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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고구려 금관(?) 최초 발견기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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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고구려 금관은 평남 강서군에서 도굴 형태로 출토됐다고 하니 ‘전(傳)강서 금관’으로 부를 수 있다. 이 금관의 출토 경위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는 것은 소장자 김 씨(익명 요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일항쟁기 함남 원산에서 사업을 했던 조부가 ‘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한 ‘서원용성(西原用成)’이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이 금관을 아버지(1917년생, 97세)로부터 전해 받았는데 여기엔 사연이 있다. 그는 조부모를 본 적이 없다. 원산에서 만주로 소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해 큰돈을 모은 조부모는 광복 후 월남하지 못했고, 그는 6·25전쟁이 끝난 1960년대 초 출생했기 때문이다. 조부모는 6남매를 뒀다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남이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아버지)은 일본 주오(中央)대를 다니게 하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성남중에 다니게 했다.

광복 후 바로 분단이 됐기에 일본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원산으로 가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서울 신길동 집에 거주했다. 할아버지가 골동품 수집에 대단한 취미가 있어 상당한 유물을 수집했으며 둘째 아들을 공부시킬 때부터 서울 집에 상당 부분을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이 유물을 감추고 피난 갔다. 서울 수복 후 돌아와보니 다행히 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남한에 남은 유일한 핏줄인 동생을 잃었다(행방불명). 그리고 한참 지나 그가 태어났다. 재산이 있었던 그의 아버지도 골동품을 수집했다.

그는 “철이 든 뒤로 우리 집에 골동품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중요한 것만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이 금관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큰 취미가 없어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라고 말했다. K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화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도 유물 수집을 시작한 것.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기에 먹고사는 일로 급급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재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문화재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즐겨 사용한다. 외부인을 만날 때는 ·#52059;·#52059;역사문화연구소 이사 명함을 내놓는다. 또 다른 K대에서 문화재보존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의 집에는 유물이 넘쳐나기에 그는 3대에 걸쳐 수집한 유물을 고려대 중앙박물관, 단국대 석주선기념관, 상명대 계당박물관, 전북 부안의 청자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동북공정 보며 고구려 금관에 주목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김 씨 조부에게 전강서 금관을 판매한 고물행상 서원용성(‘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의 명함 전면과 뒷면.

15년 전 그는 인연 있는 상명대 사학과 교수팀과 도예지 답사에 갔다가 함께 온 박선희 교수와 인사를 했다. 둘은 ‘주체성 있는 역사’에 관심이 일치했기에 가끔 만나면 토론을 하며 교분을 쌓아갔다. 그리고 2003년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펼치는 것을 목도했다.

그는 집에 고구려 금관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중국에서는 금관이 단 한 점도 나온 게 없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처럼 고구려도 금관을 제작했다면, 고구려가 우리 문화권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라는 생각을 한 것. 그는 금관을 싸놓은 보따리에 들어 있던 명함을 떠올렸다.

그 명함 전면엔 ‘古物行商(고물행상)’이라는 직업명과 ‘西原用成(서원용성)’이란 이름, ‘京城府 鐘路區 明倫町 三丁目 七七番地(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란 주소가 찍혀 있었다. 뒷면에는 ‘江西郡 普林面 肝城里 金冠(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금관)’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대일항쟁기의 고물행상은 골동품상이다. 이는 조부가 ‘니시하라’라는 일본 성을 쓰는 골동품상으로부터 (평남)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출토된 금관을 매입했다는 뜻이었다.

강서군에는 고분이 많은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 고분들은 고구려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 때문에 일제는 그곳의 고분을 집중 조사해 그 결과를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정리해놓았다. 조선고적도보는 지금도 고구려 고분을 연구할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꼽힌다. 금관은 삼국시대에만 제작됐고, 이 금관은 강서군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는 고구려 금관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더는 추적하지 못했다.

중국 조사 ‘고구려 금관 있었다’

5년이 지난 2008년 박선희 교수가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란 책을 출간했다며 한 권을 보내왔다. 복식사(服飾史) 전공인 박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고조선 시대부터 ‘꼬깔(‘절풍’으로 부르기도 한다)’류의 모자를 써왔는데 여기에서 금관이 유래했다고 정리했다. 이 책을 읽어본 김씨가 박 교수를 만나 집에 보관해둔 고구려 금관을 보여주었다. 무릎을 “탁” 친 박 교수는 그때부터 고구려 금관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輯安)시에는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 등 고구려 고분이 즐비하다. 2003년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 등은 그곳에서 그들이 ‘마선 2100호’로 명명해놓은 대형 고구려 무덤을 발굴했다. 장군총처럼 계단식(4단)으로 돼 있는 무덤인데 장군총과 달리 허물어져 있었다. ‘당연히’ 도굴당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돌을 긁어내며 정밀 조사를 하자 550여 점의 유물과 유물 조각이 수습됐다. 그중에 금관에 달았을 것이 분명한 작은 금판의 달개장식이 여럿 나왔다.

봉건시대에도 도굴은 엄금했기에, 도굴꾼들은 금제품을 발굴하면 바로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청자나 백자는 그대로 유통시켜도 금붙이만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우그러뜨린 다음 녹여서 금덩이로 만들어 거래한 것. 무덤에 들어간 도굴군들은 횃불 등을 켜놓고 이 짓을 했으니, 우그러뜨리는 과정에서 작은 금붙이들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물고고연구소가 그것들을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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