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이 대상의 영광을 누렸던 그해의 강변가요제에 신해철도 참가했다. ‘아기천사’라는 그룹으로. 후일 자신의 솔로 앨범에 실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원곡 격인 ‘그리움은 기다림의 시작이야’라는 노래로 출전해 3차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탈락한 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가요제에서 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약관의 패기였을까.
하지만 허세에 가까운 이 선언을 그는 반년도 되지 않아 지켰다. 그해 겨울 대학가요제 마지막 순서였던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가 무대에 올라 ‘그대에게’를 불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조용필이었다. 들국화도, 시나위도 무한궤도만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것이다. 번듯한 학벌, 잘생긴 얼굴, 화려한 연주, 인트로부터 쉴 틈 없이 달리는 전개,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무한궤도는, 그리고 신해철은 아이돌의 자리에 올랐다.
무한궤도는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가 담긴, 한 장의 앨범을 남긴 후 해체했다. 신해철은 솔로로 전향해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 발라드를 내세운 이 앨범들로 신해철은 무한궤도의 성공을 이어갔다. 여고 앞 문방구에서 그의 브로마이드는 불티나게 팔렸다. 언변도 화려한 덕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MBC ‘우리는 하이틴’으로 DJ 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한국 최초로 전곡을 미디(MIDI)로 작업한 앨범 ‘Myself’는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10대 가수상을 안겨다줬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변진섭, 신승훈, 이승환과 더불어 이문세가 완성한 한국 발라드 가수의 계보 그 시점에 신해철이 있었다. 그가 아이돌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신해철의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생활’ ‘일상’ ‘개인’

지난 7월 jtbc 예능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신해철.
얼터너티브의 물결은 한국에도 상륙해 ‘록=헤비메탈’이라는 등식을 깼다. 긴 머리와 가죽재킷 대신 체크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가 새로운 시대의 록 패션이 됐다. 70년대 펑크에 팝 멜로디를 결합한 너바나의 음악은 그전까지 헤비메탈을 경원시하던 음악 소비자까지 록 팬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노래하던 ‘허무’와 ‘자아’는 때마침 불어닥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최인훈의 ‘화두’ 열풍에 딱 들어맞는 시대정신 같은 것이었다.
음악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1990년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는 더 이상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았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전대협이 해체되고 한총련이 등장했다. 1993년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표어와 함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활’을 전국 학생 조직의 어젠다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일상’이라는 단어가 교정 내 대자보의 단골용어가 될 즈음이었다. 즉, ‘집단’이 아닌 ‘개인’이 화두가 된 것이다.
1992년 고 최진실과 최수종이 주연을 맡은 ‘질투’는 트렌디 드라마를 표방하며 20대의 연애 그 자체를 묘사했다. 편의점이 확산되면서 밤은 소비의 시간이 되었고, 노래방이 유행하며 굳이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서태지와 신해철의 공존
갈 곳 잃은 운동권 인사들은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소비문화에 불과했던 대중문화를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1970년대 이탈리아 아트 록이 뒤늦게 소개되며 몇 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러시아 고전 영화들이 단관 개봉돼 역시 몇 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자크 라캉, 카를 융 등 현대 철학자의 이론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것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이와이 슈ㄴ지가 불법 복사 비디오테이프로나마 소개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역시 1992년에 나왔다. 시대적 격랑의 정점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모든 지형이 바뀌었다. 1982년 미국에서 MTV의 개국으로 음악이 ‘듣는’ 것에서 ‘보는’것으로 전환된 사건이 딱 10년 후 한국에서 일어났다. 발라드와 트로트로 양분되던 시장에 댄스음악이 순식간에 중심에 섰다. 음악의 주도권은 라디오에서 TV로 넘어왔고, 그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잡기 위해 쇼 프로그램 카메라맨들은 온갖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한국어로는 절대 안 될 거라던 랩이 ‘난 알아요’를 통해 한국화했다. 멜로디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음악이 리듬 중심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모든 요소는 음악시장의 주요 소비자를 20대에서 10대 중후반으로 급격히 끌어내렸다. 19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이다. 한국 음악의 1990년대는 그렇게 1992년에 찾아왔다.