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은 경진년(1760) 이후로 세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세자를 폐위시키는 반교’에 따르면, 생모인 선희궁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말하면서 내관과 나인 100여 명을 죽였고 불에 달궈 지지는 악형을 가했다고 했다. 세자는 주로 만만한 아랫사람들만 죽였다(정병설, 앞의 책, p.148 등).
그런데 가학증의 대상이 점차 확대됐다. 후궁은 물론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쫓아가 공격하려고 했다. 영조가 술을 마셨다고 의심했을 때였다. 아마 시강원 스승들이 일러바쳤다고 생각한 듯하다. 죽기 직전에는 생모 선희궁까지 죽이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창덕궁 낙선재 우물에서 자살을 시도한 행적도 보인다. 평양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일반불안장애,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를 겪던 세자는 1760년부터 정신분열증까지 겪게 된다. 헛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욕하기 시작했다. 세손(정조) 등이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는 “부모도 모르는 내가 자식을 어찌 알랴”라며 쫓아냈다. 자기는 부모도 자식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자포자기였다.
이듬해 1761년 1월 세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빙애(경빈 박씨)를 죽였다. 옷을 갈아입다가 의대증이 발병해 죽였는데, 얻어맞은 빙애는 세자가 나간 뒤 신음하다가 절명했다. 빙애를 구타할 때 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恩全君)도 칼로 쳤다. 그리고 칼 맞은 은전군을 문밖 연못에 던졌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 영조는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
아들이니까…
이상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된 과정이다. 그럼에도 이런 객관적 사실들은 도외시한 채, 사도세자가 소론과 결탁하려다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당쟁 희생설’이 근거도 없이 사실처럼 떠돌았다.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정조 13년(1789)에 쓴 ‘현륭원행장(顯隆園行狀)’이 그것이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기며 지은 일대기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는데, 영종께서 부르자 즉시 밥을 뱉어 버리고 대답하며 일어났다. 좌우에서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소학’에 ‘밥이 입에 있으면 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 영종이 듣고는, “이제 겨우 세 살짜리가 체인(體認) 공부를 알고 있구나” 하였다는 것이다. (…) 여름에 너무 더워서 궁관이 서연 여는 시간을 고쳐 정할 것을 청하자, 이르기를, “아침저녁은 시원하여 송습(誦習)하기에 알맞을 뿐만 아니라 대조께서는 낮 시간에 주강(晝講)도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더위가 싫다고 시간을 바꿀 것인가” 하고 듣지 않았으며, (…) 정축년 2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소조가 울부짖고 발버둥을 치며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초빈에서 발인 때까지 다섯 차례의 전(奠)과 일곱 차례의 곡(哭)을 모두 몸소 봉행하면서 정성을 다하였고, 새벽 밤낮 할 것 없이 곡소리가 거의 그치지 않아 내외척과 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그 소식을 들은 중외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문정전(휘령전).
그러나 정조가 쓴 행장은 사실과 다르다. 아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 누군들 자신의 아버지가 악행으로 역사에 남길 바라겠는가. 그리고 사도세자를 구하려면 영조를 후회하게 해야 했다. 바로 병신년(1776)에 영조가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모든 공문서의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 있었던 차마 말 못할 내용의 기록들을 전부 지워버리라고 하였던 사실을 그 증좌로 들었다.
공존할 수 있는 권력
융건릉에 가보면 정조의 효심과 사도세자의 비극이 만나 기이한 역사 왜곡이 벌어지고 있다. 여전히 당쟁으로 희생된 사도세자와, 그런 아버지를 되살려낸 정조의 갸륵한 효심이라는 담론이 넘쳐난다. 안내문에도 자원봉사자의 해설에서도…. 축제와 현양(顯揚)이라는 두 축으로 진행되는 지방자치단체 행사가 낳은 또 다른 병폐다.
이 사건의 전개와 원인을 대체로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종종 빠지는 함정이 있다. 첫째, 여전히 그 원인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둘째, 이런 사태의 근원적인 원인이 ‘본질적으로’ 권력의 비정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첫 번째 함정의 사례는 박시백의 견해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세자의 비극에 하나의 해석을 더했다며, 그 원인을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에서 찾았다. 2인자답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족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그는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은 사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영조의 장수에 있다 할 것이다’고 했다(앞의 책, 작가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