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주인공 김낙순의 초상화.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의 문인이다.[윤채근 제공]](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a/03/f8/c7/5a03f8c71f46d2738de6.jpg)
이 글의 주인공 김낙순의 초상화.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의 문인이다.[윤채근 제공]
성균관에 들어간 낙순은 수업을 빼먹은 채 저잣거리를 쏘다녔다. 이화방과 운종가를 거치는 은밀한 산보는 초저녁까지 이어지곤 했고 그럴 때면 동소문 백정 거리에 들러 소 도살하는 광경을 오래도록 구경했다. 그에게 학당 공부는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 행위였다. 책 속 지식은 생동하는 현실이 증발된 관 속 부장품 같아서 호기심 넘치는 소년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차라리 그는 반촌(泮村)의 활기를 사랑했다.
성균관을 에워싼 마을인 반촌은 건국 초기 송도에서 이주해온 노비들이 만든 마을이었다. 본디 송도에 있던 성균관의 부속 노비들이 성균관이 한양으로 옮겨올 때 함께 이동해오며 형성한 동네였다. 말씨에서 생활 습속까지 한양 사람과 다른 반촌 노비들은 제 자식들을 학생들의 심부름꾼인 직동(職童)이나 학교 행정을 담당하는 서리로 키워냈다. 반촌은 성균관이라는 어린아이를 외부와 차단해 보호하고 돌보는 젖어미 같은 존재였다.
한양 구석구석을 느리게 걷던 낙순은 때로 성균관의 통금법인 야금(夜禁)까지 어겨가며 밤나들이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는 장의동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반촌에서 하숙하던 벗들과 밤을 새워 통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 유생과 성균관 입학을 대기하던 지방 학생이 뒤섞인 반촌 모임의 중심엔 꼭 그가 있게 되었다.
반촌, 1780
정조 재위 4년째이던 1780년 봄, 낙순과 성정이 빼닮은 소년 한 명이 성균관에 들어왔다. 같은 노론 명문가 출신 김려(金鑢)였다. 반촌의 밤 모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급속히 친해져 권태로운 한양의 삶에 풍류를 되찾아올 궁리를 시작했다.“엄숙하신 어르신들의 한양을 우리가 바꿔보자.”
저물녘 노을이 비치는 반촌 주점 구석진 탁자에서 김려가 속삭였다. 주자학으로 촘촘히 직조된 무미건조한 조선은 나라 밖에서 불고 있던 변화의 바람을 막기에 급급했고 예의범절에 발이 묶인 조선 젊은이들은 신문물에 목말라 있었다.
“누군가 변화를 일으켜야겠지.”
낙순이 속삭이며 푸성귀 안주를 손으로 집어 입안에 넣었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입에 넣고 빠는 상대의 해맑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결사가 필요해. 사람도 많이 모아야 하고.”
사람 모으는 거라면 낙순이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그는 노론가 자제 가운데 당대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을 흠모하던 이상황(李相璜)과 심상규(沈象奎)를 끌어들였고 다섯 살 연상인 남공철(南公轍)을 좌장에 앉혔다.
결사의 이름은 낙순의 옥호(屋號)인 ‘고향옥’에서 따온 것이었다. 김낙순의 장의동 본가에서 처음 결성된 모임에서는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통속 산문인 소품문(小品文)을 지어 반촌 하숙촌에 배포했다. 고리타분한 경전이나 전통 고문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학생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고향옥서사에서 발간한 소품집은 수없이 필사되며 퍼져나갔고 연암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아성에 도전할 수준에 이르렀다.
모임의 열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1783년 겨울, 김려는 낙순과 단둘이 인왕산에 올랐다. 그날따라 등산 내내 말이 없던 김려는 추위에 얼어붙은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우리 한 걸음 더 나가보자.”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낙순에게 김려가 다시 속삭였다.
“연암 선생도 못 가본 곳까지 말이야. 난 그래야겠어.”
그날 밤 김려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내수사(內需司) 뒷골목으로 낙순을 이끌었다. 그곳엔 김려가 따로 사귀던 인물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강이천(姜彝天). 당색은 소북(小北)이지만 경기도 안산 명문가 출신으로 낙순처럼 어린 시절부터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입고 있어 대궐에서 여러 차례 조우했던 인사였다. 놀랍게도 그는 천주교도였다. 다음은 서른 넘도록 과거에 낙방을 거듭하고 있던 충청도 단양 선비 이안중(李安中)과 성균관 입학을 준비하던 경기도 남양 선비 이옥(李鈺). 이옥은 낙순보다 다섯 살, 이안중은 무려 열세 살 연상이었다.
김려가 세 사람을 끌어들인 이후 서사 모임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겨났다. 당색의 차이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강이천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이 잠재된 위험요소이긴 했지만 세상은 아직 천주교에 관대했다. 모임에 불안한 긴장을 초래한 건 김려의 성적 모험심이었다. 그는 중국 염정소설인 풍몽룡(馮夢龍)의 ‘정사(情史)’를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어(李漁)가 지은 엽색소설 ‘육포단(肉蒲團)’을 한글로 개작해 반촌에 뿌렸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를 다정환희여래(多情歡喜如來)라 부르며 색욕으로 성불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다정환희여래
![18세기 조선 화가 강희언이 그린 인왕산도.[윤채근 제공]](https://dimg.donga.com/a/660/0/90/5/ugc/CDB/SHINDONGA/Article/5a/03/f7/d4/5a03f7d41751d2738de6.jpg)
18세기 조선 화가 강희언이 그린 인왕산도.[윤채근 제공]
이렇게 떠든 밤이면 김려는 이안중 무리의 손에 이끌려 색주가를 향했다. 그들은 반촌의 젊은 여종들을 유혹했고 운종가의 기녀들도 차례로 함락해나갔다. 성에 눈뜬 김려는 거침없었고 이로 인해 분열된 모임을 김낙순이 봉합하고 있었다. 간신히 유지되던 고향옥서사는 마침내 1784년 가을에 붕괴됐다. 김낙순과 김려가 심상규를 상대로 벌인 사소한 장난 때문이었다.
1784년 봄, 김낙순은 김려 무리와 어울리며 홍등가를 누비고 있었다. ‘기쁨을 아는 몸’이 된 김낙순은 어른들이 강요하는 따분한 관료의 삶을 거부할 작정이었다. 사건은 늦봄 어느 날 임금의 어가 행차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비던 운종가에서 비롯됐다. 김려 무리와 부근을 배회하고 있던 낙순은 군중 속에서 우연히 심상규를 발견했다.
순진한 심상규를 달콤한 말로 꼬드긴 낙순은 그를 앞세워 술집으로 향했다. 그때 어린 소녀를 등에 업은 중년의 건장한 계집종이 일행 앞을 앞질러갔다. 어가 거둥을 관람하고 돌아가던 소녀는 비단 포대기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고 바로 뒤를 신발을 쥔 어린 계집종이 따르고 있었다. 포대기 아래로 살짝 나온 버선발에 흥미를 느낀 일행은 그저 소일거리 삼아 뒤를 밟았다. 소광통교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심상규에게 소녀를 유혹해보라고 부추겼다. 친구들의 짓궂은 놀림에 떠밀린 심상규가 계집종을 추월해 걷던 순간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포대기를 말아 올렸다. 진한 화장을 한 소녀는 잠시 심상규를 노려보다 황급히 포대기를 도로 뒤집어썼다.
금지된 장난
낙순 일행은 소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심상규를 잡아끌어가며 그녀를 끝까지 미행했다. 그녀는 소공주동 홍살문 안쪽의 한 대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일행은 소녀가 호조에서 은퇴한 늙은 계사(計士·회계 사무를 담당한 종8품의 전문직)의 외동딸임을 수소문해 알아냈다. 평생 회계 업무를 보며 큰 재산을 일군 계사의 성은 조씨였고 그때부터 일행은 소녀를 ‘조처자’라 불렀다.명문가 자제 심상규가 중인 가문의 처자와 혼인은 애초 불가능했지만 일행은 이 재미난 연애놀이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심상규를 충동질했고 소녀의 미색에 눈이 먼 심상규는 벗들과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매일 밤 조처자 집을 찾아갔다. 그는 초여름에 이르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 침방 담벼락에 기대 밤을 지새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처자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진 낙순 일행은 심상규가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수행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심상규는 서사 모임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놀라운 얘기를 털어놓았다.
“자네들이 일러준 대로 밤마다 찾았지. 그리고 어느 날 밤 드디어 선물을 받았네. 그래. 그녀가 방문을 열어줬어. 하지만 곧바로 자기 부모를 데려왔지. 우린 신분이 달라 부부가 될 순 없지 않나? 그래도 그녀 부모 앞에서 부부의 연 비슷한 걸 맺었네. 모두 함께 대성통곡했지. 맞아. 그때부터 우린 부부로 지냈어. 진짜 부부보다 더 질긴 정이 들어버렸지. 저녁에 찾았다가 새벽이면 나와야 했지만 우린 한 몸이었어.”
까맣게 마른 심상규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하던 낙순이 퉁명스레 물었다.
“성공했군. 그런데 뭐가 문젠가?”
낙순을 바라보는 심상규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문제? 모든 게 문제지. 나 말일세. 조처자와 혼인하고 싶었어. 연정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네. 급기야 용기를 내 아버님께 말씀드렸지. 어찌 됐을까? 당장 짐을 싸 산방으로 가라시더군. 내 어쩌다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나인지 말이야? 자네들이 너무 원망스럽군.”
청춘의 덫
심상규는 고개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뒤늦게 사랑에 눈떠버린 벗을 위해 달리 해줄 게 없었던 친구들은 삼각산 중흥사로 떠나는 심상규를 전송하기로 했다. 몇몇은 절에서 하루를 묵은 뒤 하산했지만 몇몇은 상심한 심상규를 위해 남기로 했다. 산사 풍류에 매료된 낙순과 김려 그리고 이옥은 내친김에 가을까지 절에 눌러앉아버렸다.가을 찬바람이 드세져 솜이불 마련을 걱정하던 어느 날, 조처자가 보낸 편지가 절에 도착했다. 희색이 만면해진 심상규는 툇마루 양지바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서찰을 펼쳤다. 조금씩 떨리던 그의 손은 마침내 편지를 쥘 힘조차 잃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낙순이 다가갔을 때 심상규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유서였다. 조처자가 자결하기 직전 써 보낸 편지 마지막 글귀가 언뜻 낙순의 눈에 들어왔다.
‘비록 우리는 부부지만 전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숨겨진 아내랍니다. 시댁 늙은 머슴 얼굴조차 한 번 본 적 없는 며느리가 세상에 있었는지요? 모시는 길이란 고작 잠자리 시중뿐인 인생이 여기 있어요. 드릴 말씀 태산처럼 많고 남은 회한 하늘에 닿고도 남음이 있지만 가슴에 묻으렵니다. 도련님께선 학업에 정진하시어 어서 빨리 청운의 뜻을 이루소서. 부디 건강하시고 또 건강하세요. 소첩 조아영 두 손 모아 올립니다.’
낙순은 멍하니 서서 심상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절굿공이가 뒤통수를 때린 것 같았다. 곧이어 다가온 김려와 이옥이 심상규를 위로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섬약한 사내는 처절하게 울기를 멈추지 않았다. 목 놓아 울던 그가 절규했다.
“내가 정말 슬픈 이유가 뭔지 아나? 나 없는 낮 동안 그녀가 무얼 하고 보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걸세. 내가 고작 그녀에게 반쪽짜리 남편이었다는 거야. 그게 너무 미안하고 또 한없이 슬프네.”
시간이 흐르며 심상규의 슬픔은 차츰 가라앉았고 첫 서리가 내릴 무렵엔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친의 명을 받고 하산하게 되었다. 심상규를 집 앞까지 배웅한 낙순과 김려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고 서로 갈 길이 다른 사람처럼 관계는 서먹해졌다.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고 장의동으로 홀로 걷던 낙순은 자신의 삶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무언가 끝나버렸고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도정치의 탄생
![무악산(안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봉원사 경내. 인왕산이 가까이 보인다.[윤채근 제공]](https://dimg.donga.com/a/660/0/90/5/ugc/CDB/SHINDONGA/Article/5a/03/f8/13/5a03f81300e7d2738de6.jpg)
무악산(안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봉원사 경내. 인왕산이 가까이 보인다.[윤채근 제공]
김조순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처세를 신중히 했다. 누구에게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정적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은덕을 베풀었지만 예민하게 벼린 칼 한 자루는 반드시 감춰두고 살았다. 같은 편이던 이상황과 심상규가 1786년과 1789년에 각각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렸고 선배 남공철도 1792년 뒤늦게 문과에 급제했다. 그들 모두 김조순의 사람들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임금도 바뀌었다. 딸을 세자에게 출가시킨 김조순은 새 임금 순조의 장인으로서 1802년 마침내 국권을 틀어쥐었다.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한 김조순은 정치 무대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규장각에서 책이나 읽으며 지냈고 권력은 장의동 그의 안방에서 은밀히 행사되었다. 모든 위험의 싹을 제거하기까지 김조순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정치하는 기계처럼 살던 그런 그가 어릴 적 친구 김려를 떠올린 건 1819년 11월이었다.
자신의 야심을 모두 채운 김조순은 문득 과거를 준비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 봉원사 놀이를 계획했다. 늘 그렇듯 실직에 있는 관료는 초대되지 않았다. 문득 김려를 생각해낸 그는 옛 벗을 초대 명단에 넣었다. 천주교도라는 주위의 비방과 방탕한 사생활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내쳐진 김려는 그나마 김조순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 덕분으로 지방 미관말직을 떠돌고 있었다. 벗을 도와는 주되 직접 대면하는 것은 극도로 피하며 살아오던 김조순은 이상하게 그날 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16일 밤, 두 사람은 봉원사에서 만났다.
![김조순의 삼청동 별장 옥호정의 그림.[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윤채근 제공]](https://dimg.donga.com/a/660/0/90/5/ugc/CDB/SHINDONGA/Article/5a/03/f8/3e/5a03f83e05cfd2738de6.jpg)
김조순의 삼청동 별장 옥호정의 그림.[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윤채근 제공]
![젊은 날 김낙순으로 불린 김조순의 필체.[경기 충현박물관 소장]](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a/03/f8/5a/5a03f85a14c9d2738de6.jpg)
젊은 날 김낙순으로 불린 김조순의 필체.[경기 충현박물관 소장]
무협소설가 김조순
“부원군께선 이게 기억나시려나?”백발의 김려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고향옥서사 시절 김조순의 작품만을 따로 묶은 ‘고향옥소사(古香屋小史)’였다. 책장을 넘기다 자신이 지었던 무협소설 ‘오대검협전(五臺劍俠傳)’을 발견한 김조순이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은 조금씩 뒤틀리다 신음으로 변해갔다. 한참 말이 없던 김조순이 속삭였다.
“우리 인왕산에 올라볼까?”
갑작스러운 야간 등산 준비로 봉원사가 시끄러워졌다. 가마꾼들이 소집되고 보온용 외피와 화로를 채비하느라 절 주변은 아수라장을 방불케했다. 혹시 호랑이가 나타날 것에 대비하기 위해 덩치 큰 사냥개들을 몰고 포수들도 도착했다. 장비점검을 하던 김조순은 가마를 물리고 직접 걸어서 올라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승려들이 밝히는 횃불을 따라 능선을 오른 사람들 앞으로 꽁꽁 얼어붙은 경복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경을 둘러보던 김조순이 노복들이 짊어지고 온 술과 안주를 풀게 했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숨을 고른 김조순이 말했다.
“나는 종종 그때로 돌아가고 싶네.”
김조순이 말하는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김려는 묻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경회루가 차갑게 빛났고 궁궐 서쪽 내수사 골목이 멀리 내려다보였다. 김조순이 다시 말했다.
“한 걸음, 나도 한 걸음 더 내디뎌봐도 될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려를 향해 김조순이 모피 외투 아래에서 종이뭉치 하나를 꺼내 건넸다. 수없이 쓰고 고친 흔적이 역력한 무협소설 원고였다.
“도대체 이게 뭔가? 언제 써둔 겐가?”
김조순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차례 연기를 뿜어내던 김조순이 대답했다.
“서사 사람들 다 저세상으로 가고 우리 둘만 남았군 그래. 하지만 자고로 세상엔 풍류가 있어야 제맛 아닌가?”
김조순이 건넨 담뱃대를 입에 가져가던 김려는 원고를 천천히 넘겼다. 번안된 중국 협객소설 사이에 손수 창작한 무협소설이 섞여 있었다. 김려는 갑자기 터진 웃음을 한동안 멈출 수 없었다. 그 원고는 김조순으로 살며 김낙순이 견뎌내야 했던 규장각에서 보낸 시간을 익살맞게 증명하고 있었다.
※각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들 사이의 교유는 사실에 입각해 있다. 고향옥은 실제 김조순의 옥호였으며 ‘고향옥소사’는 김려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만 서사 모임을 통해 김려 그룹과 김조순을 연결한 건 허구다. 1819년 봉원사 유람은 김조순의 기록 ‘기봉원사유(記奉元寺遊)’에 근거했다. 강이천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 사건에 연루돼 1801년 옥사했고, 과거급제에 실패한 이안중은 여성 정감의 한시를 짓다 1791년 불혹의 나이에 고향 단양에서 숨졌다. 이옥은 1792년 정조가 일으킨 문체반정에 걸려 벼슬길이 막힌 채 불우한 생을 살았다. 같은 문체 문제로 정조에게 지목됐던 김조순 이상황 심상규 남공철은 이옥과 달리 간단한 반성문으로 방면됐다. 강이천에 연좌되어 천주교도로 몰린 김려는 1806년까지 유배지를 전전하다 김조순의 도움으로 해배됐고 함양군수로 재직하다 1822년 숨졌다. 이옥이 지은 ‘심생전’ 역시 김려 문집에 수록돼 있는데 심생이 과연 심상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려 그룹과 맺은 교분으로 인해 천주교도에게 관용적이던 김조순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열어놓고 1832년 숨졌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