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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철암의 ‘까치발’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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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옛 갱도.

김 씨의 말처럼 보존하고 재활용하는 것이 일종의 흐름이 됐다. 다행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내디뎌야 한다. 그저 그런 추억 박물관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당대성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졸버레인이 대표적 사례다. 졸버레인은 산업혁명의 절정기인 19세기 중엽, 그러니까 1847년 채탄을 시작해 1986년에야 폐광된 곳이다. 우리나라의 파독 광부들이 일했던 곳이 바로 졸버레인이다. 유네스코는 2001년 졸버레인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독일 중공업과 유럽의 산업혁명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바탕 위에서 졸버레인은 문화 공간으로 변모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즈’ 수상작을 전시하는 공간이자 크고 작은 박물관, 예술학교, 커뮤니티 작업장, 작가 스튜디오 등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됐다.

이처럼 옛 기억을 보존하되 ‘지금 우리의 삶’이 동행해야 한다. 그래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공감대도 넓어진다. 전국 곳곳에 추억이라는 테마의 공간은 많아지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의 현실과 고뇌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광부의 노래

진짜 힐링은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데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겪는 당대의 문제를 함께 성찰할 때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삼탄 아트마인이 매우 현대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당대를 고뇌하는 이들에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런 당대성이 현재의 공간 개념에 투사됐기에 삼탄 아트마인은 지난해 9월 공공디자인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애초 구상대로 하면 한 60% 진행됐고 앞으로도 최소 3년은 더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사업이 주로 공간 세팅과 전시 위주였다면 앞으로는 지역주민을 위한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고 청정 지역을 테마로 한 음악제나 영화제도 구상 중입니다. 이곳이 장차 정서적으로 힐링하고 문화적으로 필링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이 연재의 꼭지 제목을 정확하게 응용해 풀어낸 김 씨의 설명은 삼탄 아트마인이 꿈꾸는 미래가 현실적인 구상임을 웅변했다.

“불원천리 장성땅에 돈벌러 왔다가 / 꽃 같은 요내 청춘 탄광에서 늙네 / 작년 간다 올해 간다 석삼 년이 지나고 / 내년 간다 후년 간다 열두 해가 지났네 / 남양군도 검둥이는 얼굴이나 검다지 / 황지장성 사는 사람 얼굴 옷이 다 검네 / 통리고개 송애재는 자물쇠고개인가 / 돈 벌러 들어왔다가 오도가도 못하네 / 문어 낙지 오징어는 먹물이나 뿜지 / 이내 몸 목구멍에는 검은 가래가 끓네.”

이런 노래가 있었다. 탄광 산업이 활황이었을 때 전국에서 이곳 정선, 태백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한이 서린 ‘광부 아리랑’이다. 그 시절에 탄광은, 비록 일은 고되고 위험해도 웬만한 직장보다 보수도 넉넉했고 복지도 괜찮았다. 사택이 제공됐고 아이들 학자금도 나왔고 월급도 대도시의 중소기업보다 좋았다. 그래서 많이들 함백, 장성, 철암, 통리로 몰려들었다.

나는 삼탄 아트마인을 나와서, 잠시 고즈넉한 작은 절 정암사에 들렀다가, 눈발로 미끄러워진 만항재 고갯길을 간신히 넘어 철암으로 향했다. 이 일대의 수많은 탄광 마을 중에서 철암은 석탄 저장, 경석 선별, 이물질 분리 등이 일관 작업으로 가능한 국내 최초의 선탄장이 있던 곳이다. 교통도 다른 오지에 비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내 유년의 기억은 철암을 어둡고 깊고 아득하고 먼 곳으로 새기고 있다. 어릴 적, 고모네가 함백에서 살았다. 고모부가 막장 깊이 내려가 석탄을 캤다. 방학 때마다 함백에 갔는데, 오지였다. 검은 산, 검은 사람, 검은 물이었다. 사촌 동생들과 놀다보면 석탄 캐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고모부가 웃으면서 우리를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때, 고모부의 모습은 두 눈 흰자위와 이빨만 하얗게 빛났고 나머지는 온통 검었다.

비극은 1979년 4월 14일 새벽에 일어났다. 함백광업소 자미갱 입구에서 광부 110명을 태우고 갱 안으로 진입하던 광차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2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큰 사고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모부는 광차의 뒤쪽에 앉아 있다가 부상을 당했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은 후 고모네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다. 딱 그때까지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탄광 마을의 이미지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철암동 중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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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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