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의 구조적 형태들은 안팎에서 감춤 없이 드러난다. 이는 모든 것을 밝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오스만 제국의 문화적 자신감으로 여겨진다. 내부로 들이비치는 빛은 창들의 위치를 다 드러내며 건물 안을 환하고 부드럽게 비춘다. 논리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압도적인 장엄함과 종교적 경건함이 함께 깃들어 있다. 하기아 소피아가 웅장하고 신비한 어둠 속에 플라톤주의적 상징을 담고 있다면, 쉴레이마니예에서 뚜렷이 읽히는 것은 그때까지 없던 새롭고 현대적인 미학이다.
아치, 돔, 기둥, 문의 조합은 뜯어보면 볼수록 정확히 짜 맞춘 인상을 준다. 이는 하기아 소피아의 외관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하기아 소피아는 2000여 년 가까운 세월 속에 건물이 낡아 구조가 위태로워졌다. 그래서 건물 바깥에 덕지덕지 수많은 부벽을 지어 보수한 상태다.
쉴레이만 대제의 건축가도 보수공사를 맡았다. 하지만 쉴레이마니예는 하기아 소피아의 미적, 구조적 결함마저 극복한 최고 완성도의 디자인을 요구했던 것 같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더 완벽한 구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선지 쉴레이마니예 자미는 깔끔하고 완벽한 인상으로 지금도 새로 지은 건물처럼 서 있다.
지도층의 기부와 명예

<사진 4> 쉴레이마니예 자미의 앞마당. 한가운데에 샤르드반이 보인다.
메흐메트 2세의 새 수도 건설은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승리를 떨쳐 보이려는 의도가 넘쳐났다. 그에겐 그리스 문명을 존중하고 껴안을 아량이 있었다. 그의 정복지에 있는 아테네, 코린토스, 델포이 신전을 방문했던 메흐메트 2세는 이슬람 중심으로 제국을 경영하고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문명의 유산에 대해 보인 태도는 취사선택적이었다.
다시 쉴레이마니예 자미 안으로 들어가보자. 키블라 벽에 난 창문들을 통해 그 너머에 마당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쉴레이만의 무덤이 있다. 그의 아내 록셀라나의 무덤은 그곳에 독립된 건물로 서 있다. 이런 배치 때문에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이들은 이 건물의 창건자에게도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런 위계적 배치는 오스만 고전기에 확립됐다.
오스만 건축사업의 주된 재원은 술탄과 지도층의 기부로 마련됐다. 터키어로 ‘바크프’라고 하는 이 기부는 이슬람의 오랜 전통에서 나왔다. 바크프는 종교나 자선을 목적으로 한 토지나 세수(稅收)의 원천이다. 메드레세, 이마레트, 모스크 같은 종교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쉴레이만뿐만 아니라 뤼스탐 파샤,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 같은 그의 재상들도 종교재단을 설립하고 건축사업을 펼쳤다.
여러 백성이 사용하는 공공건축물도 바크프로 지어졌다. 그 후원자는 명예라는 대가를 받았다. 이는 같은 시기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해볼 만하다. 유럽에서도 공공사업을 장려했고 후원자의 명예를 독려했다.
水道체계와 정교하게 결합

<사진 5> 카이타네 물 공급체계.
여러 개의 기둥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앞마당 한가운데 장식 분수인 ‘샤르드반’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15~16세기의 물 공급체계는 대도시 이스탄불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다. 수도시설은 오스만 제국 건축가들의 중요 과업이었다. 건축가들은 도시 외곽부터 수로체계를 건설해 도시 곳곳에 상수도관을 설치했다. 로마시대의 옛 수도교도 보수해서 썼다.
대도시 이스탄불의 물 공급을 위해 총괄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취수지, 댐, 수로, 터널, 주요 배수지점(터키어로 ‘탁심’), 사이폰(曲管) 등을 계획했다. 이스탄불 외곽 벨그라드 숲의 카이타네 물 공급체계가 대표적인 예다(사진 5). 쉴레이마니예는 ‘할칼르 수유’라는 130여 km에 달하는 16개의 급수체계와 연결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