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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우리는 이미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비잔틴 제국의 성상파괴운동

  • 박배형|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미학 baipark2000@hanmail.net

우리는 이미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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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파괴운동은 예술과 종교, 정치적 문제가 한곳에서 만난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전통과 유대교, 기독교 전통이 만난 문명사적 대사건이기도 했다. 미술의 역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이미지로서의 종교미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격렬하고 심각하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논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가져온 파장도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730~787년, 815~843년 2차에 걸쳐 100여 년간 진행된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은 예술작품이 파괴되고 변형되고 소실됐다. 적지 않은 사람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성상파괴운동의 첫째 원인으로 기독교가 성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성상을 모시는 것은 이교도의 풍습이고, 구약에는 성상의 제작과 숭배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다. 성상 숭배가 잘못하면 우상 숭배나 미신의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초기 교회 때부터 지적돼왔다. 성상파괴운동이라는 대사건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교회 내부라기보다는 외부의 정치적 압박이었다.

성상파괴운동을 촉발한 장본인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다. 그가 즉위했을 때 제국은 내정이 몹시 어지러웠고 밖으로는 이슬람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자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은 신속하게 주변국들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638년 예루살렘이 아랍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지중해 연안의 많은 섬도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여세를 몰아 이슬람교도들은 674~678년, 717~718년 비잔틴 제국 수도인 비잔티움을 포위한 채 공격했다.

레오 3세는 제위에 오르기 전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슬람교도들이 발군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들이 모스크에 성상을 그리거나 성상을 오용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봤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이 전투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성상에 대한 지나치거나 잘못된 숭배에 있다고 믿게 됐다.



당시 많은 이가 이슬람교도를 기독교의 이단으로 보았다.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신을 다른 방식으로 경배한다고 여긴 것이다.

레오 3세는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유지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성상을 없애고 제국 내에서 종교미술 일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효과는 정치적, 군사적 성공을 통해 현실화할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몇몇 주교는 구약성경을 근거로 우상숭배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레오 3세가 파괴운동 주도

레오 3세는 몇 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성상파괴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신학적 주장들과 함께 730년 칙령을 선포했다. 더불어 모든 성당의 종교미술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칙령에 반대하는 성상 옹호파 게르마누스 총대주교를 파면하고 성상 파괴파의 아나스타시우스를 총대주교에 임명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재위 715~731)와 그의 계승자인 그레고리우스 3세(재위 731~741)는 비잔티움의 조치에 반발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많은 성상이 파괴되거나 백색 도료로 칠해졌다. 성상 옹호자는 박해의 대상이 됐다. 7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가 지방 공의회를 개최해 성상파괴운동을 단죄함으로써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이는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가 분리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레오 3세의 치세 중에 제국은 안정을 되찾았고 이슬람 확산은 저지됐다.

부활한 성상숭배

레오 3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성상파괴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성상파괴에 대한 나름의 이론까지 개진했다. 그는 성체야말로 그리스도의 진정한 형상이고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강력한 상징이므로 기독교 신앙에 성상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성상 파괴와 관련해 여러 신학자와 주교들은 나름의 이론과 주장을 내세웠다. 745년 히에레이아 지방 공의회에서 채택된 한 조항을 예로 들어 성상 파괴파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리 기독교인들의 보편적 교회는 유대교와 이교의 중간에서 경신과 숭배의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한다. (…) 우리는 유대교의 (…) 피 흘리는 제물도 인정하지 않거니와, 우상의 제작과 숭배에 관한 일체의 행위 또한 혐오한다. 가증스러운 미술을 주도하고 창안한 것은 다름 아닌 이교도들이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뒤를 이어 레오 4세가 5년간 통치하다 콘스탄티누스의 손자가 제위에 올라 콘스탄티누스 6세가 됐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렸기에 어머니인 황후 이레네가 섭정을 했다.

황후는 성상 옹호파였기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성상파괴운동을 중단시켰다. 787년 이 공의회는 성상파괴를 기독교 전통에 위배되는 잘못된 혁신으로 단죄했다. 그에 따라 성상숭배가 부활하고, 성물과 성인들의 성상이 없는 교회는 세울 수 없게 한 교회법 21개조가 공표됐다. 이 공의회 결의 사항에 담긴 성상 옹호파의 주장은 이러했다.

성상 제작은 화가의 창안이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전통이다. (…) 교부들은 성스러운 교회에서 성상을 봤을 때 기쁨에 겨웠고, 그들 자신이 성스러운 교회들을 세웠을 때 그 안에 이미지들도 역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그러므로 이미지의 거룩한 사용에 대한 생각과 전통은 교부들로부터 유래한 것이지 화가들의 것이 아니다. 화가의 영역은 기예에 한정되고, 그림을 배치하는 일도 분명히 교회를 지은 성스러운 교부들의 과업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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