주느냐에 따라 중요성(의미)이 결정될 것이고, 그 의미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사료로 선택된다. 구래(舊來)의 세속화한 미신(迷信)인 이런 생각에 대한 합리적 반박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 마치 유령의 존재처럼 본질이 있는지 어떤지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령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본질에 대한 믿음도 경험주의자를 곤란에 빠뜨린다. 경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본질을 찾는 데 실패하자, 밖으로 표현된 행위의 패턴에서 본질을 찾고 개념을 진보시켰기 때문이다. 본질주의자에게 중요한 사실이란, 관찰자가 사물의 내적 실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窓)이 아니라 자신의 선험적 전제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본질의 오류는 역사 서술에서 매우 일반적이다. 본질주의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런 관점이나 해결책(?)이 뭔가 완벽하다는 느낌을 주고, 뭔가 사태가 확실해진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경험주의자라면 털어내야 할 환상이다.

본질주의는 앞서 살펴본 전체론(holism)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전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오항녕만 알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오항녕도 알아야 하고, 이영애도 알아야 하고, 박찬호도 알아야 한다. 다 알아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본질주의자가 사용하는 언어 습관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기본성격’ ‘본성’ ‘원래’ ‘근본적으로’ 같은 어휘를 잘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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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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