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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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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 어떤 가치보다 가족의 생존과 성공이 중요했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돼 있는 부모에게 도덕적 원칙이나 사회적 규범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명을 위해 가족 모두가 희생하는 선택과 집중, 그리고 그의 성공이 다른 형제자매와 친척들에게 재분배되는 비리와 부패의 순환적 고리가 만연했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보편적 가치, 원칙, 규범을 몰랐던 게 아니라 그것들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심리적 유연성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사회를 역동적으로 지각했기에 가능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국가가 이루지 못한 사회적 발전을 이뤄낸 것은 당장은 지옥이지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잘살 수 있다는 역동성에서 비롯됐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보다는 어제보다는 나아지는 자신의 변화로 보상받았기에 가능했다.

함께 느려지는 천국

그런데 이런 사회적 역동성은 지킬 것이 많으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족의 사랑과 가치를 지켜야 하는 아버지에게 날마다 야근과 회식, 회사를 위한 헌신을 강조할 수는 없다. 환경을 보전하고 문화재를 지키고 삶의 터전과 같은 가치를 하나하나 중시하며 진행하는 도시개발과 인프라 사업은 느릴 수밖에 없다. 모든 규제와 법규를 준수하며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원칙을 스스로 지키는 기업의 경쟁력은 그렇지 않은 다른 국가의 기업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모든 요인은 우리 사회를 어쩔 수 없이 저성장으로 이끈다.

사실 지금 선진국 대부분은 이미 저성장 국가들이다. 과거의 우리처럼, 경제 발전이 막 시작된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저성장에 빠진 선진국들이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방법은 고성장 국가들의 역동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변칙과 역동성, 착취가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사회 발전은 개인적으로도 역동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고시를 패스하거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회 엘리트들이 누리던 인생 역전 드라마는 더 이상 없다. 인생 역전의 많은 부분이 현재의 기준에서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어진 기득권이 됐고, 그런 기득권을 없애는 원칙과 규범의 적용은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능케 하는 사다리를 없애는 결과로 나타났다.

고성장 사회에서는 아파트를 사거나, 주식투자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심지어 등록금을 대줄 똑똑한 자식이 없어서 그냥 땅을 가지고 있었던 농부들이 벼락부자가 되는 역동성이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원칙과 규범이 지켜져야 하고 일관성과 합리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인생의 변화도 대개 예측가능한 범위에서만 이뤄진다. 과거에는 10년이면 벌었던 돈을 버는 데 이제는 30~40년이 걸리고, 한 세대에 가능했던 변화가 이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천천히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럼 느려져서 지루해지면 천국은 가까워질까. 그건 아니다. 느린 사회가 천국이 되려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같이 느려져야 한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단기간 내 인생 역전을 꿈꾸지 않으며, 물질적 성공에 매달리지 않고, 성공이나 성장 이외의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고, 원칙이나 규범에 의해서 스스로 손해 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만의 천국

미국의 대학 진학률은 50%가 넘지 않는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근사한 요리 실력, 사회적 정의에 민감하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이나 미국의 중산층 기준도 물질적이거나 사회적 성공과 무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들 사회에도 한순간에 성공하거나 사다리를 타고 계층을 순간 이동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만큼 특이하기에 뉴스거리가 된다. 그들의 행복도가 우리보다 훨씬 높고 그들의 사회가 지루하면서도 천국인 것은 아마 우리 사회와 같은 역동성이 필요 없어서일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에게 우리 사회는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절대 지루하지 않은 천국을 원하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2000cc 이상의 자동차와 부채 없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 500만 원 이상의 소득과 1억 원 이상의 현금, 그리고 연 1회 이상의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최소한 자신이 못 이루면 자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나 자녀가 평생 학자금과 주택, 차량 대출금을 갚고, 대학은 신중하게 고려해서 수지타산이 맞을 만한 자녀만 스스로 알아서 진학하고, 그냥 살던 동네에서 평생 동안 살고, 그러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죽어가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하기도 싫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現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저서 : ‘가끔은 제정신’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부러워하는 이른바 선진국 국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모습이며, 우리 사회가 향해가는 지루한 천국의 모습이다. 그들이 그런 천국에서 살아가는 지혜는 물질적 성공과 성장 이외의 삶의 이유와 가치를 빨리 찾아내는 것이다. 아직 그러지 못한 한국인들은 우리 사회가 지루한 지옥으로 변해갈까봐 전전긍긍하는 듯하다. 지루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지루함을 견디게 할,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만의 천국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신동아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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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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