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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봄의 꽃사태와 개심사의 연못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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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개심사 연못.

일본의 현대음악가 호소카와 도시오의 작품 중에 ‘꽃이 피는 순간’이 있다. 그는 윤이상의 제자다. 도시오는 “난 스무 살 때 윤이상 선생님을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그의 콘서트가 크게 열렸는데, 현대음악에 감동해 직접 찾아갔다.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베를린 예술대학교로 간 것”이라고 회고한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윤이상에게 배웠는데, 약간의 에피소드도 있다. 윤이상의 아들이 음악을 했는데, 대중적인 록음악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자지간이 소원해졌는데, 윤이상은 일본에서 찾아온 호소카와 도시오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위업을 잇고자 했다고 한다. 각별히 아꼈고 따끔하게 가르쳤다고 도시오는 회상한다. 1955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호소카와 씨는 베를린예술대학교에서 유학한 후 오케스트라곡 ‘시간의 심연 속으로(Into the Depths of Time)’ ‘순환하는 대양(Circulating Ocean)’ 등을 작곡했으며 오페라 ‘리어의 비전(Vision of Lear)’(1998)과 ‘한조(Hanjo)’(2004)를 썼다.

내 눈앞에 펼쳐진 그의 곡은 호른협주곡 ‘꽃이 필 무렵’이었다. 2011년 가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이 내한 공연을 했고, 브루크너의 미완성 대작 9번 교향곡에 앞서, 래틀의 베를린필은 도시오의 호른협주곡을 들려줬다. 1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날의 메인 레퍼토리인 브루크너의 9번만큼이나 강렬했다.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해강 김규진이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

꽃은 어디서 피는가?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다. 꽃은 언제부터 피는가? 활짝 피는 봄날의 한순간이 아니라 겨울 내내 진흙 속에 연꽃이 내장돼 있었다. 꽃은 혼자서 피는가? 온 세상이 연꽃 한 잎 피우기 위해 격렬한 몸부림을 한다. 호른 주자들이 음악당의 2층 난간에 대기하고 있다. 사이먼 래틀은 어느새 오케스트라로부터 몸을 돌려 2층의 좌우 난간을 바라보며 지휘를 한다. 그 순간, 음악당 전체가 연못으로 변한다. 어느 고즈넉한 산사의 연못이런가?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서서히 연못 위로 파란이 번지면서 꽃이 피어오른다. 오케스트라와 호른과 지휘자와 관객이 일제히 꽃잎을 피우기 위해 정성을 바친다. 이윽고 꽃이 피는 순간이 된다. 음악당은 생명의 꽃으로 인해 찬란한 순간에 휩싸인다. 나는 실제로 내 눈앞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개심사의 연못이 생각났다.

그 어느 절보다 각별히 사랑해 서산의 개심사를 자주 다녀오곤 했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했고 여름에는 유록색의 숲이 은성했고 가을에는 소슬한 바람이 나무들 사이에서 잉잉거렸고 겨울에는 흰 눈이 오히려 상왕산의 개심사를 포근하게 감싸곤 했다.



오래전에 나는 개심사의 기품을 찍다가 그만 필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평일 오후, 개심사가 요즘처럼 유명세를 타기 전이라서 찾는 이는 아예 없었다. 그때는 디카 이전이라 다들 필름을 썼는데,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듯한 범종루의 유려한 선을 찍다가 그만 여분의 필름까지 다 쓰고 말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한눈에도 그 배낭은 등산용이 아니라 촬영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정말 예의가 아니지만 필름 한 통만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자기가 쓰는 필름은 내 카메라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과연 그랬다.

그는, 개심사의 그 유명한 배롱나무(백일홍나무) 아래에 배낭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장비를 꺼내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한 손에 달랑 카메라를 든 나에 비해 그의 장비 일체는 가히 영화 촬영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는 중형 카메라를 세팅했다. 나는, 그를 위해 그로부터 멀리 물러섰다. 그의 카메라 앵글에는 속인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그는 카메라 프레임을 경내로 가져가기 전에 배롱나무 아래부터 천천히 찍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그의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배롱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개심사의 연못이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소박하면서도 정직한 개심사의 연못이 거기에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기회가 되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개심사를, 그 연못을 보러 다녔다.

오래전에 그곳에 갈 때는 길이 불편했다. 그런데 불편한 만큼 소박하고 정겨운 데가 있었다. 이 나라의 관광이 자연 관광에서 역사 관광이요 문화 관광으로 바뀌면서, 특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덕분에 개심사는 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긴 그것도 좋은 일이다. 충남 서북부 일대를 ‘내포’라고 한다. 개심사에서 멀지 않은 홍성군 홍북면 일대와 예산군 삽교읍 일대를 지금은 내포 신도시라고 한다.

2008년부터 진행한 충남도청 이전을 2020년 완료할 예정이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내포문화권 특정지역 개발사업’이 진행됐고 개심사를 찾는 관광객 편의를 위해 2011년부터 34억 원을 들여 진입도로 개설이 추진돼 이제는 자전거도로까지 갖출 정도가 됐다. 도로변에는 봄의 개심사를 상징하는 왕벚꽃나무 220주가 심어졌고 주차장도 새로 조성됐다. 이러한 변화는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핵심은 ‘왜 사람들이 개심사를 찾아오는가?’ 하는 그 문화적 질문에 맞는 답이 제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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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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