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씨는 1982년 스위스 어학연수 중 한국으로 망명했다. 북한 최고위층에 관한 정보에 목말라 있던 한국 정보당국이 그야말로 ‘횡재’를 한 셈이었다. 정부가 올해 초 공개한 이한영 망명 외교문서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씨의 망명은 1982년 9월 28일 오전 9시 50분 스위스 제네바 대표부에 그가 전화로 망명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된다. 제네바 대표부는 즉각 이 씨의 신병을 확보했고 긴급 전문을 통해 서울 외무부 본부에 알렸다. 전문 제목은 ‘몽블랑 보고’.
이 씨는 리민영·이일남이란 이름의 여권을 소지했다. 이때까지 이 씨가 김정일의 처조카인 줄은 현지 관계자들도 몰랐던 것 같다. 대표부는 전문에서 “스웨터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서류는 숙소에 두고 왔다”고 보고했다. 이 씨의 망명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 씨는 스위스에서 프랑스, 벨기에, 독일, 필리핀, 대만을 경유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나흘 만인 10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정부는 북한의 방해공작에 대비해 해당 공관에 철저한 기밀 유지를 요구하고, 관련 문서를 파기할 것을 지시하는 등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서울에 온 이 씨는 망명 동기를 비롯해 북한 내부 실정 등에 대해 오랜 조사를 받은 뒤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한양대 재학 시절에는 테러 위협을 느껴 성형수술까지 했다. KBS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로 입사해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러시아어 통역사로도 활동했다. 이후 개인사업을 시작했지만 곧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북한 최상류층 생활에 젖어 씀씀이가 헤프기도 했고, 한국 실정에 어두운 탓도 있었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건설회사를 차렸으나 1991년 부도를 냈고, 횡령 등의 혐의로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이 씨는 정부에 더 많은 금전적 지원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보를 캐낼 만큼 캐낸 정보기관 처지에선 이 씨의 활용가치가 떨어져 있었다. 돈이 궁해지자 이 씨는 특종 기삿거리를 주겠다며 언론사들과 거래를 시도했다. 1996년에는 북한 최고 권력층의 실상을 속속들이 밝힌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을 발간했다. 1996년 2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성혜림 망명설’도 그가 언론에 흘려준 정보였다.
1996년 2월 13일 조선일보가 ‘김정일 본처 서방탈출’이란 제목의 기사를 세계적 대특종이라면서 보도했다. 각 언론사는 이 씨를 만나 또 다른 얘기를 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조선일보가 워낙 크게 이 사건을 다룬 탓에 다른 언론은 속칭 ‘물먹은 것’을 만회하고자 ‘더 큰 한 방’을 노렸고, 당연히 무리한 취재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씨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해 뭔가 큰 것을 캐내려 애쓰기도 했다. 이처럼 치열한 보도 경쟁 속에 자연스럽게 이 씨가 살고 있는 동네가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2월 14일 이 씨가 1982년에 귀순,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성혜림 망명설’은 결국 오보로 판명 났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만 3국으로 망명하고 성혜림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북한 측 보호를 받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취재 경쟁 속 거처 드러나

이한영 씨(왼쪽)가 1996년 2월 13일 서울 모처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단독으로 만나 이모이자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 등의 행적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 씨는 이듬해 2월 15일 피살됐다.
동아일보는 또 이 씨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안기부는 지난 2월 성혜림 일가 서방 탈출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 씨의 신분이 드러나자 이 씨에게 서울 시내 모처에 있는 안가를 제공, 그곳에서 살도록 해왔으나 수기 출판 후인 6월 13일 안기부 담당관이 ‘15일까지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해왔던 것. 이 씨는 원래 분당의 아파트에 7000만 원을 주고 전세를 살았으나 이 아파트가 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지금은 아내와 딸은 처가에, 자신은 친구 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이에 대해 안기부 측은 ‘더 이상 이 씨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