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삶과 사람들

이주개발 新모델 농촌에서 문화예술마을로

충남 아산 ‘지중해마을’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이주개발 新모델 농촌에서 문화예술마을로

3/3
‘브레인’과 ‘야전사령관’

취재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김 변호사, 김 이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 마을 초입의 음식점을 찾았다. 젊은 층 취향에 맞춘 콘셉트로 5월 말 문을 연 ‘온더그릴(on the grill)’은 뼈 없는 갈빗살을 주방에서 구워내 썰어 먹는 스테이크식 고기요리와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곳. 실내는 문화예술의 거리 이미지와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고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식사 도중 들어온 20~30대 젊은 여성 5명이 김 이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합석했다. “밤에 작업하는 야행성이라 이제야 작업실을 나섰다”는 그들은 탕정산업이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운영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Artist Ressidency)’ 프로그램에 따라 한 달여 전 마을로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김 이사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회사와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오늘이 첫 번째”라며 이들을 소개했다. 주인공은 설치·미디어아트·페인팅·드로잉 등의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 채진숙·박혜원 씨, 작업실을 함께 쓰는 아티스트 그룹 강유진·이상정·정은율 씨였다. 사운드·미디어 아티스트 송은성 씨는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열흘 전 스튜디오 개관식 때 공연과 퍼포먼스를 통해 마을 주민과 인사를 나눴다”는 채진숙 씨는 “가을에 6명이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고 했다. 박혜원 씨는 “마을에서 1층 상가를 작업실로 내줬다. 20평 공간을 혼자 써 대작을 하기에도 부담이 없다. 작업실과 숙소 임차료가 없을 뿐 아니라 수도세, 전기세 같은 공과금도 마을에서 다 부담한다. 함바식당에서 식사도 무료로 할 수 있어 잡다한 일상생활에 신경 쓰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날 미팅에선 마을 곳곳의 설치물과 벽화 작업, 프리마켓 운영 등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제안이 오갔다.

오후 7시를 넘어서자 월요일 저녁임에도 끊임없이 손님이 음식점으로 밀려들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직장 동료와 친구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과 연인들로 70여 개 좌석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땅거미가 내려앉은 마을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슬리퍼에 평상복 차림의 주민들이 ‘마실’ 가듯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낮 동안 푸른빛을 띠던 아치는 빨강과 보라로 순간순간 색을 바꾸며 환한 빛을 발했다. 골목 한가운데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에 불이 들어오자 마을은 순식간에 유럽의 화려한 밤거리 풍경을 연출했다.

올해 2월 중순, 주민들은 빛 축제를 열었다. 검정 실크 햇(silk hat)에 나비넥타이, 검정 벨벳 재킷을 차려입고 능숙하게 말을 모는 마부가 이끄는 유럽풍 꽃마차 투어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풍등 날리기, 노래자랑 등으로 밤늦게까지 흥겨운 마을잔치가 이어졌다. 마을엔 지역문화예술협동조합을 비롯해 도자기 공방과 미술학원이 들어섰고, 1층 상가 곳곳에 명품 로드숍과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4인조 록밴드 제이모닝(Jmorning)은 이곳에 재즈카페를 열고 상주하며 종종 공연을 펼친다. 주말이면 문화예술의 향취를 즐기려고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샘솟는 주민 아이디어

마을이 지금의 성과를 얻기까지는 ‘두둑한 보상금’ 대신 ‘재정착’을 목표로 힘을 모은 주민의 공이 컸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자사의 이익을 포기하고 식당 운영권을 마을 주민에게 준 것도 대단하지만 아예 식당까지 지어줬다. 출발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주민이 고마워한다”고 했다. 보상비를 받은 원주민이 흩어지지 않고 건축이 끝난 다음 다시 모여들어 공동체를 이루는 데도 삼성 측 도움이 컸다. 주민의 ‘공동이주’ 요구를 받아들여 아산 시내 아파트 2단지에 가족별로 임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전세금 없이 무상으로 확보해줬기 때문. 그뿐 아니라 삼성 측은 공동체마을 설계를 위한 마스터플랜 비용도 지원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삼성과 주민 양측이 맺은 합의서 내용의 70%가 지켜졌다. 특히 핵심 요구사항은 대부분 지켜졌다. 주민회관 건립 등 남은 부분은 앞으로 양측 협의하에 시간을 두고 진행될 예정이다. 개발 초기 삼성 측이 주민 주장에 귀 기울이고 요구를 수용하면서 주민도 한발 물러섰다. 66가구가 한곳에 들어갈 공동택지를 받는 대신 전체 173가구 규모로 조성된 이주택지의 노른자위 위치를 양보하고 큰길에서 수십 m 뒤로 물러났다. 한편 주민이 요구하던 대출금의 이자율이 ‘3%’가 아닌 ‘7%’로 결정되자 삼성 측은 차액만큼 건축자재를 제공했고, 주민은 대출금 상환기간을 삼성 측 요구대로 20년에서 10년으로 앞당겼다.

현재 마을 주택 매매가는 불과 1년 남짓한 사이 두 배 상승했다. 금전적 이득보다 주민이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옛 농촌공동체의 정과 인심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는 점이다. 그 결실을 무엇보다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냈다는 데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김 이사는 “어릴 때 농촌마을에선 어른들이 낮이면 모두 논으로 나가 일하기 바빴다. 마을에 아이들만 남겨져도 걱정하지 않았다. 동네마다 ‘호랑이 할아버지’가 꼭 한 명씩 있어서 야단도 치고 보살폈기 때문이다. 혼자 살다 죽으면 마을사람들이 수습해서 묻어주지, 쌀 한 톨 없어도 밥 굶을 걱정 없지…. 그게 우리가 개발을 통해 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렇게 됐다. 북유럽 복지 시스템보다 우리 마을 시스템이 더 좋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주민은 지금도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은다. 그동안 숱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집집마다 임대공간으로 지어진 2층 원룸의 빈 곳을 활용해 올해부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게 된 것도 그런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이밖에도 1층 상가 음식점들의 공동배달 시스템 도입, 다양한 분야 예술가를 위한 아티스트 레지던스 확장, 옥상을 활용한 녹지공간 확보와 별자리 관측, 차 없는 거리, 모노레일 또는 마차 등의 이색 교통수단 운영, 거리 포장마차 도입 등을 구상 중이다. 그 가운데 공동배달 시스템은 ‘산업단지 내 외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불리한 입지조건을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있다. 산업단지 내 아파트와 기숙사는 물론이고 주변 선문대를 비롯한 학교 등으로 배달 영역을 넓히면 상권을 확장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 별자리 관측이나 이색 교통수단, 노점상 도입, 아티스트 레지던스 확장도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 이사는 “주민 생계대책을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이라고 했다.

7월 7일 영일만항 건설로 피해를 당한 주민과 포항영일만신항 항운노동조합원 300여 명은 포항시청 광장에 모여 항만매립 피해주민에 대한 보상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주민은 “생업과 삶의 터전을 시와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모두 내줬지만 포항시의 피해보상대책이 턱없이 미흡하다”고 주장했다. 집회 후 포항시장 면담을 요구하며 시청 진입을 시도하다 제지하는 경찰과 고성이 오가는 몸싸움을 벌였다. 이에 앞서 7월 3일에도 평택시청 앞에서 “부당한 토지보상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재산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주민 시위가 벌어졌다. 평택 일대 산업단지 개발 과정에서 토지 수용 대상이 된 주민들이 들고일어난 것.

정부나 지자체, 기업 등 주체가 누구든 개발이 벌어지는 곳마다 지난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한결같은 풍경이다. 지중해마을도 출발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가지 않던 길을 선택해 독특한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김 변호사는 “기존의 개발 공식과 수순을 따랐다면 원주민 중 많은 수가 뿔뿔이 흩어져 도시빈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신동아 2014년 8월호

3/3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목록 닫기

이주개발 新모델 농촌에서 문화예술마을로

댓글 창 닫기

2019/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