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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healing 필링 feeling

세상 모든 것 저마다 자리가 있다

제주의 숲, 바다, 바람, 예술가들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세상 모든 것 저마다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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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들의 손길

다음 날 밝은 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집을 보니, 제법 근사해 보였다. 빛깔도 곱고, 모양새도 단정했다. 호사스럽지 않아서 좋았고 단단해 보여서 좋았다. 물론 큰 틀의 외형이 그렇다는 것이고 앞으로 수많은 일을 겪게 될 집이었다.

우리는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월정리로 향했다. 친구 말에 의하면 요즘 제주도에서 월정리가 가장 ‘핫’한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 젊은 친구들이 어울려 만든 ‘고래가 될’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그 가게 하나로 월정리가 바뀌었고 제주도의 문화 지형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누군가 근사한 커피 전문점을 경치 좋은 곳에 차렸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가보니, 아니었다.

카페 ‘고래가 될’은, 그 옥호만큼이나 무슨 임시 가설물처럼 보였다. 허름한 집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담이며 벽이며 마당을 자유분방하게 고쳤을 뿐이었다. 과연 ‘핫’하다는 소문대로 꽤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 옆으로는 카페며 음식점들이 해변을 따라 들어섰다. 대체로 서울의 홍대 앞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언뜻 보았음직한 양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고래가 될’을 사람들이 찾는지도 모른다. 대도시의 화려함에 지쳐서 제주도로 피정을 떠나온 사람들이 홍대 앞이나 신사동에서 봄직한 카페를 또 찾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허름한 듯하면서도 잔손길이 많이 간 ‘고래가 될’은 그런 이들이 편안하게 찾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냐. 여기, 꽤 재미있어.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하고. 제주도에 온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거든. 그게 여기의 진짜 매력이지.”



친구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살펴보니 카페 ‘고래가 될’은 그저 독특한 차림을 한 카페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 아지트로 작동하고 있었다. 봄에는 반핵 퍼포먼스로 유명한 행위예술가 신주욱 작가가 이 카페에서 전시를 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별과 달 지구까지, 세상 모든 것 저마다 자리가 있다’는 주제였다. 여름에는 ‘고래가 될’ 카페를 중심으로 ‘월정리 블루스 - 같이 살자 지구, 우리…’라는 작은 축제가 펼쳐졌다. 서귀포의 ‘이중섭미술관’이 주관하는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출신인 이두원 작가가 파키스탄에서 보내온 귀한 물건들이 전시되기도 했다.

10월에는 김유지 작가의 의미 있는 전시회가 지속된다. 4년 전 어느 봄날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 무작정 상륙한 김유지 작가는 1년 넘도록 제주도 구석구석을 다녔는데, 이를 ‘치유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곶자왈, 올레길, 월정리 바다 등에서 힐링과 치유의 영감을 얻은 김유지 작가는 바로 그 신성한 곳들을 풍경화와 일러스트로 표현했고 이를 ‘맨도롱유지차展’이라는 제목으로 10월에 ‘고래가 될’ 카페에서 전시한다 ‘맨도롱’은 ‘따뜻하다’는 뜻의 제주도 말이다. 여기서 전시를 마친 후, 제주도 내 곳곳의 카페를 옮겨 다니며 전시가 진행된다. 10월에는 월정리의 ‘고래가 될’ 카페, 11월에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레이지박스’, 12월에는 제주시 일도동 ‘왓집’ 등이 그 순서다.

세상 모든 것 저마다 자리가 있다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카페 ‘고래가 될’.

문화 바이러스

이렇게 지금 제주도는 의미 있게 진화하고 있다. 물론 큰 흐름은 제주도의 ‘관광’이요 ‘개발’이 주도한다. 중국의 큰손들이 중산간 일대를 사들여 호텔과 골프장과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제주도를 ‘발전’시키자는 행정 개념도 결국 개발과 직결된다.

이 큰 흐름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역행하면서, 부분적으로 저항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속속 제주도에 정착하고 있다. 작은 집을 짓고, 소박한 카페를 열고, 의미 있는 예술을 펼치면서, 그들은 서로를 문화적으로 감염시키고 있다.

그 의미 있는 문화적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해서 한번 ‘창궐’하면 화순 곶자왈이나 사려니 숲처럼 서로 엉키면서 더 번져간다. 내 친구도 그런 꿈을 함께 꾸고 있다. 진정한 힐링이란 이렇게 새로운 삶을 가꿔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짙푸른 월정리 바다를 보며 한동안 생각했다. 바람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신동아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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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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