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의로운 사회보다 어진 사회가 돼야”

사유하는 지식인의 표상 김우창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4-01-22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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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로운 사회보다 어진 사회가 돼야”
    “나무는 스스로에 금을 긋지 않으니, 그대의 체념의 조형(造形)에서 비로소 사실에 있는 나무가 되리니.”

    ‘체념의 조형’ 서문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시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릴케는 창조적 직관의 힘으로 사물시(事物詩)의 진풍경을 펼쳐낸 독일 시인. 사물에 대한 객관적 서술을 통해 관념이 아닌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언어에 조각과 같은 조형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지난해 12월 17일 출간된 ‘체념의 조형’은 김우창(77·고려대 명예교수)의 50년 사유(思惟) 궤적을 엮은 책이다. 문광훈(충북대 교수·독문학)이 편자(編者)로서 은사가 쓴 글 34편을 골라내 엮었다. 김우창은 200자 원고지 320매 분량의 서문을 새로 썼다. 서문엔 ‘전체성의 모험 : 글쓰기의 회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사회학자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김우창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상가의 독자는 대중과 지식인 둘로 나뉜다. 누구는 대중의 사상가인 반면, 또 누구는 지식인들의 사상가다.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사상가’를 한 사람 꼽으라면 그는 김우창이다. 이른바 ‘진영 논리’가 두드러진 우리 사회에서 김우창은 이채로운 존재다. 그의 문학평론은 민중문학론과 자유주의문학론의 이분법을 거부했고, 그의 사회비평은 보수와 진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이분법 역시 넘어서 있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심미적 이성’과 이에 기반을 둔 ‘이성적 사회’였다.”



    독문학자 문광훈은 ‘이성적 사유의 현대적 가능성’ ‘내면성의 사회적 확산’ ‘반성적 사유의 교향악’을 김우창 인문주의의 열쇳말로 꼽는다.

    초로에 접어든 후학들은, 그의 이름 석 자에 ‘진정한 정신주의자’ ‘고독한 이성주의자’라는 수사를 붙인다. 1월 10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50년 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해온 노(老)사상가를 만났다.

    # ‘더불어 있음’을 잃어버린 時代

    우리의 모든 지적 활동의 밑에 어려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있던 꽃과 나무와 산의 그림자이다. 맨 처음의 감각적인 ‘더불어 있음’에 섞인 이러한 것들은 가장 근원적인 교사로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한다. 또 이 교사들이 가르쳐준 것은 단순히 어린 시절의 꿈이 아니라 세계와 삶에 대한 변함없는 진실이다. (꽃과 고향의 땅, 1977, ‘체념의 조형’에 재수록)

    김우창의 인문주의는 사람이 사는 땅과 하늘, 고향의 세계에 버티고 서 있다.

    “우리가 쓰는 동(洞)은 동굴, 골짜기, 골 같은 공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길 위에 살지 않았다. 도로명 주소는 사람의 이름을 숫자로 바꾼 것과 같다. 군사령부에서나 통할 논리다. 이름은 사실의 무게를 지닌다. 동네가 군번 같은 숫자로 바뀐 것이다.”

    그는 “동네와 어른이 사라졌다. 되돌아갈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 전통이 깨져버렸다”고 개탄했다.

    “제자 하나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10년 동안 이사 안 한 사람 손 들어보라 했더니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다. 생물학적 존재는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집 없는 사람, 이사 자주 가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비합리적 구조다. 사는 곳이 불안하니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종로구 평창동에서 30년 넘게 살았다. 지금도 손수 자동차를 운전한다. 10여 년 전 오랫동안 탄 엑셀이 길에서 서버리는 바람에 바꾼 아반떼를 지금껏 탄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명하려고 노력하는 데 그럴 필요가 없다. 예전에 유명한 것은 동네의 좋은 어른, 충실한 일꾼을 가리켰다. 그것은 의미 있는 유명도다. 막스 베버는 중국에서 역사적·계속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까닭을 ‘동네 공동체’ ‘씨족 공동체’가 강해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는 동기가 적었던 것에서 찾았다. 자본주의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할 얘기지만…. 우리는 공동체를 파괴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공동체가 무너졌다. 정신적 전통이 깨져버린 곳에서 다시 태어난 나라가 됐다. 겉으로는 서양 비슷하게 근대화됐을지 몰라도 할 일이 많은 곳,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라다.”

    #권력과 부의 줄달음길

    오늘날 우리의 삶이야말로 병적인 조급함과 헛갈리는 목적으로 특징지어지게 되었다. 세우고 뜯고, 궁리하고 뛰고, 권력과 부의 줄달음길로 내달리는 일은 우리 주변을 현란하게 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마음과 삶에 조급함을 삼투(渗透)하게 한다. 그리하여, 마음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설렘과 불안한 흔들림의 상태에 떨어진다. 이것을 잠시라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극되는 소비재에 대한 욕망의 만족이다. 흔들리고 있는 마음은 욕망의 온상이 되고, 그것은 시장이 제공하는 상품이나 지위와 멋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평화를 찾는 것이다. (고요함에 대하여, 1985, ‘체념의 조형’에 재수록)

    ▼ 사회가 소란스럽습니다.

    “새로운 구조 탓인 것 같다. 흔들리는 이유에 대한 전체적 이해가 성립돼야 한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는 없는 시대, 가난한 시대였다. 역설적이지만 편리한 점도 있었다. 먹고사느라 바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젊은 사람이 구직하기 어려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1950~60년대의 불안과 오늘의 불안에는 차이가 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니 좋다 하겠지만 정신 상태도 좋아졌느냐를 생각해봐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의 많은 사람이 농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농촌이 건강하게 살아남은 덕분이기도 하고, 농촌이 상업화해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돌아갈 농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주로 갈 수도 없다.”

    ▼ 돌아갈 공동체가 없어 불안하다는 뜻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사는 구조가 사라졌다. 또한 마음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침이 없다. 사회의 전체적인 심성과 정신문화가 쇠퇴했다.”

    실용의 수익모델이 사회를 지배한다. 이익이 보장되면 선(善)이다.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지상의 척도가 돼버렸다.

    그는 “마음의 실체는 고요함”이라고 했다.

    “생각하면서 살고, 살면서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려면 일어나는 일에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은둔자가 되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거리를 유지하면 마음의 공간이 생긴다. 고요함의 순간, 외부의 자극에 흔들렸던 욕망이 의미 없음을 깨닫는다. 대세를 좇아가려 하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 뜻하는 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 마음대로 산다는 게….

    “맹자는 구방심(求放心)이라고 했다. 달아난 마음을 구해서 찾아와야 한다. 사람들이 좇는 것은 사회가 시키는 것이지 자기 마음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참으로 알려면 생각해야 한다. 그 순간이, 고요해지는 순간이다. 더 깊이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고요해진다. 사유는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사물을 받아들여야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해야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물과 생각 사이에 왜곡이 일어난다. 사람과 생각 사이의 간격을 줄이려는 노력이 사유다. 자기반성을 포함한 사유 노력이 있어야만 사물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합리적 사유에 이르려면 여러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개인이 객관적 세계를 체험해 보편성에 다가서면 체험의 세계가 넓어지고 인간의 주체적 의식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인문사상을 가로지르는 핵심은 ‘심미적 이성’과 ‘이성적 사회’다. 이성은 현실에서 나오고 이 나옴을 통해 현실에서 분리되며 또 이상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들어간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보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이성은 끊임없이 교환된다. 사유는 객관을 통해 보편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고요함에 대하여’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오늘날의 소음들 속에서 우리가 상실한 것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유지하며, 바깥세상에 밝고 기민하게 반응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들을 하나로 종합될 수 있게 하는, 마음의 근본적 고요함이다.”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후학들은 ‘김우창론’을 쓰면서 ‘고독한 이성주의자’ ‘진정한 정신주의자’라는 수사를 붙인다.

    #정치와 소통

    “정치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지난해 12월 17일 ‘체험의 조형’ 출간 집담회에서)

    그는 “전략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가 바로 전략의 논의이며, 명분은 집단의 이익이다.

    “정치는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흥분제다. 그래서 나는 정치를 멀리하기를 원했다.”

    그는 1954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꿔 1958년 졸업했다. 1961년 코넬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하버드대로 다시 유학을 떠나 1975년 문학박사 학위를 득했다.

    “정치학에서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은 어릴 적부터 철학, 문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정치에 혐오를 느낀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는 “정치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는 말은 역설적인 얘기”라면서 “정치가 없으면 만인전쟁(萬人戰爭)이 된다. 정치를 잘해야 정치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어진다. 정치란 정치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용미(用美)라는 표현은 전략적이다. 정치의 언어다. 미국 사람이 바보가 아닐진대 미국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나. 나라들 간 관계는 보편적 이상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풀어가야 한다. 한일관계를 보자.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일본이 저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치 전략이다. 그 경우에도 전략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이상에 호소해야 한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이렇게 하자고 호소해야 한다. 뭘 줄 테니 뭘 내놓아라 식의 전략적 사고로는 안 된다.”

    그는 “대통령이 어떻게 통일을 ‘대박’에 비유할 수 있느냐”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일이 대박이다? 그것은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모든 사람이 대박을 위해 쫓아다니니 그 말을 이용한 것 같다. 통일을 대박이라는 이해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경제적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다?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그것만 강조한 것은 아닌데, 그 발언을 비중 있게 다룬 언론이 더 큰 문제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대중적인 것에 지나치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심성과 정신문화가 쇠퇴하는 게 걱정이다. 통일은 당위의 문제다. 이익이 생기고 말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통일을 어떻게 하느냐를 돌봐야 한다. 윤리적 이념의 연쇄관계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화합해서 사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통일은 남는 장사, 이득이라는 시선으로 논할 사안이 아닌 가치 구현이며 치유와 회복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무엇이 소통인가? 소통은 제도적으로 돼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 자체가 소통이다. ‘저 사람 말이 안 통해’라고 말하는 것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말대로 안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는 것은 국정을 담당한 사람의 시간 낭비다. 조선왕조 때 백성 얘기를 들어야 한다고 해서 임금이 경복궁 앞에 나와 동원된 이들과 대화를 했다. 그게 소통인가. 행사로서 하는 것일 뿐이다. 진짜 소통은 임금이 보통 사람의 생활을 이해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 얘기, 경제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소통이 잘 안 됐다. 국민이 가장 문제 삼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인당 소득 4만 달러가 되면 복지가 어떻게 되고, 빈부격차가 어떻게 해소되며 하는 것들이 빠져 있다. 경제가 잘 돌아가야 복지도 해결되고 복지가 잘 돼야 경제도 안정된다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4만 달러가 되면 개인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 것인가? 나는 대통령이 소신대로 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소신을 국민이 자신의 관심사 속에서 이해하게 하는 게 소통이다. 케네디가 ‘바다에 물이 들어오면 큰 배고, 작은 배고 다 같이 뜬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엔 모든 사람을 배려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것으로서 소통이 된 것이다.”

    #고독한 이성주의자, 진정한 정신주의자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할 때 ‘인’이 위고 ‘의’가 두 번째로, 인이 더 위에 있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도 정의를 중요시하지만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불교에서도 진리를 존중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자비지요. 인간의 많은 문제는 부분적 덕성으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사회정의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덕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이 놈 꼭 죽여야 한다고 하다가도 차마 못하는 것이 인간 마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건전한 인간사회를 만드는 통로일 것입니다. 정의 하나만 가지고는 참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지요. 정의와 더불어 사랑도 있고 인간애도 있고, 여러 가지 연결 속에서만 인간의 진리는 유지될 수 있지요.” (세 개의 동그라미-마음·지각·이데아, 2009)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실을 일관성 속에 연결하려는 노력이다. 사실들을 모아 사실들의 전체성 내지 전체성에 이르고자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거꾸로 준비한 전체성으로 사물들을 재단하려는 것”이라고 밝힌다. 문학은 마음의 공간이 전달되는 것이다. 읽기는 나의 밖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다. 다른 세계로의 출발이다.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책에서 책으로 건너 헤매어 그 안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면서 또한 사람의 생각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화해할 수 있는 근원이 무엇이냐, 그런 것을 생각하면 형이상학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다. 마르크스를 현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해야지 마르크스의 말대로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애덤 스미스 또한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이용해야지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라고 본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과 지향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민중적인 기반엔 3가지가 있다. 첫째로 별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이 되기 싶다. 그냥 이대로 살자는 것이다. 둘째로 민중의 흐름에 호소해 대중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지적인 분석에 입각해 정치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오늘 아침 진보당, 노동당 같은 정당이 잘 안 된다는 뉴스를 봤다. 진보주의는 근본적으로 높은 지적인 분석에 입각해서 나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프로그램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문화가 지적인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진보주의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높은 의미에서의 세련된 지적 풍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통합에 대한 지적 이해가 사람들의 바탕에 존재해야 한다. 독일 같은 곳에서 통합, 연립,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은 유권자가 지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스위스에서 기업 임원의 임금이 같은 회사의 최저 임금 노동자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을 두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그런 법안이 발의되는 사회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국민이 그것을 부결시킬 지적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예전에 선진사회, 후진사회를 생각할 때 먹고살 만하니 사람들이 정직해지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반대도 있는 것 같다. 함부로 얘기할 문제는 아니지만 영국, 독일이 이탈리아, 스페인보다 잘되는 것은 근면, 정직해서인 것 같다. 윤리적인 문화, 지적인 문화가 중요해 보인다.”

    그는 “선하게 살려면 결심을 해야 하는 곳은 좋지 않은 사회”라고 말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 중에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 아닌데 정직해야 할 때는 어떻게 하나? 정직하게 얘기하면 누가 죽거나 하는 큰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듯 인간의 상황은 복잡한 전체성에서 존재한다. 지(智)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다. 지보다 중요한 게 예(禮)다. 사회가 정의로우면 예를 지키기가 쉽다. 의(義), 정의롭게 따지는 것보다 인(仁)이 더욱 중요하다. 의에 따라 사는 것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진 사람의 세상은 정의를 따질 필요 없다. 빼앗아가는 사람이 없는데 따질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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